중, 고등학교 때부터 폭력의 강도와 횟수는 점점 늘어갔다.
아빠가 그 전날 술 마시고 들어온 날은 집에 들어 가기 싫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없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생활비를 주지 않는 아빠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고 받는 돈으로는 생활이 안되자 장사를 시작하셨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빠가 가장 먼저 시켰던 일은 라면을 끓여 오라는 일이었다.
아빠의 주량은 소주 반병에서 한 병 정도 밖에 안됐는데 일단 한 잔이라도 들어가면 그 때 부터는 술이 술을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까 만취가 되기 전 까지 절대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술에 취해 들어오면 일단 엄마에게 폭력을 휘들었고 그 다음에는 내 방문을 열어 내 머리채를 잡으며 거실로 끓고 나왔다. 거실로 나오고 나면 무릎을 꿀린 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는데 너무 지겨웠다. 정말 이제 제발 그만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두 세 시간씩 듣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면 잠이 더 이상 오지 않았고 그런 날에는 밤을 새고 학교로 가야만 했다.
그래도 맞는 것 보다 이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난 사실 매일 정서적 학대를 겪어야 했다.
특히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을 때 아빠는 내 입에 들어가는 밥이 아까운건지 계속 못 마땅한 표정으로 날 쏘아 보고는 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어도 그 눈빛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는 정말 별것도 아닌 것을 꼬투리 삼아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면 내 표정이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왜 밥상머리 앞에서 인상을 쓰고 있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나는 온가족이 밥 먹는 시간이 정말 싫었다.
나는 어김없이 밥을 먹는데 매일 꼬투리를 잡으며 ‘넌 누구 닮아서 표정이 그 따위냐?’ 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사람인지라 너무 비참해서 반찬을 먹지 않고 눈물을 꾹 참고 맨 밥만 퍼먹은 적도 많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학대하게 된다.
나를 불러 세워 놓고 자주 정말 세차게 따귀를 때리고는 했다. 난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이게 주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아빠는 내게
‘똑바로 살아. 이 놈의 지지배야’ 라고 알 수 없는 얘기를 하고는 했다.
내가 성장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에 하나가 ‘이 놈의 지지배’ 와 ‘썅년’ 이었다.
이럴 때면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싫어질 정도였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다면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폭력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제압할 수 있었을텐데 여자로 태어나 아무 힘없이 일방적으로 맞을 때는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악에 받쳐 있을 때도 많았다.
그리고 아빠는 차고 있던 벨트를 풀어 쇠로 된 버클을 세워 마치 노예를 때리듯이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버클 부분이 내 복숭아뼈나 무릎 등 뼈에 맞으면 자지러듯이 아팠고 가죽으로 된 부분으로 맞으면 피부가 벗겨질 정도록 심하게 맞기 시작했다.
그 어떤 누군가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했다.
난 그렇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말했던 것은
‘아빠, 다시는 안 그럴께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며
무릎 꿇고 비명과 함께 오열을 하며 빌어야 했다.
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잘못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커 갈수록 폭력의 강도가 심해져 갔고 술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폭력은 일상이 되어 버렸던 것 같다.
참 잔인한 일이었다.
난 요즘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아동학대 그리고 가정폭력 사건을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두렵고 떨어야만 했을까를 다시 마주하는 2차적 피해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또한 점점 죄의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부모가 아동이 사망할 때 까지 잔인하게 죽어 가도록 폭력을 휘둘렀다는 기사를 보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아직도 나처럼 많은 아이들이 폭력의 시간 속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