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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09. 2024

엄마의 자살시도

 아빠는 계속해서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적응을 못하고 있었고 

혼자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아빠는 이 시기부터 엄마에게 다른 집을 보면 애 키우면서도 밖에 

나가 돈 벌어오는 여자가 많다고 하며 엄마가 맞벌이 하기를 바랬다고 한다.

 엄마가 일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아빠가 월급을 타고도 제대로 

갖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했고 그러다 남동생을 임신하고

 육아를 하는 바람에 잠시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아빠가 더 이상 스트레스 받아서 회사를 못 다니겠다며 퇴사하고 

술로 풀거나 도박판을 드나들어서 생계는 엄마가 책임지게 되었다.  

 엄마는 그렇게 하루종일 몸이 부서지게 일하고 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며 힘든 하루 하루를 버티고 계셨다.

 근데 아빠는 정신 차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남동생이 서울 랜드로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동생은 들뜬 마음에 먼저 잠이 들었고 나도 자고 있었다.

 근데 아빠의 술 취한 목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새벽 2시였는데 나한테 내 머리를 때리며 엄마를 당장 데려오지 

않으면 너도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엄마가 야간근무를 하는 때였는데 문제는 엄마공장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이다. 공장이 여러 군데였고 밤이라 깜깜했다.

 후레쉬 하나로 여기 저기 불 켜져 있는 공장마다 다니며 엄마를 찾아 다녔다. 

 엄마를 찾아오지 않으면 맞을 거 같아서 무서움을 무릎 쓰고 찾아다니다

 엄마를 한 공장에서 만났다. 

 이 시간에 온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엄마는 왜 왔냐고 하셨다. 

귓속말로 아빠가 술에 많이 취해서 들어 왔고 엄마를 찾아오라고 했다고

 말했더니 일을 중단하고 내 손을 꽉 잡은 채 같이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온 순간 욕을 하며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고 옆으로

 때려서 눕히고는 발로 목을 세게 밟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엄마한테 울면서 ‘엄마~ 엄마~’ 하며 울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와중에도 내가 놀랄까 봐 ‘괜찮아 현진아’ 라고 말하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 이후로 아빠는 자주 엄마의 목을 짓밟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인해 엄마는 지금까지 목 디스크가 너무 심해서 뒷목과 어깨가

 매일 아프시다. 그리고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한바탕을 한 아빠는 픽 쓰러져서 잠이 들었고 엄마는 

겁먹은 나를 토닥거리며 재웠다.

 동생은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이 좋아 방방 뛰었고 엄마도 자식이 소풍날을 기쁘게 보낼 

수 있도록 김밥을 싸고 이것저것 챙겨서 마치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소풍을 갔다 오셨다.

 이 날 찍힌 모든 사진 속에서 엄마는 동생과 함께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러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엄마는 목 경추 뼈의 엄청난 

통증을 참고 계셨다고 한다.

 어느덧 고통과 통증이 일상화 된 것이다.

 근데 동생의 소풍을 갔다 온 그 다음날 밤에 어쩐 일인지 엄마는

 공장을 가지 않았다.

 또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빠는 너무 많이 마셨는지 푹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근데 그날 저녁 엄마한테 예전에 느껴지지 않았던 어둡고 슬픈 

느낌을 받았고 불안한 느낌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누워 있는 척을 하다 새벽 1시쯤에 일어났고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가보니 2L 소주 2병이 있었고 엄마는 큰 대접에 가득 담아 

연신 소주를 마시고 계셨다.

 원래 우리 엄마는 술을 전혀 마실 줄 모르신다.

 엄마는 내가 일어나니까 

 ‘현진아, 내일 아침에 현진이가 좋아하는 라면 끓여줄게’ 라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왠지 내가 잠들면 안 될 것 같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 옆에서 잠도 자지 않은 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음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야 하면서 

엄마가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 주실 것이라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계속 술을 마치 물 마시 듯 마셨고 두병 째 거의 다 마셔가고 

있는데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헐떡거리기 시작했고 양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 쓰러지시더니 경련을 일으켰다.

 순간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내 인생에서 술 취한 아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깨운 날이다. 

왜냐하면 술 취한 아빠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었지만 엄마의 상태가 심각해서 잠깐 망설이다가 아빠를

 깨우게 된 것이다.

 엄마가 이상하다고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술에 덜 깬 아빠는 거실에 쓰러진 채 호흡을 잘 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더니 엄마가 이상하다며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엄마는 차에 실렸고 사력을 다해 빨리 달려 가까운 병원에 데려갔는데

 그 병원에서 아무래도 큰 병원으로 가야 할 거 같다고 해서 대학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급성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였고 혈중농도가 0.5% 이상이 되면 

호흡마비가 일어나고 급성 중독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을 더 

지체했으면 사망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며 그래도 아직은

 위험한 상태이니 1주일 정도 병원에 입원해서 피 검사 등을 진행하며 

경과를 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것 같았고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혼자 다 지켜보았기 때문에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나이는 

고작 12살이었다. 

 엄마의 모습을 봐야 안심할 거 같아서 이모에게 엄마 있는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드렸고 남동생과 나는 엄마를 보러 같이 따라 나섰다.

 남동생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엄마가 계속 안 보이니까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 엄마가 조금 아파서 병원에 있고 엄마 보러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안아 주었다.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내가 평소처럼 그냥 잤으면 엄마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과 아빠가 너무 너무 원망스러웠고 싫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졌다. 그냥 학교도 안다니고 

엄마 곁에 있고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병원에 도착했다.

 엄마가 있는 병실에 들어가니 엄마는 여러 가지의 수액을 맞으며 축

 쳐져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엄마를 보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졌고 엄마를 붙들고 울었다. 

남동생도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누나인 내가 울자 같이 울었다.

 아빠를 봤는데 아빠는 나한테 왜 더 일찍 깨우지 않았냐고 울고 있는

 내게 화를 냈다. 

 우리 가족에게 술 마신 아빠의 모습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눈빛으로 

변해서 생각과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망나니였다. 그나마 아빠를 깨운 것도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난 그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 엄마를 그만 괴롭히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벌써 그런 환경 속에서

 길들여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동생과 함께 외삼촌댁으로 갔고 

다음 날 학교를 가기 위해 책가방을 메고 집 밖으로 나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남동생이 ‘누나~ 누나~’ 라며 엉엉 울며

 맨발로 나를 따라오는 것이다.

 외숙모가 따라 나왔고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가여웠다.

 나도 동생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고 학교도 가기 싫었다.

 동생한테 다가가서 눈물을 닦아주며 

 ‘누나 학교 갔다가 올 테니까 그 때까지 너도 유치원 가야 하고 

조금만 놀다 있으면 누나가 올 거야’ 라고 했더니

 ‘꼭 오는 거지? 빨리 와야 돼. 버스타고 와야 돼’ 말하는 동생에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부터 동생은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 올 시간에 버스가

 오면 누나가 타고 있을까봐 자전거로 열심히 버스를 쫓아오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들이 먼저 버스를 따라오는 동생을 보고 나에게 ‘현진이 동생이다!’

 라며 알려 줬고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발을 저으며 자전거로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러다 다칠까봐 걱정 되었다.

 그래서 버스 창문을 열고 누나가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정류장에

 있을 테니 천천히 그 곳으로 오라고 말했고 내 말이 들렸는지

 ‘응, 알았어’ 하며 여전히 열심히 자전거로 따라 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정류장에서 만났다. 동생이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줄 게 있다고 하며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끓이지도 않은 생 라면 

부신 거를 누나 준다고 먹다 남긴 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게 주는 거다.

 우리 집 근처에 바로 슈퍼가 있었지만 군것질 할 돈이 넉넉하지 않았고 

그런 형편 때문에 한참 먹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친구네 집에서 라면을 부셔 먹다 누나에게 주겠다고 멜빵 바지에 

생라면을 넣었을 동생이 너무 가엽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딱 500원이 남았던 내 동전 지갑을 열어 그 당시에 동생이 좋아하던

 토끼바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남은 돈을 동생에게 주었다. 

 동생은 세상에서 토끼바가 제일 맛있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걸

 보며 군것질 거리를 떼쓰지 않는 녀석의 모습에 웃음 지었다.

 동생은 기억하지 못 하지만 엄마가 내게 주신 평생의 선물로 준 

귀여운 녀석의 모습까지 다 기억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는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둘 다 어른이 되었어도 나에게는 항상 짠하고 어린 아이 같은 동생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용돈이라며 챙겨주거나 갖고 싶은 것을 사주며 

그 때 충분히 누리지 못하던 시절을 보상해 주고 싶다. 

 내가 막 스물이 넘었을 때 진지하게 엄마에게 술을 마신 진짜

 이유를 물어 보았다.

 엄마가 말하기를,

 ‘그렇게 네 아빠가 좋아하는 소주 나도 먹을 수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세상을 뜨고 싶다는

 마음으로 먹었던 게 사실이었지. 그리고 내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도 네 아빠가 소주를 마실까 싶었다. 

그래도 마신다면 술 마시면서 힘들게 고생만 하다 떠난

 마누라를 생각하며 평생 고통 속에서 살길 바랬어’ 라고 

진심을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세상을 떠나더라도 남동생이 손꼽아 기다리던

 놀이동산으로 소풍을 가는 그 날까지는 함께 하고 싶어서

 그 전날 폭행을 당했는데도 다음날 놀이동산을 갔다

 오고 소풍을 갔다 온 날 죽으려는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에 나도 눈물을 터뜨렸다.

 어렸을 때는 나에게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셨다.

 ‘엄마가 속상해서 마신다는 게 조금 많이 마셨나봐. 

그리고 엄마가 술을 못 마시잖아.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

 다음엔 절대 술 안 마실게’ 

 라고 말씀하셨고 진짜 그 이후로 엄마가 술을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나와 한 약속도 있지만 아빠로 인해 술이라고

 하면 지긋지긋 했고 나와 동생을 생각해서 술을 마시지 않으셨다.

 나는 엄마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쭉 내 곁에 있는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고 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언젠가 부터 엄마는 내가 사는 이유였고 내 삶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엄마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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