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5월 7일>
1979년 5월 7일은 내가 태어난 날이다.
우리가 사주를 볼 때 태어난 날과 시를 얘기하듯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생각하고는 한다. 이날 말고 다른 날에 태어났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엄마는 원래 출산 예정일이 한 달 더 남아 있었다. 비탈길이 많은 인천 수봉공원에 갔다 온 것이 무리였는지 엄마는 이날 새벽에 갑작스럽게 진통을 시작했다.
마침 엄마 산달이 가까워져 가고 있어서 외할머니께서 계셨고 그 당신에 세 들어 살던 집 주인 아주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나를 받아내고 고맙게도 그 다음날 주인 아주머니는 딸을 낳았다는 축하 메시지로 대문에 소나무 가지와 숯 금줄을 걸어주셨다고 한다.
집에서 낳은 이유는 신접살림이 가난해서 병원 갈 돈이 없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에서야 말씀하신다. 집에서 낳다 잘 못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깡으로 첫 애를 집에서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엄마는 의료진 없이 수십 시간의 진통으로 홀로 방바닥을 기어 다녔고 손톱자국으로 온 장판이 찢어질 정도로 고통 속에서 나를 세상 밖으로 태어나게 해 주셨다.
이 날에 대해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너 낳던 날 새벽에 비바람이 강하게 불고 천둥, 번개가 치는 장대 같은 비가 왔었고 다음날은 예전에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부들이 아이 낳은 집의 산모 신발을 훔쳐 가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미신이 있는데 엄마의 신발이 없어졌다고 말이다.
그러시면서 너가 아마 잘되려고 누가 신발도 훔쳐 가고 그랬겠지 않냐고 말씀하셨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도 반대의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그 어린 게 뭘 안다고 천둥, 번개가 치는 요란한 밤보다 맑은 날에 태어나야 좋은 거 아닌가 이렇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의 날씨는 뭐 하나 쉽지 않았던 내 인생과 같았다.
그날은 이제 고스란히 앞으로 써 내려갈 나의 힘들고 가여운 삶을 예고한 날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그렇게 79년생으로 5월 7일에 태어났다.
<당신의 첫 기억은 무엇이었습니까?>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의 첫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지금 한번 떠올려 봤으면 한다.
내 인생의 첫 기억은 다섯 살 무렵이다. 단칸방에서 담요를 덮고 있었던 것을 보면 겨울이었던 거 같고 아빠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엄마 옆에 바싹 붙어 떨고 있으면서 괜스레 덮고 있는 이불의 보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아빠가 나를 향해 큰 소리로 뭐라 하면서 내 뺨을 후려 갈겼다.
이때부터였다. 내가 아빠에게 맞기 시작한 게.
그러고 나서 아빠는 집을 나가겠다고 밖으로 뛰쳐나갔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말리러 따라가고 있었다. 무서운 나는 엄마 뒤를 울면서 맨발로 쫓아 가고 있었다.
엄마는 울면서 따라 오는 나를 마침 퇴근하던 단독주택 주인 아저씨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하셨고 나는 주인아저씨에 이끌려 주인집에 따라가야 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울고 있는 내게 먹으라고 감을 주셨는데 한 입 베어 먹어 보니 매우 떫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지금까지도 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감을 보면 그날 일이 어렴풋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날 밤 난 엄마 손 대신 떨감을 손에 쥐고 잠들었다.
내 인생의 첫 기억이 좋은 기억이 아닌 무서움 속에서 혼자였던 유독 작디 작은 어린 아이의 이야기라는 것이 슬프다.
평생을 가정폭력에 시달렸는데 그래도 첫 기억만큼은 보통 아이들처럼 평범한 이야기였으면 안됐을까? 그래도 첫 기억만큼은 좋은 기억이었다면 덜 씁쓸하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든다.
엄마가 말씀 하시기를 원래 아빠는 엄마와 연애를 할 때 부터 몇 년 동안의 신혼 생활 동안 아빠의 폭력성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하고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가끔 살림살이를 부시거나 주정을 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시작된 나쁜 습관은 알콜 중독으로 점점 갈수록 가정폭력은 심해졌다.
즉, 내 인생의 첫 기억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되는 일생의 기억이 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