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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09. 2024

1979년 5월 7일

<1979년 5월 7일>


 1979년 5월 7일은 내가 태어난 날이다.

 우리가 사주를 볼 때 태어난 날과 시를 얘기하듯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생각하고는 한다. 

 이날 말고 다른 날에 태어났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엄마는 원래 출산 예정일이 한 달 더 남아 있었다. 

 비탈길이 많은 인천 수봉공원에 갔다 온 것이 무리였는지

 엄마는 이날 새벽에 갑작스럽게 진통을 시작했다.

 마침 엄마 산달이 가까워져 가고 있어서 외할머니께서 계셨고 

그 당신에 세 들어 살던 집 주인 아주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나를

 받아내고 고맙게도 그 다음날 주인 아주머니는 딸을 낳았다는 축하 메시지로

 대문에 소나무 가지와 숯 금줄을 걸어주셨다고 한다. 

 집에서 낳은 이유는 신접살림이 가난해서 병원 갈 돈이 없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에서야 말씀하신다. 집에서 낳다 잘 못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깡으로 첫 애를 집에서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엄마는 의료진 없이 수십 시간의 진통으로 홀로

 방바닥을 기어 다녔고 손톱자국으로 온 장판이 찢어질 정도로 

고통 속에서 나를 세상 밖으로 태어나게 해 주셨다. 

 이 날에 대해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너 낳던 날 새벽에 비바람이 

강하게 불고 천둥, 번개가 치는 장대 같은 비가 왔었고 

다음날은 예전에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부들이 아이 낳은

 집의 산모 신발을 훔쳐 가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미신이 

있는데 엄마의 신발이 없어졌다고 말이다.

 그러시면서 너가 아마 잘되려고 누가 신발도 훔쳐 가고 

그랬겠지 않냐고 말씀하셨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도 반대의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그 어린 게 뭘 안다고 천둥, 번개가 치는 요란한 밤보다 맑은 

날에 태어나야 좋은 거 아닌가 이렇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의 날씨는 뭐 하나 쉽지 않았던 내 인생과 같았다. 

 그날은 이제 고스란히 앞으로 써 내려갈 나의 힘들고 

가여운 삶을 예고한 날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그렇게 79년생으로 5월 7일에 태어났다.        

   


                                                 

<당신의 첫 기억은 무엇이었습니까?>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의 첫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지금 한번 떠올려 봤으면 한다.

 내 인생의 첫 기억은 다섯 살 무렵이다. 단칸방에서 

담요를 덮고 있었던 것을 보면 겨울이었던 거 같고 아빠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엄마 옆에 바싹 붙어 떨고 있으면서 괜스레 덮고 있는 

이불의 보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아빠가 나를 향해 

큰 소리로 뭐라 하면서 내 뺨을 후려 갈겼다.

 이때부터였다. 내가 아빠에게 맞기 시작한 게. 

 그러고 나서 아빠는 집을 나가겠다고 밖으로 뛰쳐나갔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말리러 따라가고 있었다. 무서운 나는

 엄마 뒤를 울면서 맨발로 쫓아 가고 있었다.

 엄마는 울면서 따라 오는 나를 마침 퇴근하던 단독주택 주인 

아저씨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하셨고 나는 주인아저씨에 이끌려 

주인집에 따라가야 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울고 있는 내게 먹으라고 감을 주셨는데 

한 입 베어 먹어 보니 매우 떫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지금까지도 

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감을 보면 그날 일이 어렴풋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날 밤 난 엄마 손 대신 떨감을 손에 쥐고 잠들었다.

 내 인생의 첫 기억이 좋은 기억이 아닌 무서움 속에서 

혼자였던 유독 작디 작은 어린 아이의 이야기라는 것이 슬프다.

 평생을 가정폭력에 시달렸는데 그래도 첫 기억만큼은 보통

 아이들처럼 평범한 이야기였으면 안됐을까? 그래도 첫 기억만큼은

 좋은 기억이었다면 덜 씁쓸하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든다.
  엄마가 말씀 하시기를 원래 아빠는 엄마와 연애를 할 때 부터 

몇 년 동안의 신혼 생활 동안 아빠의 폭력성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하고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가끔 살림살이를 

부시거나 주정을 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시작된 나쁜 습관은 알콜 중독으로 

점점 갈수록 가정폭력은 심해졌다.

 즉, 내 인생의 첫 기억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되는 일생의 기억이 되버렸다.                                                       



<불행했던 아빠의 삶>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아빠가 어떤 유년시절을 겪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먼저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아빠는 술만 마시고 오면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새벽 3~4시 까지 재우지 않았고 매일 당신께서 

어떻게 커 왔는지에 대해 얘기를 반복하고 반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나마 아빠를 이해하고 끝까지 용서하려 했던

 이유는 아빠의 어린 시절이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셨다.

 친척들에게 전해들은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던 적이 많았고 

간혹 술 마신 채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걸 동네 사람들이 발견해서

 깨울 정도로 술을 너무 좋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친할아버지는 그날도 어김없이 술에 취한 채 화투 방에 들어와

 잠이 들었는데 하필이면 도박꾼의 돈뭉치가 쌓여 있던 보자기 위해 

잠이 들었고 어떻게 하다 그 돈뭉치는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그 위에서 잠이 드는 걸 봤다면서 돈인 줄 알고 

몰래 돈을 빼돌렸다며 모함을 하기 시작했고 화투 방에 있던 

사람들의 집단구타로 돌아가셨다.

 옛날에는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재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할머니는 그 때 당시에 큰 딸과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빠 

그리고 3살 된 딸이 있었는데 아들인 아빠만 데리고 나이 차이가

 많은 홀아비와 재혼을 하셨다. 

 큰 고모는 남의 집 식모살이로 들어가고 3살이었던 작은 

고모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친할머니는 키도 크고 얼굴도 하얗고 

굉장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른들이

 나에게 너희 친할머니가 얼마나 예뻤는 줄 아냐고 말씀하시는 

걸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아빠가 말씀하시기를 친할머니가 아빠를 데리고 다시 

시집을 가셨을 때 의붓아버지와 전처의 자식들에게 눈칫밥을 먹고 

온갖 고생을 했다며 왜 바보같이 친할머니가 재혼을 했는지

 원망스럽다고 하셨다. 

 내가 친할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내 남동생은 한 번

도 때린 적이 없었는데 아빠는 평상시에도 날 유독 미워했고

 술을 마시면 나와 엄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의붓아버지는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아빠에게 너도 앞으로

 밥값을 해야 하니 나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해서 아빠는 낮에 

아이스께끼 장사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물건 값을 돈으로 주지 

않고 큰 정종 같은 빈병을 줬기 때문에 아이스께기를 팔 때마다

 빈병을 어깨에 들쳐 메고 다니는데 너무 무거워서 우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간학교를 

다녔는데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아낸 배 다른 

형제들이 밤에는 이 일, 저 일 등 갖은 집안일을 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아빠는 머리가 굉장히 비상한 편이다. 아빠가 잠깐 중견 

기업의 일을 하청 받아 일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책임자로 있던 

사람이 아빠를 눈여겨보고 지금도 유명한 모 건설회사의 공무과에 

소개해줘서 사업을 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으실 정도였다.

 친할머니는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2명의 자녀를 낳았고 아이를 낳다가

 하혈을 많이 해서 그만 정신을 놓으셨다고 한다. 

 옛날에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에게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동네 미친년이라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는데 친할머니가 집 밖으로

 나가면 동네 애들이 미친년이라고 하면서 돌을 던졌고 아빠는 울면서

 어머니를 감싸 안고 그 돌을 다 대신 맞았다고 하셨다.

 친할머니가 잠시 자기 정신이 돌아올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빠를

 붙들고 우셨다고 한다.

 그러다 아빠 16살에 친할머니는 모아 둔 수면제를 드시고 자살하셨다.

 그 후 의붓아버지는 아빠에게 너희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서 여기서

 못 다닌 학교를 다니라며 교복 값이라고 약간의 돈을 주며 쫓아냈다고 한다.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서 잘 지내는 듯 싶었으나 외할머니가 1년 뒤 

돌아가셨고 외사촌들은 너 줄 밥이 없다며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해서 

17살에 아빠는 쫓겨나고 말았다. 

 그 때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었는데 다른 집 머슴살이를 하며 고생을

 엄청나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태어나서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밥을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항상 내가 이렇게 행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내 자식들에게 더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삶을 사셨다.

 사실 아빠의 유년 시절이 불행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빠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용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유일하게 의지할 존재였던 엄마가 정신을 놓았을 때 어린 마음에 

얼마나 슬펐을까.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자신의 엄마를 놀리고 돌을 던질 때

 대신 그 돌들을 맞으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친할머니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 때 생전에 자기를 붙잡고

 우시던 엄마의 품이 얼마나 그리웠을지 생각하면 나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빠는 슬프고 불행했던 삶을 살아오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빠가 술만 드시면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우리 엄마는 부잣집 딸로 태어났지만 아빠를 만나 

갖갖은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항상 폭력에 노출 되어 있었다. 

 우리 집은 아빠가 술 마시고 있다는 전화를 받으면 언제쯤 저 문을 통해 

들어올까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나는 의붓아버지도 아닌 친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며 두들겨 맞았고 나와

 6살 차이가 나는 어린 내 남동생은 그런 엄마와 누나를 도울 수 없음에

 괴로워했다.

 만약 아빠가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 자랐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그렇다면 아빠는 어쩌면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좋은 가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빠의 이야기를 알기에 아빠를 이해하려는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 모두가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녀를 낳고 따뜻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평생소원이 되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 한 사람으로 인해 엄마와 나 그리고 내 동생까지 

우리 셋의 인생은 점점 짓밟히게 되었고 갈수록 강도가 강해지는 학대에 

노출되면서 아빠에 대한 이해와 용서는 없어지고 있었다.   

 가정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가해자 한 명이 나머지 가족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나는 그렇게 아빠의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반대했던 결혼을 결심한 엄마>     


 누구나 이상에게 엄마 이야기를 하면 눈물부터 난다.

 특히나 평생을 쉬지 못하고 안 해 본 일이 없는 고생과 

자식을 위해 희생한 나의 엄마 이야기는 차마 쉽게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너무 미안하고 고마우며 마음이 아프다.

 엄마는 굉장히 부유한 집의 큰 딸로 태어났다. 특히 증조할머니께서

 우리 큰손녀라 부르며 엄마 위 두 오빠보다 더 예뻐해 주셨다고 한다.

 지금 우리 엄마의 성격은 다혈질에 조금 억세고 자존심이

 굉장히 쎈 편이지만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엄마는 20대 초반까지

 조용조용 하고 세상 물정 모르고 인정 많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워낙 부족한 거 없이 고생을 모르고 곱게 자라셨고 무엇보다

 어른들 틈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순둥 순둥 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20살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아빠를 만나게 됐다.

 아빠는 뽀얀 피부에 예쁘장한 엄마의 모습에 반했고 엄마는 

동네에서 유명할 정도로 잘생긴 아빠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 후 2년 동안 연애를 했고 엄마는 자신과는 달리 상처 많은 

아빠를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결혼을 결심하고 양가에 그 소식을 알려야 했는데 아빠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고아였기 때문에 찾아뵐 어른들이 없었지만 엄마 쪽

 상황은 달랐다. 

 엄마 집에서 아빠를 보실 때 마땅한 직업과 집 없이 친구네 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아빠가 좋아 보일 리 없었다.

 부모님 반대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 때 마침

 엄마는 날 임신하셨고 외가 쪽에서는 맞선을 통한 만남도 아니고 

거기다 혼전 임신은 그 당시에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크게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근데 엄마를 예뻐해 주신 증조할머니께서 내가 허락하겠으니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빨리 식을 올리라고 하셨고 따뜻한 봄에 부모님은 결혼식을 

올리셨다. 그러나 반대하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다른 친척들은 부르지 않았고 

부모님과 증조할머니 그리고 형제만 참석한 초라한 결혼이었다.

 그 당시에 신혼 여행지는 부산이나 제주도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돈이 

없었기 때문에 신혼여행도 못가고 택시 타고 인천 송도유원지를 한 바퀴 돌고 

말았다고 한다. 결혼 후 인천 용현동 단칸방에 신접살림을 차리셨다.

 워낙 밑천 없이 결혼을 한 상태라 가장이 된 아빠는 배를 탔다고 한다. 

엄마는 아빠가 배를 타고 나가면 아빠가 돌아오기까지 한 달 이상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너무 심심해서 스웨터를 뜨는 부업을 하셨다고 한다. 

 하나 완성하는데 천원이었고 하루에 한 장 씩 떠서 한 달에 3만원을 벌었는데

 임신한 상태라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았으나 떨어져 가는 쌀독을 보고 그 돈으로 

쌀을 샀다는 말에 내가 기억하는 것 보다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고생 한 엄마 앞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와 결혼하고 나자마자 아빠는 

옛날에 당신의 어머니가 고아원에 맡긴 여동생을 찾아 나섰고 여동생을 고아원에서

 데려와 함께 살기로 결정해서 엄마는 갑작스레 팔자에도 없는 시누이를 데리고 살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얼마나 외로우면 여동생을 찾겠나 싶어 같이 사는데 동의했는데

 그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작은 고모는 자신의 피붙이를 찾게 되었다는

 고마움은 커녕 거의 소시오패스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성격이 매우 지나쳤다고 한다. 

 그때 당시 고모는 매일 용돈을 요구했고 엄마가 싸 주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기 

싫다며 매일 점심값을 타갔으며 돈이 필요할 때며는 창문 밖에서 돌을 계속해서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 엄마가 나를 임신한 상태였지만 엄마 일을 전혀 도와 주지 않았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일부러 염장을 지르는 등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못된 시누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약하게 태어난 이유가 네 고모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태교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며 말씀하시고는 했다.

 그러나 아빠에게 불만을 말하지 않는 착해빠진 엄마였다.  

 고모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독립을 했다.

 엄마는 결혼 후 계속해서 쭉 혼자 남겨진 기분에 많이 외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가 

바다에서 육지로 돌아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기다림 끝에 깨달은 것은 아빠가

 어떤 사람이고 정말 현실이 무엇인지 그때서야 알았다고 하신다. 

 아빠가 배를 타고 벌어오는 돈은 1979년 그 당시에 너무 큰돈인 한 달에 100만원을 

벌어 왔지만 놀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아빠는 배가 육지에 도착한 후 며칠 동안

 거의 모든 돈을 쓰고 엄마에게 건네주는 건 10만원이 될까 말까 한 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은 낮이고 밤이고 뱃사람들을 집에 데려와 술상을 차리라고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래도 엄마는 별 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오히려 엄마는 아빠가 가져 온 생선 

몇 박스를 대충 부엌에서 손질해 동네 사람들에게 천원에 몇 마리씩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다고 말씀하시며 내가 그렇게 바보였었다고 한숨을 쉬셨다.

 사실 난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중간 중간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신세 한탄하는 식으로 간간이 말씀하시는 

것만 들었는데 내가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나서 엄마의 신혼 생활을 물어보고

 나서야 정확한 실상을 알게 된 것이다. 난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빠가 젊은 나이에 단순한 직업을 얻는 대신 목숨을 걸고 높은 파도에 몸을 

싣고 고된 일을 하는 뱃사람이 되기로 한 이유는 조금 있으면 태어나는 자식과 

아무 조건 없이 자신만 믿고 결혼 한 만삭의 아내를 위한 것이었을텐데 어떻게

 그 돈을 유흥으로 다 쓰고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불행의 신호에 맞닥트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행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었음을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고

 엄마는 평생 고생만 하셨으며 아빠의 가정폭력으로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내가 엄마에게 어느 날은

 ‘엄마! 나였으면 아빠로부터 피해 도망갔을 것 같애.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어? 그리고 왜 도망 안 갔어?’ 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 혼자가 아니라 엄마니까....’

 나는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또 지금도 그렇지만 내 인생의 목표는 엄마였다. 

 그리고 엄마 역시 살아가는 이유는 자식 때문이었다. 




<늘 혼자였던 아이>

          

 부모님은 결혼 후 이사를 자주 다니셨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단칸방을 전전했고 돈을 조금 모아서 단칸방에서 

사글세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장롱 살 돈이 없어 옛날 장롱 대용으로 많이 썼던 천으로 된 캐비닛을 

사용할 정도로 짐이 많지 않아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갈 때는 리어카로 

살림살이를 옮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다가는 계속 사글세 신세를 못 벗어 나갈 거 같아 내가 여섯 살이

 되는 무렵에 엄마는 우아미가구 회사에 취업을 하셨다. 화로 옆 생산 

라인에 있어 항상 38도에서 40도 가까이 가는 곳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여름에는 탈수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아빠는 배를 타고 나갔다가 태풍이 오던 날 밤 잘못해서 실수로 바다에 

빠졌는데 다행이도 선원들에 의해 빨리 구조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에는

 더 이상 배 타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에

 동서가구 회사에 들어가셨다. 

 이렇게 이사 다닐 때 마다 유치원이 자주 바뀌어서 내가 적응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는지 어느 날 부터 엄마에게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하면 

그런 나를 다독이며 엄마가 일 나갈 때 나를 유치원에 데려다 줬다.

 어느 날은 엄마가 퇴근 후 내 유치원 출석 도장을 확인했는데 출석 도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치원에 매일 300원 씩 저금을 하곤 했는데

 돈을 확인해보니 150원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혹시 오늘 유치원에 

안 갔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갔다 왔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 

가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한다. 그래서 그럼 하루 종일 뭐했냐고 물어보니

 그냥 놀이터에서 놀고 150원은 배고파서 슈퍼에서 빵을 사먹었다고 하면서 

더 이상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써서 엄마는 하는 수 없이 그럼 조금만 

쉬고 다시 유치원에 가기로 약속했다고 말씀하셨다.

 내 기억에 그때 다니던 유치원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었는데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 했던 거 같다. 또 기억하는 건 낮잠 자는 시간에 선생님이 

자장가로 피아노를 쳐 주셨는데 하필이면 내 자리가 바로 피아노 옆 자리여서 연주 

소리가 너무 커서 자주 뒤적이다가 잠을 못 드는 것이 너무 싫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로 유치원 가는 걸 완강히 싫어했던 거 같다. 

 근데 문제는 점심 해결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출근하기 전에 점심상을 차려 놓고 나가시면서 놀다가 배고프면

 꼭 점심을 먹어야 한다고 하고 출근하셨다.

 어느 날은 엄마가 궁금해서 회사 점심시간에 집에 잠깐 들러서 몰래 방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김에 찍어 먹으라고 놓은 간장인데 그냥 맨 밥에 간장을 

비벼서 먹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그 자리에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이 어린 게 그래도 배고프다고 아침에 차려 놓고 가서 식은 밥을 대충 배만 

채우려고 꾸역 꾸역 먹는 모습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정성스레 엄마가 차려준 밥도 안 먹겠다고 떼쓰면 엄마가 

따라 다니면서 어떻게든 자식에게 밥을 먹이려고 하는데 내 자식은 영양가도 

없고 맛도 없는 그저 배 채우려고 비빈 간장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한참을 

우셨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 아빠 없이 혼자 알아서 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너무

일찍 철이 든 것 같아 속상했다고 한다.   

 그렇게 유치원에 안가고 온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막 이사 간 그 동네에는

 내 또래가 별로 없었다. 세 들어 살던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퇴근하는 엄마에게 가끔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같은데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대문 앞에서 턱을 괴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날도 있다고 하시면서 보기 안쓰럽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퇴근할 때 마다 내가 귀신같이 알고 저기 멀리서 먼저 달려 와서는

 ‘엄마 돈 많이 벌고 왔어? 나 밥 먹었어! 잘했지? 엄마도 먹었어?” 하며 조잘조잘 말했던

 게 알고 보니 집 앞에 계속 앉아서 엄마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너무 쓰렸다고 한다.

 가난이 주는 아픔을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현실이 원망스럽고 지금까지도 

내게 미안하다고 아직까지 말씀하신다.

 난 여섯 살까지 동생도 없었고 홀로 자라서 손님이 오면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날 막내 이모가 놀러 왔고 밖에 놀러 나간다고 하면서 혼자 밖으로

 나갔는데 손등이 피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집에 들어 와 물어보니 이모 뾰족 

구두가 너무 신고 싶어서 몰래 그 신발을 신고 나갔다가 건물 공사 중인 곳을 

지나다 넘어져서 오른 쪽 손등을 크고 날카로운 돌에 찢겨서 온 것이다.

 아직도 그 흉터가 손등에 조금 남아있다.

 가끔 그 흉터를 보면서 생각한다. 

 내 인생은 지금까지 버거운 큰 신발을 신은 것처럼 항상 위태롭지 않았나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버거운 큰 신발 탓에 결국에는 여러 번 쓰러질 수 밖에 없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 왔던 것 같다.

 악조건 속에도 비틀거려도 항상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써 온 길이었고 지나온 길에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흔적이란 수 많은 트라우마로 인해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였다.




<나의 아픈 손가락내 동생>

          

 내 남동생과 나는 6살 차이가 난다. 

 내가 대학교 1학년 일 때 내 남동생은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한 1학년이었다. 부모님이 일부러 터울을 그렇게 오래 두고 

낳은 게 아니라 엄마 자궁이 약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3개월을 못 버티고

 계속해서 몇 번이고 자연유산을 반복하셨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내가 7살 무렵에 임신을 하셨는데 입덧이 너무

 심해서 먹는 거마다 토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라 아이를 지울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여러 군데 찾아간 병원에서는 또 자연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고 입덧이 너무 

심하니 낙태를 권유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찾은 병원은 지금도 유명한 현재 대학 총장이자 의료인 이길여

 여사가 그때 당시에 동인천에서 개인 산부인과 의사로 계셨는데 마침 부모님이

 동인천에 살고 계셨고 이길여 산부인과가 유명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시기여서 

그 병원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찾아가셨다.

 가서 진료를 봤는데 어떻게 해서 갖은 아이인데 아이를 포기하려 하냐고 입원을

 권유받았으나 형편상 입원을 할 수가 없다고 하니 입덧 멈추는 약을 1주일 치

 처방을 해 주시면서 그래도 입덧이 심하다면 그때 다시 얘기해보자고 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그 약을 먹고 입덧이 사라졌고 아빠는 엄마의 임신을 매우 기뻐하셨다.

 나를 임신하셨을 때는 단칸방에서 주인집 눈치도 봤어야 했고 아빠는 배 타러 

집을 비우던 때가 많은데다가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으면서

 태교를 제대로 못 하셨다. 반면 내 남동생을 임신했을 때는 결혼하고 나서 

열심히 모은 돈으로 작은 연립주택을 사서 이사를 간 상태여서 나를 임신했을

 때와는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이었다. 또 어렵게 둘째를 가진지라 그때는

 아빠가 술도 마시지 않고 매일 웃는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태아 남녀 성별을 가르쳐주지 않을 때였는데 아빠는 내심 

아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내게 남동생이면 귀여운 큰 인형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진통을 호소했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한지 한 십분 뒤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빠는 바라던 아들을 얻어서 매우 기뻐하셨고 나와 약속했듯이 큰 너구리 인형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아빠가 신나게 그 큰 인형을 들고 

비탈길을 내려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평생 엄마와 나는 가정폭력에 

시달렸지만 남동생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내가 오랫 동안 혼자 크면서 외로워했고 그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나한테

 ‘나는 예쁜 동생이 있는데 너는 동생도 없다’ 며 놀려대서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 또한 너무 기뻤었다.  매일 동생 옆에 찰싹 붙어서 동생이 울면 내가 봐 주고

 아기 냄새가 너무 좋다며 킁킁거렸다.

 보통 남동생 있는 친구들은 그저 말 안 듣는 동생이라면서 싸우기도 많이 싸운다며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하지만 내게 동생은 지금까지도 너무 소중한 존재다.

 워낙 나이 차이도 나고 엄마 아빠가 계속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동생을 챙기는 

건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천식이 있어서 소아과를 

꾸준히 다녀야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남동생은 

여섯 살이었다. 특히 주로 겨울에 감기에 자주 걸리니까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많았다. 동생 옷을 따뜻하게 입히고 같이 손을 잡고 소아과로 향하는데 

그 병원이 어린 걸음으로 치면 한 30~40분 정도 걸리는 꽤 먼 거리였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병원에 왔지만 내 남동생은 12살이었던 

내가 보호자였다. 그런 우리가 좀 안 되어 보였는지 진료가 끝나고 병원 

밖을 나가면 간호사 언니가 쫓아와서 초콜릿을 한웅큼씩 주면서 조심히 

잘 가라고 쓰다듬어줬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병원을 갔다가 오는 길은 엄마가 간식 사 먹으라고 준 돈으로

 매일 붕어빵을 사서 동생과 사이좋게 나눠 먹으면서 즐거워했다. 내가 강아지 

흉내를 내면서 ‘한 입만 주세요’ 하면 동생은 발그레 웃으면서 고사리 손으로

 붕어빵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직도 붕어빵을 보면 그 시절이 가끔 생각난다.

 그리고 동생이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엄마들이 데리러

 왔는데 나는 초등학교가 끝나고 나면 동생 유치원으로 가서 동생을 

데리러 갔어야 했다. 

 항상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누나 오기를 기다렸던 녀석.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간식 시간에 먹었던 과자를 누나 

준다고 조금 남겨 났다가 주머니에서 꺼내 내 손에 건네주던 귀여운 

동생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소방차가 지나가면 친구들은 어디 불 난 거 아니야

 하면서 신나 할 때 난 혼자 있는 남동생이 항상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우리 집 방향이 아닌지 확인까지 할 정도로 서로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한번은 내가 12살 때 학교에서 2박 3일로 극기 훈련을 갔는데 처음으로

 누나와 오래 떨어지게 된 거다. 그래서 남동생은 엄마한테 누나가 왜 

오늘은 학교에서 안 오냐고 물었고 엄마는 한밤 자고 올 거라고 말하니까

 ‘내일 눈 뜨면 누나 있는 거지?’ 하면서 잠들었는데 그래도 누나가 없자 

평펑 울었다고 한다. 

 내가 극기 훈련을 갔다 온 날 원래는 친구네 집에서 다들 모여 놀기로 

했는데 동생이 그만 혹시나 또 오랫동안 떨어지게 될까 봐 내 다리를 붙잡고

 울면서 놔주지 않아 친구 집에 가지 못한 기억이 난다.

 그 날 이후 부터 동생의 새로운 습관이 생겨버렸다. 내가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자기도 데려가라고 따라 나서서 친구 집에 갈 때 동생을 한참이나 데리고 다녔다

. 심지어 친구 생일 파티에도 데려갔다.

 이 때 친했던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나면 열심히 누나를 따라 다녔던 동생이

 지금은 몇 살이냐고 물어 볼 정도이다.

 요즘엔 초등학교 오전반, 오후반이 없지만 나와 동생 때는 초등생 인구가 

많아서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다.

 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 아빠는 먼저 출근하셨다. 

 다행이 중학교 가는 길에 동생 학교가 있었고 동생에게는 너무 이른 

시간의 등교였지만 어쩔 수 없이 같이 집을 나와서 동생을 먼저 

학교에 보내 주웠다. 동생은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이 싫다며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놀다가 들어가고는 했다.

 근데 오후반일 때 더 문제였던 건 오전에 놀다가 못 갈 수도 있고

 다시 잠들 수도 있어서 엄마가 시계 알림을 맞춰 놓고 가셨다. 알림이 

울리면 동생은 씻고 차려 놓은 밥을 먹고 학교를 가고는 했다.

 내가 그랬듯 내 동생도 너무 일찍 혼자 알아서 해야 하는 아이로 커 나갔다.     

 학교에서 바자회를 할 때면 자기 것을 사지 않고 누나 준다고 토끼 인형을 

사왔고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H.O.T를 좋아하는 걸 알고는 문방구에서

 H.O.T 엽서를 몇 개 사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했다. 

 그 중 특히 기억하는 건 내가 고3에 올라가기 전 고2 크리스마스 때

 누나는 공부를 잘 하니까 좋은 대학 가라며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 스마일 모양이 

그려져 있던 필통과 수첩을 준비해서 선물을 줬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아빠는 단 한 번도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선물을 사 주거나

 어디를 데려가거나 외식을 시켜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날 술 마시고 들어와서 평소보다 더 때려서 나는 그 날이 여러모로 싫었다.

 받지 못했던 거에 익숙해서 그랬을까? 그날 크리스마스 때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던 내게 동생은 아빠 대신 선물을 준 사랑이 많은 아이였다. 

 동생으로 인해 크리스마스 같은 이런 특별한 날 선물을 받으니 이런 벅찬 

기분이구나 하고 대신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엄마가 야근을 하면 여름에 동생 목욕을 내가 시켜주었는데

 어느 날은 옷을 벗겨보니 엉덩이와 아래 허벅지가 완전히 검게 변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누가 그랬냐고 묻는데 대답을 잘 못 하길래 괜찮으니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이 숙제 안 해 왔다고 큰 몽둥이로 엉덩이를 많이 때렸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엉덩이와 아래 허벅지가 완전히 시커멓게 될 정도로 때린 건 폭력 이상의

 학대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체벌이 아니라 거의 구타에 가까울 정도로

 매질을 당하고 온 것이다.

 아무리 숙제를 안 해 왔다고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동생은 숙제를 두 번 안 해 온 자기가 잘못 한 것이라며 자기 탓인 거 같아 

그렇게 맞고도 말을 하지 못했던 거였다.

 문득 며칠 전 부모님 직업을 써 오라는 빈 종이를 본 적이 있는 거 같아 뭐라고

 썼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공장 아빠는 용접이라고 썼다고 했다.

 왠지 내 동생을 과하게 체벌한 이유가 물론 그렇지 않은 선생님이 많으시지만 

아이들을 지도할 때 부모님의 스펙에 따라 차별하는 선생님은 아닌지 싶었고 

그래서 무시하는 마음에 그런 건 아닌가 싶어 너무 속상한 마음이 들어 동생 몰래 울었다.

 이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가서 엄마가 담임선생님을 봤는데 

이제 갓 부임한 젊은 남자 선생님이어서 더 놀랬다고 한다. 권태가 아닌 한창 아이들

 가르치는데 열정이 가득차고 아이들을 사랑할 시기에 이렇게까지 체벌한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가 순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그런 거 같다고 제발 이번 한번만 

넘어가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그때부터 동생의 숙제 검사를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누나가 바쁜 엄마 대신 자신의 보호자였고 빈자리를 채워주는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말하는 순수한 내 동생이 밖에서 무시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지금 동생 나이가 40살인데 아직까지도 내가 챙겨줘야 할 거 같고 모자란 것은 

없는지 그리고 더 해 주지 못하는 거에 대한 미안함이 항상 있다.

 그리고 제일 안타까운 것은 어렸을 때 나와는 달리 유난히 밝고 개구쟁이에다 

장난기가 넘쳤던 동생이 가정환경으로 인해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성격으로 

변한 거 같아 예전의 껌딱지였던 그 때의 내 동생이 그리울 때가 있다.

 우리가 다 성장하고 나서 동생에게 

 ‘아빠가 밤 늦게까지 술 마시고 나서 새벽에 엄마와 누나를 때릴 때 너는 안 때렸잖아.

 난 그 때 다행이다 싶었어‘ 라고 말했더니 동생이 대답하기를

 ‘엄마와 누나가 맞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였던 나의 마음이 어땠을 것 같아?’

 라고 대답한 말에 깜짝 놀랬다.

 이 아이에게 간접적 폭력은 더 큰 상처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남동생이 절대 안 보는 영화 장르가 있는데 그건

 '가족‘ 에 관한 영화이다.

 처음에는 가족 영화를 안 보는 줄 몰랐는데 어쩌다 대화하다가 본인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충분히 공감이 갖기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았었다.

 마치 나의 이야기 같았던 영화 똥파리가 개봉 되었을 때 영화를 봤는데 남동생도 

그 영화를 본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라는 문구가 무척 다가오는 

영화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가정폭력 속에 자랐던 아들이 성장하여 힘없는 

자신의 아빠를 구타하는 장면이었다.

 솔직히 그 장면을 보면서 폭력의 되물림이 이렇고 저렇고의 생각은 둘째치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시원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신도 한번 당해봐라’ 라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대상이 가족이면 더욱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남동생도 이 영화를 볼 때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따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잘 

알지 못한다.

 다른 영화 얘기 하는 것은 가만히 있다가도 가족 영화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동생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의 미니홈피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

 ‘기분이 이상하다...’

 나 또한 이 영화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에 여기에 담겨진 여러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동생이 중2 때 부터 급격하게 내성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중2 담임선생님과 엄마가 상담할 때 남동생의 얼굴이 어두울 때가 많다라는 

말씀을 중점적으로 하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은근슬쩍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젯밤에 아빠가 술 마시고 와서 살림도 부시고 소리 지르며 엄마와 누나에게 

욕하면서 때리는 것을 듣고 아침까지 깨어 있다가 학교에 왔는데 기분이 우울했어’ 

라고 대답하였다.

 내게 내 동생은 너무나도 아픈 손가락이다.

 나 혼자였다면 그런 시절을 겪을 때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돌봐야 하고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이 있어서 

더욱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고 이제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인 동생을 낳아 주신 엄마에게 고맙다.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는 무섭다.>          


 아빠는 알콜중독 및 조울증 그리고 분노조절장애 뿐만 아니라 

결벽증, 강박증도 있으셨다. 굉장히 깔끔했고 물건 위치도 제자리에 

놓지 않으면 크게 화를 내셨다.

 뿐만 아니라 도박도 즐겨 했는데 도박판에서 돈을 잃고 오는 날에는

 엄마에게 본전이라도 찾아야 한다며 폭력을 휘두르며 어디 가서 어서 빨리 

돈을 빌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돈을 쉽게 빌려주겠는가.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이었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돈을 

빌려주고는 했다.

 엄마는 여기 저기 가서 돈을 빌려 왔고 아빠는 그 돈을 가지고 

다시 나가서 또 화투장에서 놀음을 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소리치고 내가 보는 앞에서 엄마를 때리는 것을

볼 때 마다 난 너무 무서워서 울지도 못하고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기본적으로 아빠가 엄마의 뺨을 때리는 것은 다반사였고 폭력을 휘두르며 

밥상을 엎거나 살림살이를 부시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 횟수는 점점 증가했다.

 나에게도 손찌검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매사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큰 소리로 날 다그치고 또 다그쳤다.

 난 항상 주눅들어 있었고 온 몸이 얼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말하기를 작은 회사에서 아빠가 일처리 하는 능력을 본 어떤 분이 

소개를 해서 이건산업 공무과에 입사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손찌검이 

매우 심해졌다고 한다.

 사실 아빠는 야간 중학교 졸업 학력이었는데 지금은 공채 채용을 통해 

회사에 입사하지만 70~80년대만 하더라도 소개를 통해 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공무과는 이 당시 고졸 이상이나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포진해 있는

 부서였고 주 업무는 도면을 보고 설계하고 제작하는 기술이 필요한 

곳이었다.

 영어로 된 도면을 볼 줄 몰라 사람들과 협업 할 때 물어 보면 같은 

동료들 대부분이 가르쳐 주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왕따로 인해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때 부터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주정을 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폭력을 휘두르며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 마시고 들어 온 다음날은 결근을 했고 아파서 못 나간다고 회사에

 전화하는 것은 늘 엄마의 몫이었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가정환경에서 짧은 학력을 가진 아빠가 거기서 받은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지금도 짐작이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왜 계속 그곳에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자는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것이 복지도 좋고 월급도 많으니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장의 애환이라고 하겠지만 아빠는

 여전히 한 달 동안 힘들게 번 대가로 받은 월급 봉투를 받으면 푹 찢어서 여기 저기

 다니며 쓰고 놀음 돈으로 날려 버렸다.

 엄마 표현에 의하면 가족이 죽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쓸 돈 정도만 찔끔 

가져다 줬다고 한다.

 아빠는 점점 날카로워졌고 주사도 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의 존재 자체가 싫었던지 아니면 화를 낼 대상을 찾아야 했는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매사 못 마땅한 눈빛이었다.

 나는 항상 아빠의 기분을 살피며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혼나지 않게 매사 조심하는 습관이 생긴 영향인지 나 또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강박증이 생겼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학년이 올라가면 새 공책을 사가지고 와서 학년, 반, 이름을

 쓰는데 조금이라도 글씨가 삐뚤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 공책을 다 찢어버리고

 공책을 새로 다시 샀다.  

 또 필통에 연필을 놓을 때 뾰족하게 깎아서 연필 길이에 따라 정리가 되어 있어야

 했고 책상의 책장은 항상 가지런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학교에 오자마자 숙제를 하고 다음날 준비물을

 완벽히 챙겨서 넣은 가방을 현관에 놓고 잠이 들었다.

 강박증이 주는 스트레스와 가정환경 탓인지 몰라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두통이 시작됐다.

 동네에서 내 친구이기도 하고 엄마 친구 아들이었던 아이가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는데 엄마 친구는 별거 아니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뇌종양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단계여서

 내 친구는 그만 어린 나이에 고통스럽게 하늘로 떠났다.

 그래서 그쯤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얘기하는 내가 걱정돼서 엄마가 병원에

 데려갔고 검사를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하기를 간혹 어린 아이들 중에 예민한 친구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 수 있으니 스트레스가 될 만한 원인을 부모님이 차단해주거나 

환경을 바꿔주면 괜찮아질 수 있다고 했지만 나를 둘러싼 가정환경은 점점 나빠졌기 

때문에 두통은 더 심해져 갔다.

 지금이야 이런 케이스라면 한번쯤은 소아 정신과를 찾아 심리검사를 통해 원인을 

파악하고 상담치료를 받거나 약물치료도 병행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아이가 무슨 

스트레스냐며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시기였다.

 계속해서 원인 모를 두통이 항상 있었고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는 하루에 한 번 때로는 두 번 진통제를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책가방에는 항상 진통제가 들어 있었고 먹으면 먹을수록 진통제를 먹는 횟수가

 늘어나고 강도는 깊어졌다.

 지금도 두통이 올 때면 일반의약품은 듣지도 않아 처방을 통해 받은 중증 이상의 통증에 

먹는 강한 진통제를 먹는다. 

 초등학교 올라가면서 두통만 있었던 게 아니라 몽유병도 시작되었다.

 갑자기 자다가 일어나서 헛것을 보고 놀라고 누가 때린다고 혼내 달라고 울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세수를 하더니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고 한다.

 엄마는 많이 걱정했지만 주변에서 아이가 예민하고 허약해서 그러니 잘 먹이고 비타민 

등 영양제도 챙겨 주다보면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자동적으로 없어진다고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몽유병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정의하는 수면 보행증으로 수면 중에 신체활동을

 하며, 자극에 의해 시선이 변하지 않고 때때로 알아들을 수 없거나 의미 없는 말을 하는 증세를

 보이는 장애이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시기에 몽유병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신체는 정직하다. 그릇에 담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을 때 물이 넘쳐서 

흐르듯 정신적 충격을 더 이상 소화할 수 없을 때 신체적으로 이상 반응을 일으킨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몰랐다.

 본격적으로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언어폭력을 넘어 학대와 폭력은 시작되고 고등학교 때는 

감금까지 당했으며 지옥 같았던 대학교 시절을 지나 지금의 나이까지 고통이 계속 될 줄은 몰랐다.

 언젠가는 끝나는 고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참으로 서슬 퍼런 지긋지긋한 팔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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