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혼자였던 아이>
부모님은 결혼 후 이사를 자주 다니셨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단칸방을 전전했고 돈을 조금 모아서 단칸방에서 사글세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장롱 살 돈이 없어 옛날 장롱 대용으로 많이 썼던 천으로 된 캐비닛을 사용할 정도로 짐이 많지 않아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갈 때는 리어카로 살림살이를 옮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다가는 계속 사글세 신세를 못 벗어 나갈 거 같아 내가 여섯 살이 되는 무렵에 엄마는 우아미가구 회사에 취업을 하셨다. 화로 옆 생산 라인에 있어 항상 38도에서 40도 가까이 가는 곳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여름에는 탈수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아빠는 배를 타고 나갔다가 태풍이 오던 날 밤 잘못해서 실수로 바다에 빠졌는데 다행이도 선원들에 의해 빨리 구조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에는 더 이상 배 타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에 동서가구 회사에 들어가셨다.
이렇게 이사 다닐 때 마다 유치원이 자주 바뀌어서 내가 적응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는지 어느 날 부터 엄마에게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하면 그런 나를 다독이며 엄마가 일 나갈 때 나를 유치원에 데려다 줬다.
어느 날은 엄마가 퇴근 후 내 유치원 출석 도장을 확인했는데 출석 도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치원에 매일 300원 씩 저금을 하곤 했는데 돈을 확인해보니 150원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혹시 오늘 유치원에 안 갔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갔다 왔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 가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한다.
그래서 그럼 하루 종일 뭐했냐고 물어보니 그냥 놀이터에서 놀고 150원은 배고파서 슈퍼에서 빵을 사먹었다고 하면서 더 이상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써서 엄마는 하는 수 없이 그럼 조금만 쉬고 다시 유치원에 가기로 약속했다고 말씀하셨다.
내 기억에 그때 다니던 유치원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었는데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 했던 거 같다.
또 기억하는 건 낮잠 자는 시간에 선생님이 자장가로 피아노를 쳐 주셨는데 하필이면 내 자리가 바로 피아노 옆 자리여서 연주 소리가 너무 커서 자주 뒤적이다가 잠을 못 드는 것이 너무 싫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로 유치원 가는 걸 완강히 싫어했던 거 같다.
근데 문제는 점심 해결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출근하기 전에 점심상을 차려 놓고 나가시면서 놀다가 배고프면 꼭 점심을 먹어야 한다고 하고 출근하셨다.
어느 날은 엄마가 궁금해서 회사 점심시간에 집에 잠깐 들러서 몰래 방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김에 찍어 먹으라고 놓은 간장인데 그냥 맨 밥에 간장을 비벼서 먹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그 자리에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이 어린 게 그래도 배고프다고 아침에 차려 놓고 가서 식은 밥을 대충 배만 채우려고 꾸역 꾸역 먹는 모습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정성스레 엄마가 차려준 밥도 안 먹겠다고 떼쓰면 엄마가 따라 다니면서 어떻게든 자식에게 밥을 먹이려고 하는데 내 자식은 영양가도 없고 맛도 없는 그저 배 채우려고 비빈 간장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한참을 우셨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 아빠 없이 혼자 알아서 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너무 일찍 철이 든 것 같아 속상했다고 한다.
그렇게 유치원에 안가고 온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막 이사 간 그 동네에는 내 또래가 별로 없었다.
세 들어 살던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퇴근하는 엄마에게 가끔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같은데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대문 앞에서 턱을 괴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날도 있다고 하시면서 보기 안쓰럽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퇴근할 때 마다 내가 귀신같이 알고 저기 멀리서 먼저 달려 와서는 ‘엄마 돈 많이 벌고 왔어? 나 밥 먹었어! 잘했지? 엄마도 먹었어?” 하며 조잘조잘 말했던 게 알고 보니 집 앞에 계속 앉아서 엄마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너무 쓰렸다고 한다.
가난이 주는 아픔을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현실이 원망스럽고 지금까지도 내게 미안하다고 아직까지 말씀하신다.
난 여섯 살까지 동생도 없었고 홀로 자라서 손님이 오면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날 막내 이모가 놀러 왔고 밖에 놀러 나간다고 하면서 혼자 밖으로 나갔는데 손등이 피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집에 들어 와 물어보니 이모 뾰족 구두가 너무 신고 싶어서 몰래 그 신발을 신고 나갔다가 건물 공사 중인 곳을 지나다 넘어져서 오른 쪽 손등을 크고 날카로운 돌에 찢겨서 온 것이다.
아직도 그 흉터가 손등에 조금 남아있다.
가끔 그 흉터를 보면서 생각한다.
내 인생은 지금까지 버거운 큰 신발을 신은 것처럼 항상 위태롭지 않았나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버거운 큰 신발 탓에 결국에는 여러 번 쓰러질 수 밖에 없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 왔던 것 같다.
악조건 속에도 비틀거려도 항상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써 온 길이었고 지나온 길에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흔적이란 수 많은 트라우마로 인해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였다.
<나의 아픈 손가락>
내 남동생과 나는 6살 차이가 난다.
내가 대학교 1학년 일 때 내 남동생은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한 1학년이었다.
부모님이 일부러 터울을 그렇게 오래 두고 낳은 게 아니라 엄마 자궁이 약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3개월을 못 버티고 계속해서 몇 번이고 자연유산을 반복하셨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내가 7살 무렵에 임신을 하셨는데 입덧이 너무 심해서 먹는 거마다 토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라 아이를 지울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여러 군데 찾아간 병원에서는 또 자연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고 입덧이 너무 심하니 낙태를 권유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찾은 병원은 지금도 유명한 현재 대학 총장이자 의료인 이길여 여사가 그때 당시에 동인천에서 개인 산부인과 의사로 계셨는데 마침 부모님이 동인천에 살고 계셨고 이길여 산부인과가 유명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시기여서 그 병원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찾아가셨다.
가서 진료를 봤는데 어떻게 해서 갖은 아이인데 아이를 포기하려 하냐고 입원을 권유받았으나 형편상 입원을 할 수가 없다고 하니 입덧 멈추는 약을 1주일 치 처방을 해 주시면서 그래도 입덧이 심하다면 그때 다시 얘기해보자고 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그 약을 먹고 입덧이 사라졌고 아빠는 엄마의 임신을 매우 기뻐하셨다.
나를 임신하셨을 때는 단칸방에서 주인집 눈치도 봤어야 했고 아빠는 배 타러 집을 비우던 때가 많은데다가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으면서 태교를 제대로 못 하셨다.
반면 내 남동생을 임신했을 때는 결혼하고 나서 열심히 모은 돈으로 작은 연립주택을 사서 이사를 간 상태여서 나를 임신했을 때와는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이었다. 또 어렵게 둘째를 가진지라 그때는 아빠가 술도 마시지 않고 매일 웃는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태아 남녀 성별을 가르쳐주지 않을 때였는데 아빠는 내심 아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내게 남동생이면 귀여운 큰 인형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진통을 호소했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한지 한 십분 뒤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빠는 바라던 아들을 얻어서 매우 기뻐하셨고 나와 약속했듯이 큰 너구리 인형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아빠가 신나게 그 큰 인형을 들고 비탈길을 내려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평생 엄마와 나는 가정폭력에 시달렸지만 남동생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내가 오랫 동안 혼자 크면서 외로워했고 그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나한테 ‘나는 예쁜 동생이 있는데 너는 동생도 없다’ 며 놀려대서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 또한 너무 기뻤었다.
매일 동생 옆에 찰싹 붙어서 동생이 울면 내가 봐 주고 아기 냄새가 너무 좋다며 킁킁거렸다.
보통 남동생 있는 친구들은 그저 말 안 듣는 동생이라면서 싸우기도 많이 싸운다며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하지만 내게 동생은 지금까지도 너무 소중한 존재다.
워낙 나이 차이도 나고 엄마 아빠가 계속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동생을 챙기는 건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천식이 있어서 소아과를 꾸준히 다녀야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남동생은 여섯 살이었다. 특히 주로 겨울에 감기에 자주 걸리니까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많았다. 동생 옷을 따뜻하게 입히고 같이 손을 잡고 소아과로 향하는데 그 병원이 어린 걸음으로 치면 한 30~40분 정도 걸리는 꽤 먼 거리였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병원에 왔지만 내 남동생은 12살이었던 내가 보호자였다. 그런 우리가 좀 안 되어 보였는지 진료가 끝나고 병원 밖을 나가면 간호사 언니가 쫓아와서 초콜릿을 한웅큼씩 주면서 조심히 잘 가라고 쓰다듬어줬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병원을 갔다가 오는 길은 엄마가 간식 사 먹으라고 준 돈으로 매일 붕어빵을 사서 동생과 사이좋게 나눠 먹으면서 즐거워했다. 내가 강아지 흉내를 내면서 ‘한 입만 주세요’ 하면 동생은 발그레 웃으면서 고사리 손으로 붕어빵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직도 붕어빵을 보면 그 시절이 가끔 생각난다.
그리고 동생이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엄마들이 데리러 왔는데 나는 초등학교가 끝나고 나면 동생 유치원으로 가서 동생을 데리러 갔어야 했다.
항상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누나 오기를 기다렸던 녀석.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간식 시간에 먹었던 과자를 누나 준다고 조금 남겨 났다가 주머니에서 꺼내 내 손에 건네주던 귀여운 동생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소방차가 지나가면 친구들은 어디 불 난 거 아니야 하면서 신나 할 때 난 혼자 있는 남동생이 항상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우리 집 방향이 아닌지 확인까지 할 정도로 서로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한번은 내가 12살 때 학교에서 2박 3일로 극기 훈련을 갔는데 처음으로 누나와 오래 떨어지게 된 거다. 그래서 남동생은 엄마한테 누나가 왜 오늘은 학교에서 안 오냐고 물었고 엄마는 한밤 자고 올 거라고 말하니까 ‘내일 눈 뜨면 누나 있는 거지?’ 하면서 잠들었는데 그래도 누나가 없자 평펑 울었다고 한다.
내가 극기 훈련을 갔다 온 날 원래는 친구네 집에서 다들 모여 놀기로 했는데 동생이 그만 혹시나 또 오랫동안 떨어지게 될까 봐 내 다리를 붙잡고 울면서 놔주지 않아 친구 집에 가지 못한 기억이 난다.
그 날 이후 부터 동생의 새로운 습관이 생겨버렸다. 내가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자기도 데려가라고 따라 나서서 친구 집에 갈 때 동생을 한참이나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 친구 생일 파티에도 데려갔다.
이 때 친했던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나면 열심히 누나를 따라 다녔던 동생이 지금은 몇 살이냐고 물어 볼 정도이다.
요즘엔 초등학교 오전반, 오후반이 없지만 나와 동생 때는 초등생 인구가 많아서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다.
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 아빠는 먼저 출근하셨다.
다행이 중학교 가는 길에 동생 학교가 있었고 동생에게는 너무 이른 시간의 등교였지만 어쩔 수 없이 같이 집을 나와서 동생을 먼저 학교에 보내 주웠다. 동생은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이 싫다며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놀다가 들어가고는 했다.
근데 오후반일 때 더 문제였던 건 오전에 놀다가 못 갈 수도 있고 다시 잠들 수도 있어서 엄마가 시계 알림을 맞춰 놓고 가셨다. 알림이 울리면 동생은 씻고 차려 놓은 밥을 먹고 학교를 가고는 했다.
내가 그랬듯 내 동생도 너무 일찍 혼자 알아서 해야 하는 아이로 커 나갔다.
학교에서 바자회를 할 때면 자기 것을 사지 않고 누나 준다고 토끼 인형을 사왔고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H.O.T를 좋아하는 걸 알고는 문방구에서 H.O.T 엽서를 몇 개 사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했다.
그 중 특히 기억하는 건 내가 고3에 올라가기 전 고2 크리스마스 때 누나는 공부를 잘 하니까 좋은 대학 가라며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 스마일 모양이 그려져 있던 필통과 수첩을 준비해서 선물을 줬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아빠는 단 한 번도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선물을 사 주거나 어디를 데려가거나 외식을 시켜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날 술 마시고 들어와서 평소보다 더 때려서 나는 그 날이 여러모로 싫었다.
받지 못했던 거에 익숙해서 그랬을까? 그날 크리스마스 때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던 내게 동생은 아빠 대신 선물을 준 사랑이 많은 아이였다.
동생으로 인해 크리스마스 같은 이런 특별한 날 선물을 받으니 이런 벅찬 기분이구나 하고 대신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엄마가 야근을 하면 여름에 동생 목욕을 내가 시켜주었는데 어느 날은 옷을 벗겨보니 엉덩이와 아래 허벅지가 완전히 검게 변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누가 그랬냐고 묻는데 대답을 잘 못 하길래 괜찮으니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이 숙제 안 해 왔다고 큰 몽둥이로 엉덩이를 많이 때렸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엉덩이와 아래 허벅지가 완전히 시커멓게 될 정도로 때린 건 폭력 이상의 학대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체벌이 아니라 거의 구타에 가까울 정도로 매질을 당하고 온 것이다.
아무리 숙제를 안 해 왔다고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동생은 숙제를 두 번 안 해 온 자기가 잘못 한 것이라며 자기 탓인 거 같아 그렇게 맞고도 말을 하지 못했던 거였다.
문득 며칠 전 부모님 직업을 써 오라는 빈 종이를 본 적이 있는 거 같아 뭐라고 썼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공장 아빠는 용접이라고 썼다고 했다.
왠지 내 동생을 과하게 체벌한 이유가 물론 그렇지 않은 선생님이 많으시지만 아이들을 지도할 때 부모님의 스펙에 따라 차별하는 선생님은 아닌지 싶었고 그래서 무시하는 마음에
그런 건 아닌가 싶어 너무 속상한 마음이 들어 동생 몰래 울었다.
이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가서 엄마가 담임선생님을 봤는데 이제 갓 부임한 젊은 남자 선생님이어서 더 놀랬다고 한다. 권태가 아닌 한창 아이들 가르치는데 열정이 가득차고 아이들을 사랑할 시기에 이렇게까지 체벌한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가 순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그런 거 같다고 제발 이번 한번만 넘어가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그때부터 동생의 숙제 검사를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누나가 바쁜 엄마 대신 자신의 보호자였고 빈자리를 채워주는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말하는 순수한 내 동생이 밖에서 무시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지금 동생 나이가 40살인데 아직까지도 내가 챙겨줘야 할 거 같고 모자란 것은 없는지 그리고 더 해 주지 못하는 거에 대한 미안함이 항상 있다.
그리고 제일 안타까운 것은 어렸을 때 나와는 달리 유난히 밝고 개구쟁이에다 장난기가 넘쳤던 동생이 가정환경으로 인해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성격으로 변한 거 같아 예전의 껌딱지였던 그 때의 내 동생이 그리울 때가 있다.
우리가 다 성장하고 나서 동생에게
‘아빠가 밤 늦게까지 술 마시고 나서 새벽에 엄마와 누나를 때릴 때 너는 안 때렸잖아.
난 그 때 다행이다 싶었어‘ 라고 말했더니 동생이 대답하기를
‘엄마와 누나가 맞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였던 나의 마음이 어땠을 것 같아?’
라고 대답한 말에 깜짝 놀랬다.
이 아이에게 간접적 폭력은 더 큰 상처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남동생이 절대 안 보는 영화 장르가 있는데 그건 '가족‘ 에 관한 영화이다.
처음에는 가족 영화를 안 보는 줄 몰랐는데 어쩌다 대화하다가 본인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충분히 공감이 갖기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았었다.
마치 나의 이야기 같았던 영화 똥파리가 개봉 되었을 때 영화를 봤는데 남동생도 그 영화를 본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라는 문구가 무척 다가오는 영화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가정폭력 속에 자랐던 아들이 성장하여 힘없는 자신의 아빠를 구타하는 장면이었다.
솔직히 그 장면을 보면서 폭력의 되물림이 이렇고 저렇고의 생각은 둘째치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시원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신도 한번 당해봐라’ 라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대상이 가족이면 더욱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남동생도 이 영화를 볼 때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따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 잘 알지 못한다.
다른 영화 얘기 하는 것은 가만히 있다가도 가족 영화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동생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의 미니홈피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
‘기분이 이상하다...’
나 또한 이 영화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에 여기에 담겨진 여러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동생이 중2 때 부터 급격하게 내성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중2 담임선생님과 엄마가 상담할 때 남동생의 얼굴이 어두울 때가 많다라는 말씀을 중점적으로 하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은근슬쩍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젯밤에 아빠가 술 마시고 와서 살림도 부시고 소리 지르며 엄마와 누나에게 욕하면서 때리는 것을 듣고 아침까지 깨어 있다가 학교에 왔는데 기분이 우울했어’ 라고 대답하였다.
내게 내 동생은 너무나도 아픈 손가락이다.
나 혼자였다면 그런 시절을 겪을 때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돌봐야 하고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이 있어서 더욱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고 이제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인 동생을 낳아 주신 엄마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