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했던 아빠의 삶>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아빠가 어떤 유년시절을 겪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먼저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아빠는 술만 마시고 오면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새벽 3~4시 까지 재우지 않았고 매일 당신께서 어떻게 커 왔는지에 대해 얘기를 반복하고 반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나마 아빠를 이해하고 끝까지 용서하려 했던 이유는 아빠의 어린 시절이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셨다. 친척들에게 전해들은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던 적이 많았고 간혹 술 마신 채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걸 동네 사람들이 발견해서 깨울 정도로 술을 너무 좋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친할아버지는 그날도 어김없이 술에 취한 채 화투 방에 들어와 잠이 들었는데 하필이면 도박꾼의 돈뭉치가 쌓여 있던 보자기 위해 잠이 들었고 어떻게 하다 그 돈뭉치는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그 위에서 잠이 드는 걸 봤다면서 돈인 줄 알고 몰래 돈을 빼돌렸다며 모함을 하기 시작했고 화투 방에 있던 사람들의 집단구타로 돌아가셨다.
옛날에는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재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할머니는 그 때 당시에 큰 딸과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빠 그리고 3살 된 딸이 있었는데 아들인 아빠만 데리고 나이 차이가 많은 홀아비와 재혼을 하셨다.
큰 고모는 남의 집 식모살이로 들어가고 3살이었던 작은 고모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친할머니는 키도 크고 얼굴도 하얗고 굉장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른들이 나에게 너희 친할머니가 얼마나 예뻤는 줄 아냐고 말씀하시는 걸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아빠가 말씀하시기를 친할머니가 아빠를 데리고 다시 시집을 가셨을 때 의붓아버지와 전처의 자식들에게 눈칫밥을 먹고 온갖 고생을 했다며 왜 바보같이 친할머니가 재혼을 했는지 원망스럽다고 하셨다.
내가 친할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내 남동생은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었는데 아빠는 평상시에도 날 유독 미워했고 술을 마시면 나와 엄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의붓아버지는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아빠에게 너도 앞으로 밥값을 해야 하니 나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해서 아빠는 낮에 아이스께끼 장사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물건 값을 돈으로 주지 않고 큰 정종 같은 빈병을 줬기 때문에 아이스께기를 팔 때마다 빈병을 어깨에 들쳐 메고 다니는데 너무 무거워서 우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간학교를 다녔는데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아낸 배 다른 형제들이 밤에는 이 일, 저 일 등 갖은 집안일을 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아빠는 머리가 굉장히 비상한 편이다. 아빠가 잠깐 중견 기업의 일을 하청 받아 일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책임자로 있던 사람이 아빠를 눈여겨보고 지금도 유명한 모 건설회사의 공무과에 소개해줘서 사업을 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으실 정도였다.
친할머니는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2명의 자녀를 낳았고 아이를 낳다가 하혈을 많이 해서 그만 정신을 놓으셨다고 한다.
옛날에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에게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동네 미친년이라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는데 친할머니가 집 밖으로 나가면 동네 애들이 미친년이라고 하면서 돌을 던졌고 아빠는 울면서 어머니를 감싸 안고 그 돌을 다 대신 맞았다고 하셨다.
친할머니가 잠시 자기 정신이 돌아올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빠를 붙들고 우셨다고 한다.
그러다 아빠 16살에 친할머니는 모아 둔 수면제를 드시고 자살하셨다.
그 후 의붓아버지는 아빠에게 너희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서 여기서 못 다닌 학교를 다니라며 교복 값이라고 약간의 돈을 주며 쫓아냈다고 한다.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서 잘 지내는 듯 싶었으나 외할머니가 1년 뒤 돌아가셨고 외사촌들은 너 줄 밥이 없다며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해서 17살에 아빠는 쫓겨나고 말았다.
그 때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었는데 다른 집 머슴살이를 하며 고생을 엄청나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태어나서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밥을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항상 내가 이렇게 행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내 자식들에게 더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삶을 사셨다.
사실 아빠의 유년 시절이 불행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빠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용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유일하게 의지할 존재였던 엄마가 정신을 놓았을 때 어린 마음에 얼마나 슬펐을까.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자신의 엄마를 놀리고 돌을 던질 때 대신 그 돌들을 맞으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친할머니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 때 생전에 자기를 붙잡고 우시던 엄마의 품이 얼마나 그리웠을지 생각하면 나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빠는 슬프고 불행했던 삶을 살아오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빠가 술만 드시면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우리 엄마는 부잣집 딸로 태어났지만 아빠를 만나 갖갖은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항상 폭력에 노출 되어 있었다.
우리 집은 아빠가 술 마시고 있다는 전화를 받으면 언제쯤 저 문을 통해 들어올까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나는 의붓아버지도 아닌 친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며 두들겨 맞았고 나와 6살 차이가 나는 어린 내 남동생은 그런 엄마와 누나를 도울 수 없음에 괴로워했다.
만약 아빠가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 자랐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그렇다면 아빠는 어쩌면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좋은 가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빠의 이야기를 알기에 아빠를 이해하려는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 모두가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녀를 낳고 따뜻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평생소원이 되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 한 사람으로 인해 엄마와 나 그리고 내 동생까지 우리 셋의 인생은 점점 짓밟히게 되었고 갈수록 강도가 강해지는 학대에 노출되면서 아빠에 대한 이해와 용서는 없어지고 있었다.
가정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가해자 한 명이 나머지 가족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아빠의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반대했던 결혼을 결심한 엄마>
누구나 이상에게 엄마 이야기를 하면 눈물부터 난다.
특히나 평생을 쉬지 못하고 안 해 본 일이 없는 고생과 자식을 위해 희생한 나의 엄마 이야기는 차마 쉽게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너무 미안하고 고마우며 마음이 아프다.
엄마는 굉장히 부유한 집의 큰 딸로 태어났다. 특히 증조할머니께서 우리 큰손녀라 부르며 엄마 위 두 오빠보다 더 예뻐해 주셨다고 한다.
지금 우리 엄마의 성격은 다혈질에 조금 억세고 자존심이 굉장히 쎈 편이지만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엄마는 20대 초반까지 조용조용 하고 세상 물정 모르고 인정 많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워낙 부족한 거 없이 고생을 모르고 곱게 자라셨고 무엇보다 어른들 틈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순둥 순둥 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20살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아빠를 만나게 됐다.
아빠는 뽀얀 피부에 예쁘장한 엄마의 모습에 반했고 엄마는 동네에서 유명할 정도로 잘생긴 아빠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 후 2년 동안 연애를 했고 엄마는 자신과는 달리 상처 많은 아빠를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결혼을 결심하고 양가에 그 소식을 알려야 했는데 아빠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고아였기 때문에 찾아뵐 어른들이 없었지만 엄마 쪽 상황은 달랐다.
엄마 집에서 아빠를 보실 때 마땅한 직업과 집 없이 친구네 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아빠가 좋아 보일 리 없었다.
부모님 반대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 때 마침 엄마는 날 임신하셨고 외가 쪽에서는 맞선을 통한 만남도 아니고 거기다 혼전 임신은 그 당시에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크게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근데 엄마를 예뻐해 주신 증조할머니께서 내가 허락하겠으니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빨리 식을 올리라고 하셨고 따뜻한 봄에 부모님은 결혼식을 올리셨다.
그러나 반대하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다른 친척들은 부르지 않았고 부모님과 증조할머니 그리고 형제만 참석한 초라한 결혼이었다.
그 당시에 신혼 여행지는 부산이나 제주도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돈이 없었기 때문에 신혼여행도 못가고 택시 타고 인천 송도유원지를 한 바퀴 돌고 말았다고 한다.
결혼 후 인천 용현동 단칸방에 신접살림을 차리셨다.
워낙 밑천 없이 결혼을 한 상태라 가장이 된 아빠는 배를 탔다고 한다. 엄마는 아빠가 배를 타고 나가면 아빠가 돌아오기까지 한 달 이상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너무 심심해서 스웨터를 뜨는 부업을 하셨다고 한다.
하나 완성하는데 천원이었고 하루에 한 장 씩 떠서 한 달에 3만원을 벌었는데 임신한 상태라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았으나 떨어져 가는 쌀독을 보고 그 돈으로 쌀을 샀다는 말에 내가 기억하는 것 보다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고생 한 엄마 앞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와 결혼하고 나자마자 아빠는 옛날에 당신의 어머니가 고아원에 맡긴 여동생을 찾아 나섰고 여동생을 고아원에서 데려와 함께 살기로 결정해서 엄마는 갑작스레 팔자에도 없는 시누이를 데리고 살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얼마나 외로우면 여동생을 찾겠나 싶어 같이 사는데 동의했는데 그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작은 고모는 자신의 피붙이를 찾게 되었다는 고마움은 커녕 거의 소시오패스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성격이 매우 지나쳤다고 한다.
그때 당시 고모는 매일 용돈을 요구했고 엄마가 싸 주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기 싫다며 매일 점심값을 타갔으며 돈이 필요할 때며는 창문 밖에서 돌을 계속해서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 엄마가 나를 임신한 상태였지만 엄마 일을 전혀 도와 주지 않았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일부러 염장을 지르는 등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못된 시누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약하게 태어난 이유가 네 고모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태교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며 말씀하시고는 했다.
그러나 아빠에게 불만을 말하지 않는 착해빠진 엄마였다.
고모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독립을 했다.
엄마는 결혼 후 계속해서 쭉 혼자 남겨진 기분에 많이 외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가 바다에서 육지로 돌아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기다림 끝에 깨달은 것은 아빠가 어떤 사람이고 정말 현실이 무엇인지 그때서야 알았다고 하신다.
아빠가 배를 타고 벌어오는 돈은 1979년 그 당시에 너무 큰돈인 한 달에 100만원을 벌어 왔지만 놀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아빠는 배가 육지에 도착한 후 며칠 동안 거의 모든 돈을 쓰고 엄마에게 건네주는 건 10만원이 될까 말까 한 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은 낮이고 밤이고 뱃사람들을 집에 데려와 술상을 차리라고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래도 엄마는 별 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오히려 엄마는 아빠가 가져 온 생선 몇 박스를 대충 부엌에서 손질해 동네 사람들에게 천원에 몇 마리씩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다고 말씀하시며 내가 그렇게 바보였었다고 한숨을 쉬셨다.
사실 난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중간 중간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신세 한탄하는 식으로 간간이 말씀하시는 것만 들었는데 내가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나서 엄마의 신혼 생활을 물어보고 나서야 정확한 실상을 알게 된 것이다.
난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빠가 젊은 나이에 단순한 직업을 얻는 대신 목숨을 걸고 높은 파도에 몸을 싣고 고된 일을 하는 뱃사람이 되기로 한 이유는 조금 있으면 태어나는 자식과 아무 조건 없이 자신만 믿고 결혼 한 만삭의 아내를 위한 것이었을텐데 어떻게 그 돈을 유흥으로 다 쓰고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불행의 신호에 맞닥트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행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었음을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고 엄마는 평생 고생만 하셨으며 아빠의 가정폭력으로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내가 엄마에게 어느 날은
‘엄마! 나였으면 아빠로부터 피해 도망갔을 것 같애.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어? 그리고 왜 도망 안 갔어?’
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 혼자가 아니라 엄마니까....’
나는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또 지금도 그렇지만 내 인생의 목표는 엄마였다.
그리고 엄마 역시 살아가는 이유는 자식 때문이었다
<엄마의 자살 시도 -결혼을 하지 말았을 이유>
아빠는 계속해서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적응을 못하고 있었고 혼자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아빠는 이 시기부터 엄마에게 다른 집을 보면 애 키우면서도 밖에 나가 돈 벌어오는 여자가 많다고 하며 엄마가 맞벌이 하기를 바랬다고 한다.
엄마가 일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아빠가 월급을 타고도 제대로 갖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했고 그러다 남동생을 임신하고 육아를 하는 바람에 잠시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아빠가 더 이상 스트레스 받아서 회사를 못 다니겠다며 퇴사하고 술로 풀거나 도박판을 드나들어서 생계는 엄마가 책임지게 되었다.
엄마는 그렇게 하루종일 몸이 부서지게 일하고 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며 힘든 하루 하루를 버티고 계셨다.
근데 아빠는 정신 차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남동생이 서울 랜드로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동생은 들뜬 마음에 먼저 잠이 들었고 나도 자고 있었다.
근데 아빠의 술 취한 목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새벽 2시였는데 나한테 내 머리를 때리며 엄마를 당장 데려오지 않으면 너도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엄마가 야간근무를 하는 때였는데 문제는 엄마공장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이다. 공장이 여러 군데였고 밤이라 깜깜했다.
후레쉬 하나로 여기 저기 불 켜져 있는 공장마다 다니며 엄마를 찾아 다녔다.
엄마를 찾아오지 않으면 맞을 거 같아서 무서움을 무릎 쓰고 찾아다니다 엄마를 한 공장에서 만났다.
이 시간에 온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엄마는 왜 왔냐고 하셨다. 귓속말로 아빠가 술에 많이 취해서 들어 왔고 엄마를 찾아오라고 했다고 말했더니 일을 중단하고 내 손을 꽉 잡은 채 같이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온 순간 욕을 하며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고 옆으로 때려서 눕히고는 발로 목을 세게 밟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엄마한테 울면서 ‘엄마~ 엄마~’ 하며 울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와중에도 내가 놀랄까 봐 ‘괜찮아 현진아’ 라고 말하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 이후로 아빠는 자주 엄마의 목을 짓밟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인해 엄마는 지금까지 목 디스크가 너무 심해서 뒷목과 어깨가 매일 아프시다. 그리고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한바탕을 한 아빠는 픽 쓰러져서 잠이 들었고 엄마는 겁먹은 나를 토닥거리며 재웠다.
동생은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이 좋아 방방 뛰었고 엄마도 자식이 소풍날을 기쁘게 보낼 수 있도록 김밥을 싸고 이것저것 챙겨서 마치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소풍을 갔다 오셨다.
이 날 찍힌 모든 사진 속에서 엄마는 동생과 함께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러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엄마는 목 경추 뼈의 엄청난 통증을 참고 계셨다고 한다.
어느덧 고통과 통증이 일상화 된 것이다.
근데 동생의 소풍을 갔다 온 그 다음날 밤에 어쩐 일인지 엄마는 공장을 가지 않았다.
또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빠는 너무 많이 마셨는지 푹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근데 그날 저녁 엄마한테 예전에 느껴지지 않았던 어둡고 슬픈 느낌을 받았고 불안한 느낌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누워 있는 척을 하다 새벽 1시쯤에 일어났고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가보니 2L 소주 2병이 있었고 엄마는 큰 대접에 가득 담아 연신 소주를 마시고 계셨다.
원래 우리 엄마는 술을 전혀 마실 줄 모르신다.
엄마는 내가 일어나니까
‘현진아, 내일 아침에 현진이가 좋아하는 라면 끓여줄게’ 라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왠지 내가 잠들면 안 될 것 같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 옆에서 잠도 자지 않은 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음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야 하면서 엄마가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 주실 것이라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계속 술을 마치 물 마시 듯 마셨고 두병 째 거의 다 마셔가고 있는데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헐떡거리기 시작했고 양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 쓰러지시더니 경련을 일으켰다.
순간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내 인생에서 술 취한 아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깨운 날이다. 왜냐하면 술 취한 아빠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었지만 엄마의 상태가 심각해서 잠깐 망설이다가 아빠를 깨우게 된 것이다.
엄마가 이상하다고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술에 덜 깬 아빠는 거실에 쓰러진 채 호흡을 잘 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더니 엄마가 이상하다며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엄마는 차에 실렸고 사력을 다해 빨리 달려 가까운 병원에 데려갔는데 그 병원에서 아무래도 큰 병원으로 가야 할 거 같다고 해서 대학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급성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였고 혈중농도가 0.5% 이상이 되면 호흡마비가 일어나고 급성 중독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을 더 지체했으면 사망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며 그래도 아직은 위험한 상태이니 1주일 정도 병원에 입원해서 피 검사 등을 진행하며 경과를 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것 같았고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혼자 다 지켜보았기 때문에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나이는 고작 12살이었다.
엄마의 모습을 봐야 안심할 거 같아서 이모에게 엄마 있는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드렸고 남동생과 나는 엄마를 보러 같이 따라 나섰다.
남동생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엄마가 계속 안 보이니까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 엄마가 조금 아파서 병원에 있고 엄마 보러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안아 주었다.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내가 평소처럼 그냥 잤으면 엄마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과 아빠가 너무 너무 원망스러웠고 싫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졌다. 그냥 학교도 안다니고 엄마 곁에 있고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병원에 도착했다.
엄마가 있는 병실에 들어가니 엄마는 여러 가지의 수액을 맞으며 축 쳐져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엄마를 보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졌고 엄마를 붙들고 울었다. 남동생도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누나인 내가 울자 같이 울었다.
아빠를 봤는데 아빠는 나한테 왜 더 일찍 깨우지 않았냐고 울고 있는 내게 화를 냈다.
우리 가족에게 술 마신 아빠의 모습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눈빛으로 변해서 생각과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망나니였다. 그나마 아빠를 깨운 것도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난 그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 엄마를 그만 괴롭히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벌써 그런 환경 속에서 길들여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동생과 함께 외삼촌댁으로 갔고 다음 날 학교를 가기 위해 책가방을 메고 집 밖으로 나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남동생이 ‘누나~ 누나~’ 라며 엉엉 울며 맨발로 나를 따라오는 것이다.
외숙모가 따라 나왔고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가여웠다.
나도 동생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고 학교도 가기 싫었다.
동생한테 다가가서 눈물을 닦아주며
‘누나 학교 갔다가 올 테니까 그 때까지 너도 유치원 가야 하고 조금만 놀다 있으면 누나가 올 거야’ 라고 했더니
‘꼭 오는 거지? 빨리 와야 돼. 버스타고 와야 돼’ 말하는 동생에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부터 동생은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 올 시간에 버스가 오면 누나가 타고 있을까봐 자전거로 열심히 버스를 쫓아오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들이 먼저 버스를 따라오는 동생을 보고 나에게 ‘현진이 동생이다!’ 라며 알려 줬고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발을 저으며 자전거로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러다 다칠까봐 걱정 되었다.
그래서 버스 창문을 열고 누나가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정류장에 있을 테니 천천히 그 곳으로 오라고 말했고 내 말이 들렸는지 ‘응, 알았어’ 하며 여전히 열심히 자전거로 따라 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정류장에서 만났다. 동생이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줄 게 있다고 하며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끓이지도 않은 생 라면 부신 거를 누나 준다고 먹다 남긴 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게 주는 거다.
우리 집 근처에 바로 슈퍼가 있었지만 군것질 할 돈이 넉넉하지 않았고 그런 형편 때문에 한참 먹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친구네 집에서 라면을 부셔 먹다 누나에게 주겠다고 멜빵 바지에 생라면을 넣었을 동생이 너무 가엽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딱 500원이 남았던 내 동전 지갑을 열어 그 당시에 동생이 좋아하던 토끼바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남은 돈을 동생에게 주었다.
동생은 세상에서 토끼바가 제일 맛있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걸 보며 군것질 거리를 떼쓰지 않는 녀석의 모습에 웃음 지었다.
동생은 기억하지 못 하지만 엄마가 내게 주신 평생의 선물로 준 귀여운 녀석의 모습까지 다 기억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는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둘 다 어른이 되었어도 나에게는 항상 짠하고 어린 아이 같은 동생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용돈이라며 챙겨주거나 갖고 싶은 것을 사주며 그 때 충분히 누리지 못하던 시절을 보상해 주고 싶다.
내가 막 스물이 넘었을 때 진지하게 엄마에게 술을 마신 진짜 이유를 물어 보았다.
엄마가 말하기를,
‘그렇게 네 아빠가 좋아하는 소주 나도 먹을 수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세상을 뜨고 싶다는 마음으로 먹었던 게 사실이었지. 그리고 내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도 네 아빠가 소주를 마실까 싶었다. 그래도 마신다면 술 마시면서 힘들게 고생만 하다 떠난 마누라를 생각하며 평생 고통 속에서 살길 바랬어’ 라고 진심을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세상을 떠나더라도 남동생이 손꼽아 기다리던 놀이동산으로 소풍을 가는 그 날까지는 함께 하고 싶어서 그 전날 폭행을 당했는데도 다음날 놀이동산을 갔다 오고 소풍을 갔다 온 날 죽으려는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에 나도 눈물을 터뜨렸다.
어렸을 때는 나에게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셨다.
‘엄마가 속상해서 마신다는 게 조금 많이 마셨나봐. 그리고 엄마가 술을 못 마시잖아.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 다음엔 절대 술 안 마실게’
라고 말씀하셨고 진짜 그 이후로 엄마가 술을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나와 한 약속도 있지만 아빠로 인해 술이라고 하면 지긋지긋 했고 나와 동생을 생각해서 술을 마시지 않으셨다.
나는 엄마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쭉 내 곁에 있는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고 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언젠가 부터 엄마는 내가 사는 이유였고 내 삶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엄마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