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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11. 2024

제발...살려 주세요

 중, 고등학교 때부터 폭력의 강도와 횟수는 점점 늘어갔다. 

 아빠가 그 전날 술 마시고 들어온 날은 집에 들어 가기 싫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없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생활비를 주지 않는 아빠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고

 받는 돈으로는 생활이 안되자 장사를 시작하셨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빠가 가장 먼저 시켰던 일은 라면

을 끓여 오라는 일이었다.

 아빠의 주량은 소주 반병에서 한 병 정도 밖에 안됐는데 일단

 한 잔이라도 들어가면 그 때 부터는 술이 술을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까 만취가 되기 전 까지 절대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술에 취해 들어오면 일단 엄마에게 폭력을 휘들었고 그 

다음에는 내 방문을 열어 내 머리채를 잡으며 거실로 끓고

 나왔다. 거실로 나오고 나면 무릎을 꿀린 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는데 너무 지겨웠다. 정말 이제 제발 그만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두 세 시간씩 듣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면 잠이

 더 이상 오지 않았고 그런 날에는 밤을 새고 학교로 가야만 했다.

 그래도 맞는 것 보다 이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난 사실 매일 정서적 학대를 겪어야 했다.

 특히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을 때 아빠는 내 입에 들어가는

 밥이 아까운건지 계속 못 마땅한 표정으로 날 쏘아 보고는 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어도 그 눈빛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는 정말 별것도 아닌 것을 꼬투리 삼아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면 내 표정이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왜 밥상머리 앞에서 

인상을 쓰고 있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나는 온가족이 밥 먹는 시간이 정말 싫었다.

 나는 어김없이 밥을 먹는데 매일 꼬투리를 잡으며

 ‘넌 누구 닮아서 표정이 그 따위냐?’ 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사람인지라 너무 비참해서 반찬을 먹지 않고 눈물을 

꾹 참고 맨 밥만 퍼먹은 적도 많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학대하게 된다.

 나를 불러 세워 놓고 자주 정말 세차게 따귀를 때리고는 했다. 난 내가 무엇

을 잘못 했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이게 주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아빠는 내게

 ‘똑바로 살아. 이 놈의 지지배야’ 라고 알 수 없는 얘기를 하고는 했다.

 내가 성장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에 하나가 ‘이 놈의 지지배’ 와 ‘썅년’ 이었다. 

 이럴 때면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싫어질 정도였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다면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폭력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제압할 수 있었을텐데 여자로 태어나 아무 힘없이 일방적으로 맞을 때

는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악에 받쳐 있을 때도 많았다.

 그리고 아빠는 차고 있던 벨트를 풀어 쇠로 된 버클을 세워 마치 노예를 

때리듯이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버클 부분이 내 복숭아뼈나 무릎 등 뼈에 맞으면

 자지러듯이 아팠고 가죽으로 된 부분으로 맞으면 피부가 벗겨질 정도록

 심하게 맞기 시작했다.

 그 어떤 누군가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했다.

 난 그렇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말했던 것은

 ‘아빠, 다시는 안 그럴께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며

 무릎 꿇고 비명과 함께 오열을 하며 빌어야 했다.

 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잘못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커 갈수록 폭력의 강도가 심해져 갔고 술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폭력은 일상이 되어 버렸던 것 같다.

 참 잔인한 일이었다.

 난 요즘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아동학대 그리고 가정폭력 사건을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두렵고 떨어야만 했을까를

 다시 마주하는 2차적 피해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또한 점점 죄의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부모가 아동이 사망할 때 까지

 잔인하게 죽어 가도록 폭력을 휘둘렀다는 기사를 보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아직도 나처럼 많은 아이들이 폭력의 시간 속에 갇혀 있다.



제일 잊지 못하는 폭력          

 #. 1     

 사실 과거로부터 이 기억을 꺼내는 것이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였다.

 내가 제일 잊지 못하는 3번의 기억은 중학교

 3학년 때 겪었던 두 경우와 대학 때 겪었던 한 경우이다.

 먼저 이야기 할 것은 학력고사 바로 전날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 때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 학력고사라는 시험을 봐야 했다.

 아빠는 유독 나를 싫어했고 나에게 들어가는 돈을

 굉장히 아까워했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보내주지 않겠다고

 해서 고심 끝에 편지를 써서 아빠에게 건네 드렸고 아빠가

 며칠 생각하시더니 허락을 해 주셨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중, 고등학교 극기훈련이나 수학여행에

 보내 주지 않을까봐 항상 마음을 졸여야 했다.

 고등학교 진학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일 있을 학력고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또 무차별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먼저 싸대기를 몇 대 맞았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항상 머리채부터 휘어잡고 싸대기를 때리는 것은 기본이었기

 때문에 그건 그냥 익숙한 패턴이었다.

 예민해져 있던 나는 그날 ‘그래, 어디 죽여 봐’ 라는 생각으로 독하게

 아빠를 째려봤더니 아빠는 그 때부터 이성을 잃어서

 차고 있던 벨트를 풀어 버클이 몸을 가격할 수 있도록 

잡은 뒤 사정없이 내려쳤다.

 이렇게 인정사정없이 맞을 때에는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었으면 했다. 아니면 이 상황을 못 견뎌서 그냥 미쳐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사정없이 나를 밟기 시작했고 난 최대한

 웅크려서 덜 밟히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두 세 시간을 맞았던 거 같다.

 결국에는 내가 졌다.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울면서 빌었다. 

정말 치욕적이었다.

 내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나는 항상 맞을 때 마다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비벼가면서 매달려야 하는가?

 이 날 만큼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일이 중요한 학력고사인데 그 전날 밤 남도 아니고 

계부도 아닌 친 아빠에게 이렇게 두들겨 맞는 학생이 몇 명이 될까?

 이날은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새벽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몇 시간을 울었다.

 그 다음날 일어났더니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얼굴도 붓고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다.

 여기 저기 맞았으니 근육통도 상당하고 생채기도 심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시험을 치르는데 시험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간신히 시험을 마쳤고 

 난 그 때 처음으로 위험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나의 미래는 희망이 없구나. 일단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 

어서 벗어나자. 아니 달아나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든 

생각은 아버지라는 저 사람을 내가 없애야 우리 가족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감옥에 있는 것이 편하지 이렇게는 더 이상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차마 위험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이유는 

엄마와 남동생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내 자신이 가여워서 

나를 지키는 일은 나만이 할 수 있고 그러려면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을 가서

 바른 사회인으로 성공해 불쌍한 내 인생을 구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그래도 아버지인데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할 수 

있음에 놀랄 수 있고 거부감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동학대나 

가족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이 사람 취급을 못 받고 한 사람의 무자비한 폭력이 다른 가족을 모두 

지배하며 피해자들은 살아가는 의미와 희망이 없어진다. 또한 매일 매일이

 불안하며 두렵고, 그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며 오히려 피해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웃 주변이나 친척 및 친구들이 알까 봐 숨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우리나라 가정폭력은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그에 반해 처벌은 너무 약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신고를 해서 가해자가 처벌을 받아 교도소에 들어가도 

낮은 형량을 받고 또 다시 찾아 와 더 한 폭력에 노출 될 까 봐

 차마 신고도 못하는 경우가 맞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4대 사회악 근절 중 가정폭력이 있을 만큼 

가정폭력은 가족의 범주를 넒어 사회 문제가 되는 악질 범죄라는 증명이다.

 또한 더 한 문제는 신생아나 유아기 및 어린아이들이 학대로 

인해 안타깝게 사망하고 그로 인해 사회적 공분이 되어 논란이 

되는 사건을 접하는 것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때는 가정폭력은 말 그대로 한 가정 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용기를 내어 신고를 해도 경찰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처벌할 법률 근거가 없다며 그냥 돌아갔다. 아니면 주변에서 

소음이 심하다며 신고를 하면 경고를 주고 그만하라는 

주의만 주고 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내가 이 때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면 

위와 같이 포기하거나 위험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내 영혼이 점점 파괴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나의 상세한 경험과 심정을

 말함으로써 피해자들이 더 이상 육체적, 정신적으로 핍박받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보호 받을 수 있고 

가해자들이 더 이상 폭력을 가할 수 없게 법이 강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시작했다.


 #. 2     

 지금부터 말할 이야기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3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다.

 사실 이 책을 쓰기 전부터 그리고 쓰는 동안 내내 아빠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책이 출판되면 내 주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텐데 아빠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선은 지켜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대중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정말 이 책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어 컴퓨터에 앉기 전 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작업이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몇 번 그만 두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내가 영원히 과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나를 객관화 할 수 있게 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3 겨울 방학에서 고1이 되는 시점이었던 그 때 엄마는 일을 

다니고 계셨다. 그런데 엄마는 옛날부터 치킨 집을 하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당신의 가게를 하기 위해 3년 동안 다녔던 동네 전자 

회사에서 퇴사하게 되었다.

 가게를 하기 위해 그동안 차곡차곡 따로 돈을 모아 두셨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회식 자리도 많다. 그래서 회식이 있을 

때 마다 엄마는 오늘 회식이어서 조금 늦을 것이라고 집에 전화

를 하면 대번 아빠의 목소리는 차가워지고 대답 대신 전화를

 툭툭 끊어버렸다. 

 그리고 ‘혹시’ 라는 생각으로 엄마를 약간 의심하는 

의처증의 모습도 보였다.

 퇴사 기념 회식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으로 사장이 배웅하며

 그 동안 수고 많았다고 악수를 청하며 어깨를 다독였고 

엄마는 3년 동안 정들었던 직장과 동료 그리고 사장님과의 

이별이 슬펐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다.

 근데 그걸 우연히 밖에서 아빠가 봤고 오해를 한 것이다.

 ‘그 동안 둘이 연인 사이였고 이별하기 싫어 울었던 것이다’ 

라고 멋대로 판단한 것이다.    

즉 생각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생각했고 제대로 오해 한 것이다.

 즉시 아빠는 술을 또 다시 마시고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싱크대에서 칼을 빼 들더니 

신문지에 둘둘 싸서 안쪽 호주머니에 넣고 내가 너희들

 배때기를 칼로 쑤셔서 죽여 버리고 아구창을 날려 버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집을 나갔다. 아직 술에 덜 취해서 집에 들린

 것이고 협박성으로 칼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던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한 결과 아무래도 

진짜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피신해야 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빨리 당장 챙길 것만 챙겨서

 엄마의 친한 친구 집으로 몸을 피했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엄마가 나한테 그냥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우리가 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빠의 화는 점점 커질 것이라며 설마 진짜 죽이겠냐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위험해지면 나한테 112에 바로 신고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떨면서 집에 들어갔는데 낮인데도 아빠는 술에 취해 있었고

 우리를 보는 즉시 엄마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엄마는 온 몸을

 다해 피했다. 진짜 찔러 죽일 거 같았다.

 그러더니 칼을 든 채 엄마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내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갔고 나는 울면서 방문 열쇠를 찾으려고

 했는데 이미 열쇠는 감춰 논 상태였다.

 안에서 엄마가 무차별적으로 맞는 소리가 들렸다.

 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 때 겨우 10살이었던 내 남동생은

 구석으로 들어가 울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생이 

하는 말이 그러다 누나도 맞으니까 나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내 엄마를 지켜야했다.

 한 20분이 지났나? 문이 열리더니 아빠가 베란다에 가서 무엇을 찾더니만

 엄마가 있는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데 손에 굵은 전깃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시간으로 아빠가 방문을 잠기 전에 내가 들어갔고 나를 

구타하고 밀쳐내더니 그 전깃줄로 온 힘을 다해 엄마 목을 조르고 있었다.

 당장 달려들어서 말리려고 하면 나를 때려서 밀치고 또 때려서 내동댕이 

치면서 계속 엄마 목을 조르는데 엄마가 기절을 했고 입에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숨 넘어 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신고를 하려고 전화를 들었는데 집에 있는 전화선을 

이미 모두 끊어 놓은 것이다.

 전화선을 끊어 놓고 열쇠더미를 숨겨 놓을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해 놓고 우리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도움을 청하려고 나가는 순간 나는 아빠에게

 잡혀 들어갔고 엄마와 나를 한방에 쳐 놓고 세숫대야 같은 것을 

던져 주면서 여기에 똥을 사든 말든 대신하라며 감금시켰다.

 일단 엄마의 상태를 체크했다.

 다행히 엄마는 눈을 떴고 엄마는 눈을 뜨자마자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중에서야 물어보니 엄마는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3일 간의 감금이 계속되었다.

 엄마는 온 몸이 타박상이었고 목뼈와 갈비뼈의 통증을 심하게 느꼈다. 

그리고 목이 졸린 이후라 심리적으로 매우 놀라고 불안정한 상태였다.

 난 어떻게 해서라도 여기서 빠져 나가야 했기 때문에 끊어진 전화선을

 이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연결 되지 않았다.

 물과 음식 등을 전혀 먹지 못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왜 생리적인

 현상은 나오는지 아빠가 던져 준 세숫대야에 생리현상을 

해결할 때 인간 이하의 수치심을 느꼈다.

 엄마는 망연자실하게 아무런 저항과 말없이 누워 계셨고

 간혹 눈물을 보이셨다.

 그렇게 3일이 지났을 때 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현진이 내일 고등학교 입학 날 아니야?’

 이게 무슨 갑작스런 전개인가 싶었고 어이가 없었다.

 여태까지 한 짓은 뭐고 나의 고등학교 입학식에 대해 자상하게

 물어 보는 건 또 어떤 심리일까...

 그런데 다음 말이 

 ‘다 모든 걸 잊자고... 나와서 밥 먹자’ 하면서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사흘 동안 있었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끼?

 너무 너무 비참했다.

 한 순간에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3일 동안 물과 음식 모두

 먹지 못했던 나는 혼절했다. 

  기절했다가 일어나자 벽 앞에 걸어 논 고등학교 교복이 

제일 눈에 먼저 들어왔다.

 처음엔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다.

 ‘아니야. 지지 않을꺼야. 이 그지 같은 인생 내가 바꿀거야.

 공부하자. 공부해야 복수 할 수 있는 힘이 생겨.

 그리고 바꿀 수 있어.

 집을 나가서 살다 유흥가로 빠져 삼류인생이 되기에는 

내가 그리고 엄마가 너무 불쌍하잖아.

 운명, 타고난 팔짜 다 엿 같은 얘기야.

 그리고 신은 없어.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잖아.

 뭐 하나는 던져줘야 살아갈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거잖아‘

 난 독한 마음을 먹고 그 다음 날 난 새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갔다. 

 고1때까지만 해도 삼선 슬리퍼가 금지되었고 흰색 토끼표 실내화가 

규정이었는데 학교 가기 며칠 전에 빨아 놔야지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학교 때 신었던 실내화를 빨지도 않고 그대로 신고 가서

 무척이나 더러웠다.

 다른 친구들은 새 거 아니면 깔끔하게 빨아서 신고 온 하얀색 

실내화였던 반면 유독 더 까만 나의 실내화를 보며 누가 내 실내화만

 보는 거 같아 창피했던 기억이 오래 남는다.

 아직까지도 내 평생 가장 잔인한 겨울로 기억되어 있다.

 그리고 이 때 느꼈던 공포는 지금 생각해도 온 몸에 긴장이 들어갈 정도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공포와 무력감으로 남아 있다.

 또한 그날 있었던 폭력과 감금의 시간 동안 내가 느꼈던 인간 이하의 수치심은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칫하면 엄마가 죽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정말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여태까지 나를 통째로 삼키고 있는 것 같다. 

 가장 잊을 수 없는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마지막 이야기는 

대학교 때 있었던 일들로 뒷부분에서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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