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세아녜라quinceañera’라는 멕시코의 파티가 있다. 영어로는 스위트 피프틴이라고 하는데 여자아이가 열다섯 살이 되면 멋진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일종의 이른 성인식이다.
평생 춤이라고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배운 부채춤이 전부인 나는 킨세아녜라 파티에 가서 처음으로 춤을 추게 되었다. 물론 어디에서나 나의 손을 잡아끌며 춤을 추는 남편 덕분에 멕시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춤을 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춤을 출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킨세아녜라는 조용한 분위기로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뷔페를 먹고 열다섯 살의 아름다운 주인공과 사진도 찍으며 마치 한국의 결혼식 피로연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음식의 접시가 치워질 무렵 연주자들의 음악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뒤바뀌어 버렸다. 식당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재빠르게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스테이지를 채워버리는 인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약간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 번도 나를 풀어헤치고 살아 본 적이 없다. 머리는 항상 단정해야 하고 옷은 깔끔해야 하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야 하고 어디 가서 너무 튀어서도 안됐다. 어디 가서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예뻐야 하고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 듣지 않을 정도로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처럼 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샌가 남들 머릿속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원하고 느끼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비추어질 나의 모습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어디에서나 춤을 춘다. 사람이 많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나의 허리를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하고 길거리에서도 춤을 춘다. 그리고 내가 창피하다고 말하면 언제나 웃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지금의 느낌을 억누르거나 회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음악이 나오는 순간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는 춤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는 순간 우리는 춤을 출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살아가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며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타인의 생각도 아닌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느낌뿐이다.
킨세아녜라 파티에 가서 처음 춤을 춰 본 나는 두 번 울었다. 한 번은 눈치 보지 않고 춤을 추는 사람들의 태도에 감명을 받아서 울었고 두 번째는 아빠가 생각나서 울었다. 나는 아빠가 어색하다. 아빠랑 있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런 정치 이야기나 끄집어내다 방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하지만 킨세아녜라 파티에서 아빠의 손을 끌고 나온 딸, 손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할아버지, 서로 끌어안고 눈을 지그시 응시하던 중년 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빠는 평생 춤을 춰본 적도, 춤을 춰 볼 일도 없다는 생각에 심장이 울컥하고 진동했다.
언젠가는 명상을 하는 마음으로 아빠와 춤을 춰보고 싶다. 어색한 분위기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복잡하고 애매한 아빠와의 감정도 사라진 텅 빈 마음에 사랑을 담아 아빠의 손을 잡아끌어보고 싶다.
시인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의 춤이라는 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 모두를 존재 속으로 내쉬는 위대한 들숨과
그 영원한 정지 속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추라.
그 공허감을 바깥의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말고
다만 내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춤을 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