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와 늦은 점심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버스를 타고 영어학원으로 갔다. 대학 졸업 후, 소외를 자처하고 갈 곳을 잃은 나에게, 지난 2년간, 이곳은 나의 터전이 되었다. 나는 몇 안 되는 장기 수강생 중의 한 명이고, 학원 관리부장에서부터 미화 아줌마까지, 나의 이름은 모를지언정 적어도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담한 규모의 이 학원 빌딩을 나는 지금 천천히 계단으로 오르고 있다. 일요일 늦은 오후라 학원은 거의 텅 비다시피 했지만, 드문드문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띄었고, 그들과 눈인사를 주고받거나 심드렁하게 지나치기도 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유학 혹은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이나 졸업생들이지만, 종종 나처럼 딴 게 할 게 없어서, 혹은 막연히 미국이 좋아서 무작정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목적이 확연한 이들은, 몇 달 혹은 몇 년, 그러나 대부분 2년 이상은 넘기지 않고, 입학허가서와 같은, 영어권 나라에 체류할 타당한 근거를 마련하고는, 부푼 희망을 안고 이곳을 떠나게 된다. 그들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인내하고 감내하였으며, 종횡무진 달려가, 이제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달콤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즐거이 대양을 건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이곳으로 다시 오지는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목적이 모호한 이들은 주로 여기에 남는다. 그리고 서로를 잘 알아본다. 나는 사교적이지 않으며 노력하지도 않지만, 내 주위에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이들이 차고 넘쳤다. 우리는 빈 강의실, 시청각실, 혹은 옥상에 마련되어 있는 도서관에서 한낮을 때우고, 밤이 되면 술집이나 당구장, 볼링장이나 바닷가로 몰려다니며, 되지도 않는 엉터리 영어를 내뱉으며, 꼴만 우스운 웃음으로 한바탕 킬킬거리곤 하였다. 가끔 원어민 선생을 초청하여, 밥과 술, 유흥을 제공하고, 그들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다들 귀를 쫑긋하며, 알아듣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보지만, 머릿속만 새하얘질 뿐, 입안에는 불편한 단어들만 잠깐 구르다가, 결국 보디랭귀지로 어색한 침묵을 대신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럴 때 느끼는 착잡한 감정은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는 법이 없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떠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 몇 달 내로, 뉴욕타임스를 겨드랑이에 끼고는 돌아왔다. 그들은 풍족한 부모의 재산을 배경으로, 할리우드, 라스베이거스, 혹은 타임스퀘어를 걷다가, 코리아타운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한국 학생으로 넘쳐나는 그곳 어학연수원에서 이곳과 다름없는 생활을 즐기다가 궁핍해지면, 어쩔 수 없이 우리 곁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이 오면 우리의 유흥 문화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언제나 즐길 거리에 목말라 하는 우리에게 환송회와 환영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주제임이 틀림없다. 더욱이 돌아온 이들이 들려주는, 주마간산식으로 훑고 간 현장 학습 체험기는, 우리에게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훌륭한 문명의 연결고리 역할로 다가와, 야릇한 불안과 바람 같은, 부서지기 쉬운 자유 속에 묶여 있는 나의 미래가 잠시나마 살짝 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이를테면, 희망과 좌절 혹은 설렘과 같은 감정들이 빠른 속도로 요동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개인적 흐트러짐은 교묘한 완곡 법으로 무가치한 생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이 오면 언제나 그렇듯이 적요가 찾아오고, 실타래처럼 얽힌 지난 밤의 모든 감정은 끊어졌다. 소리 없이 바깥을 향한 외침이 잦아들고 간밤의 흔적에 진저리를 치곤 하였다. 어느새 나는 남루한 차림으로, 바짓단에 묻은 흙을 문지르며, 남발하였던 희망을 거둬들였다. 다시 거북이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도 확실치 않은 그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점점 고여 들어, 결국 나의 관심은 토요일 오후, 그녀가 퇴근하는 그 시간만을 가리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