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2년, 브라이텐펠트 근교
역사는 때로 잔인한 농담처럼 스스로를 모방한다. 11년 전, 구스타브 아돌프가 틸리의 무적 군대를 격파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던 브라이텐펠트의 들판. 바로 그곳에서, 다시 한번 두 개의 거대한 군대가 맞닥뜨렸다. 그러나 이번에 무대에 오른 배우들은 이전의 거인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왕의 신성함이나 구원자의 카리스마가 없었다. 그들은 오직 전쟁이라는 기술에만 통달한, 냉혹하고 효율적인 전문가들이었다.
한쪽에는 새로운 스웨덴 군 총사령관,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 있었다. 그는 구스타브 아돌프의 가장 총애받던 포병 장교였지만, 오랜 포로 생활과 지독한 통풍으로 인해 육체적으로는 거의 폐인에 가까웠다.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 전투 중에는 들것에 실려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그 어떤 강철보다도 날카로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독일 전역의 지도가 들어 있었고, 그의 전략은 번개처럼 빠르고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적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성으로 승화시키는 인물이었다.
다른 한쪽에는 새로운 제국군 총사령관, 오스트리아의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과 그의 부관 오타비오 피콜로미니가 있었다. 대공은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동생으로, 혈통은 고귀했지만 군사적 재능은 평범했다. 실질적인 지휘는 발렌슈타인의 옛 부하였던 노련한 피콜로미니가 맡고 있었다. 그들의 군대는 프라하 조약 이후 재편성된 제국군과 작센 군대의 연합체로, 수적으로는 토르스텐손의 군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전쟁은 이제 얼굴을 잃어버렸다. 구스타브의 '해방 전쟁'도, 페르디난트의 '가톨릭 수호 전쟁'도 아니었다. 그것은 스웨덴의 생존과 프랑스의 패권,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자존심이 뒤엉킨 끝없는 소모전이었다. 병사들은 더 이상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내일의 빵과, 다음 달의 급료를 약속하는 지휘관을 위해 싸울 뿐이었다.
토르스텐손은 그의 전임자였던 요한 바네르가 급사한 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스웨덴 군을 구하기 위해 발트해를 건너왔다. 그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곧장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의 목표는 작센을 다시 한번 굴복시키고, 황제의 본거지인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직접 위협하는 것이었다.
1642년 11월 2일, 두 군대는 브라이텐펠트에서 격돌했다. 제국군은 수적 우세를 믿고 자신만만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11년 전 틸리가 저질렀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토르스텐손이라는 이름의 불구의 지휘관이, 구스타브 아돌프의 전술을 얼마나 완벽하게 계승하고 발전시켰는지를 알지 못했다.
토르스텐손은 자신의 약한 좌익으로 적 주력을 유인한 뒤, 강력한 우익과 중앙의 예비대로 적의 측면을 감싸는 전형적인 스웨덴식 기동전을 펼쳤다. 그의 포병대는 브라이텐펠트 1차 전투 때보다 더욱 가공할 속도와 정확성으로 제국군 대열에 죽음의 비를 퍼부었다.
전투는 처절한 학살극으로 변했다. 제국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우월한 화력과 기동성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피콜로미니는 몇 번이고 역습을 시도했지만, 토르스텐손의 냉철한 지휘 앞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해가 질 무렵, 제국군은 완벽하게 궤멸했다. 그들은 1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5천 명의 포로를 냈고, 거의 모든 대포와 군수물자를 빼앗겼다.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쳤다. 스웨덴 군은 다시 한번 브라이텐펠트의 주인이 되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양상을 다시 한번 바꾸었다. 황제는 독일 북부와 중부에서 군사력을 거의 상실했다. 작센은 스웨덴의 점령 하에 들어갔고, 토르스텐손은 이제 아무런 방해 없이 남쪽으로, 황제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의 추는 다시 스웨덴-프랑스 연합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1643년, 파리와 로크루아
파리의 루브르 궁전에서, 늙고 병든 리슐리외 추기경은 자신의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거대한 전쟁 기계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쇠약해졌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프랑스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토르스텐손의 승리 소식을 만족스럽게 들었다. 스웨덴이 동쪽에서 황제를 압박하는 동안, 자신은 서쪽에서 스페인의 숨통을 끊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마지막 계획이 완성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642년 12월,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불과 다섯 달 뒤인 1643년 5월에는 그가 평생을 섬겼던 왕 루이 13세마저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는 순식간에 지도력의 공백 상태에 빠졌다. 새로운 왕 루이 14세는 겨우 다섯 살의 어린 아이였다. 섭정은 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가 맡았지만, 실권은 리슐리외가 후계자로 지목한 이탈리아 출신의 추기경, 쥘 마자랭의 손에 넘어갔다. 마자랭은 리슐리외만큼 교활하고 능력 있는 외교관이었지만, 외국인이라는 약점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의 끊임없는 견제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스페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가 내부 혼란으로 약해진 틈을 타,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1643년 봄, 새로운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프란시스코 데 멜로가 이끄는 2만 7천의 정예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 북부로 진격했다. 그들의 목표는 로크루아(Rocroi) 요새를 점령하고, 파리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 위기 앞에서, 프랑스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루이 2세 드 부르봉, 훗날 ‘위대한 콩데(Le Grand Condé)’라 불리게 될 21살의 젊은 앙기앵 공작이었다.
콩데는 혈기왕성하고, 오만하며, 전투에 대한 천재적인 직감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경험 많은 부관들의 신중론을 무시하고, 로크루아를 구원하기 위해 수적으로 열세인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곧장 스페인 군과 맞서기로 결심했다.
1643년 5월 19일, 로크루아 근교의 평원에서 두 군대가 마주 섰다. 스페인 군은 여전히 그들의 자랑스러운 테르시오 방진을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100년간 유럽 최강의 보병이라는 명성을 누려왔다.
콩데는 스웨덴 군의 전술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유연한 선형 대형으로 배치하고, 특히 기병대의 기동성을 극대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콩데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대담한 기동을 선보였다. 그는 자신의 좌익 기병대가 스페인 우익 기병대에게 밀리는 것을 보고도, 자신의 주력인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스페인 좌익을 향해 맹렬하게 돌격했다. 그는 스페인 좌익 기병대를 격파한 뒤, 멈추지 않고 그대로 전장을 가로질러, 스페인 군의 후방을 돌아, 위기에 처한 자신의 좌익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났다.
스페인 군은 자신들의 후방에 나타난 프랑스 기병대를 보고 경악했다. 그들의 지휘 체계는 혼란에 빠졌다. 그 사이, 콩데는 다시 한번 자신의 기병대를 재정비하여, 이번에는 스페인 보병대의 심장부인 테르시오 방진의 후방을 덮쳤다.
스페인 테르시오는 마지막까지 전설적인 용맹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면서도, 결코 대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창과 총으로 저항했다. 늙은 스페인 보병대 사령관 파울-베르나르 드 퐁텐은 부상으로 의자에 앉은 채, 끝까지 부대를 지휘하다 전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용맹만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없었다. 프랑스 포병대의 집중 포화와,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병대의 돌격 앞에, 100년간 무적을 자랑했던 테르시오는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로크루아 전투는 스페인 군의 재앙적인 패배로 끝났다. 그들은 8천 명의 전사자와 7천 명의 포로를 냈고, 유럽 최강 보병이라는 명성을 로크루아의 진흙탕 속에 묻어야 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스페인 제국의 군사적 패권이 끝나고, 프랑스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젊은 왕 루이 14세와 그의 재상 마자랭의 권력은 공고해졌고, 프랑스는 이제 합스부르크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1644년, 숲속 은신처와 프라이부르크
야쿠프는 숲속에서 이 모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브라이텐펠트에서의 스웨덴의 승리, 그리고 로크루아에서의 프랑스의 승리. 개신교-프랑스 연합이 다시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전쟁은 이제 승패와는 상관없이, 독일 땅 전체를 갉아먹는 만성적인 질병이 되어 있었다. 군대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토르스텐손의 스웨덴 군은 보헤미아와 덴마크를 넘나들며 번개 같은 기동전을 펼쳤고, 프랑스 군은 라인 강 유역에서 바이에른 군과 끝없는 소모전을 벌였다.
군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늑대들의 시간’이 반복되었다. 병사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약탈했다. 심지어 땅에 심은 씨앗까지 파헤쳐 먹었고, 헛간의 썩은 짚을 끓여 먹기도 했다. 기근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굶주림 끝에 들판의 풀과 나무껍질을 먹었고, 그것마저 떨어지면 서로를 잡아먹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야쿠프는 자신의 연대기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끔찍한 소문을 기록하며 손을 떨었다.
루카스는 이제 열 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숲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는 새를 잡고, 물고기를 낚았으며, 위험한 버섯을 가려낼 줄 알았다. 그는 야쿠프가 가르쳐주는 글을 배웠지만, 책 속의 평화로운 세상은 그에게 현실감 없는 동화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의 세상은 숲과, 굶주림,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버지,” 어느 날 루카스가 물었다. “전쟁은 언제 끝나나요?”
야쿠프는 아들의 맑은 눈을 보며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아들을 끌어안아 줄 뿐이었다. 그 역시 답을 몰랐다. 이 전쟁은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1644년 여름, 프랑스 군과 바이에른 군이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다시 한번 격돌했다. 이번에는 프랑스 군을 위대한 콩데와, 또 다른 명장 튀렌 자작이 함께 이끌고 있었다. 그들의 상대는 틸리의 뒤를 이은 바이에른의 명장, 프란츠 폰 메르시였다.
프라이부르크 전투는 3일 동안 계속된, 30년 전쟁 중 가장 처절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 중 하나였다. 메르시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콩데와 튀렌은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며 몇 번이고 공격을 감행했다. 양측 모두 끔찍한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 군은 8천, 바이에른 군은 6천의 병사를 잃었다.
결국 메르시는 전략적으로 후퇴했고, 프랑스 군은 피로 얼룩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승리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전투가 끝난 뒤, 튀렌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오늘과 같은 승리를 한 번 더 거둔다면, 우리 군대는 전멸할 것이다.”
전쟁은 이제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양측 모두 지쳐 있었다. 병사들은 죽거나 탈영했고,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1645년, 얀카우와 알러하임
전쟁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토르스텐손이 그의 마지막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했다. 1645년 3월, 그는 보헤미아의 얀카우(Jankau)에서 자신을 막기 위해 나선 제국군을 상대로 완벽한 섬멸전을 펼쳤다. 그는 안개를 틈타 적의 후방을 기습하고, 포병대를 언덕 위에 배치하여 제국군 전체를 화망에 가두었다. 제국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빈으로 가는 길은 다시 한번 활짝 열렸다. 토르스텐손은 빈 근교까지 진격했지만, 그의 군대 역시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역병이 퍼져, 결국 도시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원정이 되었다. 그는 지병이 악화되어 스웨덴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전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서쪽에서는, 프란츠 폰 메르시가 바이에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1645년 8월, 그는 뇌르틀링겐에서 멀지 않은 알러하임(Alerheim)에서 콩데와 튀렌이 이끄는 프랑스 군과 다시 맞붙었다. 제2차 뇌르틀링겐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메르시는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바이에른의 마지막 저항도 사실상 끝이 났다.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그는 30년 전쟁의 시작부터 황제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고, 이 전쟁을 통해 팔츠 선제후라는 지위를 얻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영지는 프랑스와 스웨덴 군대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전쟁이,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는 마침내 황제를 배신하고, 프랑스, 스웨덴과 단독으로 휴전 협정을 맺기에 이른다.
제국의 가장 강력한 기둥 중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이제 거의 혼자 남겨졌다. 작센은 이미 오래전에 중립을 선언했고, 브란덴부르크는 스웨덴과 별도의 평화 조약을 맺었다. 황제의 통치권은 이제 오스트리아 본토에만 미칠 뿐이었다.
전쟁은 군사적으로는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는 것은, 전쟁을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싸움의 무대는 전장에서, 협상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1644년부터, 독일 서부 베스트팔렌 지방의 두 도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는 지루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가톨릭 대표들은 뮌스터에, 개신교 대표들은 오스나브뤼크에 모여, 서로 다른 도시에서 간접적으로 협상을 벌였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사절단을 보냈지만, 그들의 이해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합의점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장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양측 모두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마지막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필사적인 공격을 주고받았다.
야쿠프는 이 소식을 숲속에서 들었다. 그는 평화라는 단어가 너무나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에게 평화는, 단지 또 다른 종류의 거래와 음모일 뿐이었다.
1648년, 전쟁의 마지막 해가 밝았다. 스웨덴과 프랑스 연합군은 마지막 총공세를 시작했다. 그들은 바이에른을 다시 한번 유린하고, 프라하를 공격했다. 30년 전,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도시가, 이제 전쟁의 마지막 무대가 된 것이다. 스웨덴 군은 프라하 성을 점령하고, 루돌프 2세가 수집했던 엄청난 양의 예술품들을 약탈했다.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합국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1648년 10월 24일, 뮌스터 시청에서, 마침내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이 체결되었다.
야쿠프는 몇 달 뒤, 한 여행객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더군. 뮌스터라는 곳에서 조약을 맺었다고.”
야쿠프는 그 말을 듣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아니었다. 단지 깊은 공허함만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서른 해. 그의 청춘을, 그리고 한 세대 전체를 집어삼킨 전쟁이, 그렇게 종이 한 장으로 끝이 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대기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는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죽음과 파괴의 끝에, 과연 무엇이 남았는가?
프랑스는 알자스를 얻었고, 스웨덴은 포메라니아를 얻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독일의 제후들은 거의 완전한 주권을 얻어, 신성 로마 제국은 이름뿐인 허상으로 남게 되었다. 칼뱅파는 마침내 루터파와 동등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영토 몇 조각과, 조약 문서의 몇 구절을 위해, 수백만 명이 죽어갔다. 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한 세대가 통째로 증발했다.
야쿠프는 펜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대기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1648년, 평화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들판에는 뼈가 뒹굴고, 도시에는 과부와 고아들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하다. 그들은 왕과 추기경, 그리고 장군들의 위대한 업적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국경선과 조약의 의미에 대해 논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록한다. 이 모든 영광의 이면에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백만 명의 비명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신의 침묵과, 인간의 끝없는 어리석음뿐이었다. 나의 아들 루카스가 살아갈 세상은, 부디 이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를. 이 기록이 그를 위한, 그리고 이 땅에서 스러져간 모든 영혼들을 위한 나의 마지막 기도다.’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의 길고 긴 기록은 끝이 났다. 그는 숲 밖으로 나왔다. 폐허가 된 세상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열네 살이 된 아들 루카스의 손을 잡았다.
“이제 어디로 가나요, 아버지?” 루카스가 물었다.
야쿠프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너머에서, 아주 희미한, 새로운 새벽의 빛을 보는 듯했다.
“집으로 가야지.” 야쿠프가 말했다. “우리의 집을 다시 지으러 가야지.”
그들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더 이상 도망치는 자의 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생존자들의 첫걸음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들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