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8년 가을, 보헤미아의 재건된 마을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전쟁의 핏자국을 씻어내고 폐허 위에 새로운 삶의 이끼를 돋게 했다. 30년 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덧 서른 해. 전쟁의 상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풍경 속에 깊은 주름으로 남았지만, 세상은 그 상처 위에서 위태로운 걸음마를 계속하고 있었다.
야쿠프는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었다. 그의 허리는 구부정해졌고, 손은 펜보다 지팡이에 더 익숙해졌다. 그의 시력은 희미해져, 촛불 없이는 더 이상 글씨를 읽거나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맑았다. 그 눈에는 한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자의 깊은 지혜와, 모든 것을 잃고도 다시 일어선 자의 조용한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가 살던 마을은 이제 제법 큰 공동체로 성장했다. 목책은 돌담으로 바뀌었고, 밭은 언덕 너머까지 펼쳐졌다. 루카스는 마흔다섯의 중년 남성이 되어, 마을의 존경받는 촌장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지혜와 자신만의 강인함으로, 험난한 세월 속에서 마을을 훌륭하게 이끌어왔다.
예수회 사제들의 위협은 현실이 되었다. 황제의 군대가 마을을 몇 번이고 위협했지만, 루카스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무력으로 저항하는 대신, 교활한 외교와 끈질긴 청원으로 맞섰다. 그는 인근 영주에게 보호세를 바쳐 군사적 위협을 막아냈고, 프라하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종교 문제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했다. 그것은 명예롭지 않은, 그러나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었다. 결국 제국은 이 완고하고 단결된 작은 공동체를 힘으로 억누르는 것보다, 적당한 세금을 받고 내버려두는 것이 더 이롭다고 판단했다. 마을은 불안정한 자치권을 얻어냈다. 그것은 전쟁이 남긴 교훈이었다. 때로는 뻣뻣한 참나무보다, 바람에 휘어지는 갈대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교훈.
야쿠프는 이제 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그는 손자 손녀들을 무릎에 앉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북방의 사자왕 이야기, 유령 군대를 이끌던 수수께끼의 공작 이야기. 그러나 그가 가장 자주 들려준 이야기는, 이름 없는 병사들과, 굶주림 속에서 빵을 나누었던 여인들,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도 다시 씨앗을 심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의 방 한구석에는, 그의 평생이 담긴 낡은 가죽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이제는 갈색으로 변색되고 가장자리가 부서져가는 양피지 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의 연대기였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시력이 나빠져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연대기의 마지막 장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마지막 문장을 쓸 때가 오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같은 시각, 빈 호프부르크 궁전
요한 폰 로젠탈은 이제 제국의 최고위 외교관 중 한 명인 추밀원 고문관이 되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해졌고, 그의 얼굴에는 유럽의 모든 궁전에서 벌어진 암투와 협상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황제 레오폴트 1세를 보좌하며, 끊임없이 제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끝없는 야욕을 드러내며 라인 강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오스만 튀르크가 다시 한번 유럽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가져온 평화는 단지 전쟁의 형태를 바꾸었을 뿐, 전쟁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새로운 신들, 즉 국가와 국경은, 낡은 신이었던 신앙만큼이나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려 있었다.
요한은 젊은 시절의 이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이제 평화를 믿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세력 균형’이라는 위태로운 저울추만을 믿었다. 그는 한쪽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쪽과 손을 잡는 냉혹한 게임을 평생에 걸쳐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때로는 개신교도인 브란덴부르크와 손잡고 프랑스를 견제했고, 때로는 숙적인 프랑스와 비밀리에 협상하여 오스만의 위협에 맞섰다. 그의 세계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었다. 오직 영원한 국가 이성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1678년 가을, 황제는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내렸다. 30년 전쟁 종전 30주년을 맞아, 제국 전역의 전쟁 피해 복구 실태와 인구 변화를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이었다. 그것은 제국의 미래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자료 조사였지만, 요한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순례 여행과도 같았다.
그는 서기들과 측량 기사들을 이끌고, 빈을 떠나 제국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외교관으로서 평생을 지키려 했던 그 땅이, 지난 30년간 어떻게 변했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여정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마그데부르크,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한때 번성했던 대도시들은 아직도 전쟁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구는 전쟁 이전 수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폐허가 된 건물들이 도시 곳곳에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시골의 풍경이었다. 수많은 마을들이 지도 위에서 영원히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이제 숲이 우거져, 한때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마을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만의 작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제국이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수천 개의 고립된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群島)와 같다고 느꼈다. 30년 전쟁은 제국의 영토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국경선을 그어놓은 것이다.
그의 여정은 보헤미아에서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는 인구 변화를 조사하기 위해, 지도에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차가 진흙탕에 빠져 고장 나는 바람에, 그는 근처의 한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마을은 그가 이제껏 보아온 어떤 마을과도 달랐다. 작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가난 속에서도 기묘한 활기와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마을의 촌장인 루카스를 만났다. 루카스는 그를 경계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손님으로 맞아주었다.
그날 저녁, 요한은 루카스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다. 식탁에는 루카스의 늙은 아버지, 야쿠프도 함께 있었다. 요한은 야쿠프의 눈빛에서, 자신이 평생 동안 궁전의 거울 속에서나 보아왔던, 그러나 결코 이해할 수는 없었던 깊은 평온함을 발견하고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어르신께서는… 전쟁을 기억하시겠군요.” 요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쿠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다마다요. 나는 그 시작과 끝을 모두 본 사람이오.”
그날 밤, 요한은 야쿠프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라하의 창문에서 시작하여, 백산의 비명, 브라이텐펠트의 혁명, 뤼첸의 비극, 그리고 이름 없는 유령들의 춤까지. 야쿠프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겪고 기록해온 30년의 세월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요한이 황실 서고에서 읽었던 어떤 공식적인 역사 기록과도 달랐다. 그 이야기에는 왕의 이름과 전투의 날짜뿐만 아니라, 굶주린 아이의 울음소리와, 불타는 짚 냄새, 그리고 죽어가는 병사가 남긴 편지의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요한은 깊은 감동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평생을 ‘제국’이라는 거대한 개념을 위해 일해왔지만, 정작 그 제국을 이루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지도를 움직이는 외교관이었지만, 야쿠프는 그 지도 위에서 피 흘리며 살아온 진짜 증인이었다.
“그 모든 것을… 기록해두셨습니까?” 요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야쿠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카스에게 자신의 낡은 가죽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 그는 먼지 쌓인 양피지 뭉치를 요한의 앞에 내려놓았다.
“내 평생의 기록이오. 이제는 늙고 눈이 어두워, 더 이상 쓸 수도, 읽을 수도 없게 되었지만.”
요한은 경외감에 휩싸여, 조심스럽게 양피지 한 장을 펼쳐 들었다. 희미한 촛불 아래, 그는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낸 잉크 자국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한 시대의 비망록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야쿠프의 마을
요한은 밤새 야쿠프의 연대기를 모두 읽었다. 동이 틀 무렵, 그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작성해야 할 보고서가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인구 통계 숫자와 세수 변화 그래프만으로는, 이 땅이 겪은 진짜 비극을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야쿠프의 방으로 갔다. 노인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앉아, 떠오르는 아침 해가 비추는 마을의 풍경을 평화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 요한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디 이 기록을 제게 맡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것은 한 개인의 기록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국 전체가, 아니 미래의 모든 세대가 반드시 읽어야 할 역사입니다. 제가 황제 폐하께 직접 이 기록을 바치고, 황실 서고에 영원히 보존되도록 하겠습니다.”
야쿠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고문관 나리. 이 기록은 황제의 서고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오.”
그는 루카스를 불렀다.
“아들아, 이 기록은 이제 네 것이다. 네가 이것을 읽고, 너의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리고 그 아이들이 또 그들의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게 하여라. 우리가 무엇을 겪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다시는 서로에게 총을 겨누어서는 안 되는지를 결코 잊지 않도록.”
그리고 그는 요한을 향해 돌아보았다.
“나리께서 진정으로 제국을 위하신다면, 보고서에 숫자 대신,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담아주시오. 황제 폐하께서 궁전의 높은 벽 너머에, 이 땅의 진짜 주인들인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해주시오. 그것이 이 늙은 서기의 마지막 부탁이오.”
바로 그 순간, 야쿠프는 자신의 연대기 마지막 장에 무엇을 써야 할지를 깨달았다. 그는 아들의 부축을 받아 책상에 앉았다. 그의 손은 심하게 떨렸지만, 그는 평생의 힘을 다해, 마지막 문장들을 써 내려갔다.
요한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 시대의 마지막 증인이, 그의 마지막 증언을 남기고 있었다.
야쿠프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방금 완성된 마지막 페이지를, 요한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오.”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의 아들 루카스에게.
사람들은 이 전쟁을 30년 전쟁이라 부른다. 그러나 전쟁은 서른 해 만에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속에서, 폐허가 된 들판 위에서, 그리고 권력자들의 회의실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신의 이름으로 싸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는 깨달았다. 신은 승리자의 편도, 패배자의 편도 아니었다는 것을. 신은 어쩌면, 이 모든 어리석음을 슬프게 지켜보며, 우리 인간 스스로가 답을 찾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답은 위대한 왕의 검이나, 교활한 추기경의 외교술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굶주린 아이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농부의 손에,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목수의 망치 소리에,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잊지 않고 기록하려는 늙은 서기의 펜 끝에 있었다.
그러니 아들아, 기억하여라. 가장 위대한 승리는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폐허 위에서 다시 삶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가장 거룩한 신앙은 특정 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절망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전쟁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운명은, 황제나 왕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이것이 내가 너에게 남기는 유일한 유산이다.’
요한은 글을 다 읽고, 고개를 들어 야쿠프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한 자의 평온함 속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길고 길었던 여정은, 마침내 끝이 났다.
에필로그
요한 폰 로젠탈은 빈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두 개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나는 제국의 인구와 경제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서였다. 다른 하나는 ‘한 보헤미아 서기가 남긴 기록’이라는 제목의 사적인 문서였다. 황제가 그 두 번째 보고서를 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야쿠프의 연대기는 황실 서고의 깊은 곳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루카스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는 세대를 거쳐,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되었다.
세상은 야쿠프의 바람대로 평화로워지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북방에서는 새로운 전쟁이 타올랐으며, 다음 세기에는 더 끔찍한 전쟁들이 유럽을 휩쓸었다. 새로운 신들은 여전히 인간들을 제물로 요구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잊지 않고 있었다. 잿더미 위에서, 한 늙은 서기가 남긴 마지막 경고와 희망을. 그리고 그 작은 기억들이야말로, 끝없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인류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준,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을 것이다.
야쿠프의 마을 어귀에는, 후대에 세워진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거기에는 어떤 왕의 이름도, 어떤 장군의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다. 다만 이렇게만 쓰여 있을 뿐이다.
"기억하는 자들을 위하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