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실남실 Mar 26. 2024

당신의 "치즈"는 무엇인가요?

빌럼 엘스호트, <치즈> 

빌럼 엘스호트의 <치즈>는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900개의 치즈” 인가란 제목으로 나온 적이 있다. 나는 이번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판으로 읽게 되었다. 

 

어떤 책들은 몇 문단 읽고 바로 “앗, 이거 범상치 않은데”라는 예감을 주는 경우가 있다. <치즈>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세일즈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평생 책상머리 사무직만 역임했던 소시민이 갑자기 전국적인 규모의 치즈 도매업을 제안받게 된다면, 그것도 2주일 이내 받은 물건을 전부 팔아야 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의뭉스럽고 너무나 평균적인 주인공의 내면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곧 그가 맡은 일들을 어렵사리 해치우고, 종종 평균을 벗어난 반응들에 즐거워하다가도 내내 씁쓸하게 침잠하게 되는데, 독자의 정서를 요리조리 가지고 노는 듯 작품에 대한 장악력을 내내 유지하면서도 위트와 풍자를 배치하는 작가적 역량이 놀랍다고 할까. 이건 뭐 말할 것도 없이, 순전한 재능에서 근원 하는 듯하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한 훌륭한 사례이자 전범으로 삼을 만한 이 소설은 그래서 애초에 실패를 의도하고 쓰인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찬란한 실패의 노곤한 페이서스와 인간에 대한 올곧은 애정이 묻어있다. 웃픈 교훈들이 남지만 그렇다고 마냥 비관적이진 않으니 그의 세계관이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 잠깐의 휴식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택하게 될 것이란 위로가 희미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풍자소설이지만 하나의 사회 소설이기도 하고, 세태 소설이지만 잊을 수 없는 인간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책이다. 은근한 비판과 고급스러운 위트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들도 자연스레 꺼내 보인다. 


무척 짧지만 여운이 강한 그런 책, 엘스호트라는 작가를 기억하기에 충분한 책이다. 


당신에겐 어떤 “치즈”가 오길 원하는가? 


과연 <치즈>의 21세기 버전에서 우리는 어떤 세일즈를 해야 할까? 작금의 상품과 브랜딩과 세일즈 그리고 CS까지 올곧게 개인단계로 축소된 고도의 자본주의 일상을 사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치즈를 발명하고 있는지, 치즈의 모험은 지금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