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생활은 결국 나에게 불안장애를 안겨다 주었다
그 누구나 피해자, 방관자 그리고 가해자였다
학교 숙소에서 1년 반 정도 지내고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로 유학생 전부 이사를 갔다. 아파트 단지 크기도 정말 한국 아파트 단지랑 비교도 안될 정도로 웅장했다. 예를 들면 고급 아파트 단지인데 한국의 자이 아파트 단지라고 예를 들면 이해가 가능하실지 모르겠다. 학교 숙소와는 확연히 다른 큼지막한 여러 방들과 에어컨, 주방 등등 정말 100점 만점 그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원장님이 밥솥까지 사다 주셔서 그 큰 주방에서 서로 요리도 하며 밥을 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방이 크다 보니 학교 숙소 때와는 다르게 최대 7명 정도가 같이 생활했었다. 각 다른 동들마다 7명씩 각 한 집에서 살았는데 청소를 정말 깨끗이 하는 집도 몇 군데 있었고 ( 내가 그중 한 집에 살았었다. ) 정말 청소도 안 해서 방이 전부 시궁창인 집들도 몇몇 있었다. 내가 생활하던 집은 형들이 대부분 깔끔하고 청소를 좋아했어서 그런지 다 같이 휴가 때마다 청소를 매번 했었다. 그래서 원장님이 가끔 집 상태를 보러 순찰 돌아다니실 때마다 제일 으뜸인 집이라고 칭찬을 많이 받았었다. 나는 중간에 그 멀끔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겼었다. 왜냐하면 시간 지나서 신입생들 중 동갑내기 친구들이 몇몇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니 그 동갑내기들과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는 형들하고 같이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그 멀끔한 집에서 제일 나이 많은 형한테 얘기도 안 하고 원장님한테 방을 옮기고 싶다고 말한 게 화근이 되어서 그 집 형들한테 호되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나이 차이 좀 나는 형들과의 생활이 힘들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곳은 부조리의 지옥이었다. ( 지금부터 나오는 형들을 X 숫자로 말하겠다. ) 방을 옮긴다고 할 때 나를 혼낸 형들은 대부분 X6 이었는데 X6 형들은 그래도 막내 라인은 건들지는 않았었다. 그 형들 라인이 졸업하고 그 밑에 X7 형들이 고학년에 오르자마다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X6 형들한테 당한 걸 우리한테 분풀이하듯이 여러 부조리를 행했다. 약간 그곳에서만 뿌리 박힌 부조리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매 학년마다 행해져 왔다. 괴롭힘의 반복이었다. X7 형들은 인민재판 형식으로 누구 한 명이 실수라도 하면 자기 밑에 나이대인 모든 남학생들을 집합시키고 그 한 명을 세운 다음, 한대 모여 다 같이 그 사람을 비판시키기 일쑤였고, 때리는 건 일상이었다.
그리고 잘못한 그 한 사람의 같은 학년, 같은 나이인 사람들까지 불러서 줄을 세워 한 명씩 명치를 몇 대씩 때렸었다. 땡땡 년생 너네 정신 안 차리냐라는 식으로 말이다. 집단 기합이었다. 내 동갑내기 친구는 표정이 아니꼽다는 이유로 명치를 맞았다. 나보다 어린 어떤 동생한테는 불닭 소스까지 다 마시라고 시키기도 했었고, 뭐 하나라도 딴지 걸어서 부른 다음에 잡일을 매번 시켰다. 어떤 형은 신입생이 온 날에 내가 그 신입생이랑 놀고 있을 때 갑자기 방으로 쳐들어와 내 명치에 발길질을 해댔다. 왜냐하면 당시 본인이 사귀던 여자친구가 나랑 동갑내기 친구였는데 그 친구랑 어울려 놀았다는 이유로 본인이 화가 나서 신입생이 보는 앞에서 쌍욕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해댔다. 심지어 나뿐만이 아닌 다른 친구들도 함께 어울려 놀았는데 말이다. 어떤 날 그 형은 본인 여자친구가 다른 형이랑 지금 따로 놀고 있는 거 같다며 나를 포함 밑에 학년 전부를 새벽에 집합시켜서 그 두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을 했다. 새벽 내내 우리 동기 몇몇은 그 다른 형이랑 그 형의 여자친구를 찾으러 아파트 단지를 계속 돌아다녔다. 그리고 X7 형들은 당시 내가 살던 집에 있는 나를 포함 방 전체 사람들을 본인들만의 처벌이랍시고 어느 날 집합시켜서 본인들 집에 있던 나무 의자와 탁자를 몇십 분 동안 각자 한 명씩 두 팔로 번쩍 들게 했다. 정말 그 형들 전부 기억하고 싶지 않다. ( 뭐 다른 일들은 굳이 말은 하지 않겠지만 드라마 DP 속 몇몇 장면들을 생각하시면 생각하시기 편할 듯하다. ) 형들은 항상 5분 안에 튀어와 이런 식으로 나를 포함 모든 밑에 학년들을 갈궜다. 아파트를 옮기고 좋을 줄 알았건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형들이 각각 멀어지니 학교 숙소 때는 옆 방이니깐 부르면 바로 갈 수라도 있었지 아파트는 거의 뛰어가도 그 거리만 계산해도 대략 7~8 분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인 그곳에서 어찌 버틴 건가 싶긴 하다.
나도 피해자이며 방관자이자 가해자였다. 비록 저형들만큼 행동을 하지는 않았어도 나도 밑에 동생들에게 훈육이랍시고 ( 훈육은 무슨 훈육... 누가 누굴 훈육을 한단 말인가 ) 한 행동들과 모진 말들을 내뱉었던 것에 대해 정말 미안하고 지금까지도 반성 중이다. 훗 날 내가 졸업을 하고 원장님인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 밑에 동생들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졸업생들 중에 누가 가장 잘해줬냐는 질문 말이다. 동생들 대부분은 나를 언급해 주었다고 하는데 고마우면서도 한 편으론 그런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나라는 사람이 그나마 덜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시 한번 궁금한 것은 그 형들은 지금 본인을 정말 떳떳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라는 것이다.
나는 그 무서움만 가득한 곳에서 어찌 빠져나와야 하나라는 생각만 하고 살았기 때문에 불안만 계속 증폭되어 갔다. 중간에는 다른 동갑내기 친구 두 명이 북경으로 전학을 갔는데 그 친구 중 한 명이 나한테 전학을 권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놈의 정이 문제였다. 정 때문에 전학을 가지 않았다. 아무리 숨 막히는 그곳이었어도 나름 정이 생겼었나 보다. 지금은 시간이 꽤 지나서 후회하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전학을 갔다면 어땠을지는 궁금하긴 하다. 지금은 전학을 간 친구 포함 이 학교에서 졸업을 같이 한 친구 몇몇은 베스트 프렌드이다. 다들 이 학교에서 어떻게 해서든 끈끈하게 같이 버텨낸 사람들이라 정이 그만큼 더 깊은 듯하다. 항상 다들 만나서 술만 먹으면 과거 이야기하기 바쁘지만 말이다.
그 친구들과는 매 교시가 끝나면 쉬는 시간에 학교 건물 위층으로 올라가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지트에서 놀기 바빴었다. 그만큼 중국어가 늘지는 않았지만 다 같이 재밌게는 지냈던 거 같다.
같이 저녁 늦게 아니면 새벽까지 그 큰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곤 했었다. 그게 유일하게 일상에서 숨을 틔울 수 있는 방도 중에 하나였다. 아파트 단지에는 수영장도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신나게 수영도 했었고, 잠깐 원장님 몰래 멀리 가서 일탈을 하고 싶을 때면 아파트 단지 내에 셔틀버스를 타고 대도시 쇼핑몰 쪽으로 갔었다. 그 일탈 하나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우물 안에 개구리로만 살다가 한국 브랜드의 커피숍 ( 카페베네 ), 치킨집 등등 다양한 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한국의 그리움을 약간은 게워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웃기게도 홍콩이랑 기차 타고 30분 밖에 안 걸리는데 단 한 번도 홍콩을 가본 적이 없다. 그나마 방학기간 내가 한국에 갔을 때 한국부에서 중국에 남아있던 아이들 몇몇 데리고 한 번 정도만 갔으니 말 다 했다. 원장님은 매번 졸업생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웃기게도 부조리는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몰라도 졸업생들이 군대 가면 그렇게 다들 잘 생활한다고 우리에게 자화자찬을 하시는데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를 정말 모르셨던 건지 싶다. ( 모른다 나는 그분의 속마음을. )
5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졸업을 하고 대학교를 갔다. 대학교를 정할 때 항주로 갈까 상해로 갈까 고민을 하였는데 이내 항주로 가는 생각을 접었다. 항주 쪽에 있는 대학교는 중국에서 3 위급하는 대학교였는데 나도 그곳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가는 걸 포기하고 중국 상해를 택했다. 나와 같은 학년이었던 한 살 위에 형도 나와 같이 상해로 향했다. 우리 둘이 왜 항주를 접었냐면 그 형들 대부분 떡하니 항주에 있는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만약 가게 되면 고등학교 생활이 되풀이되겠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중고등학교 쪽 사람이 없는 상해에 있는 학교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순위가 더 낮았지만 그래도 중국 내에서는 알아주는 학교이긴 했다. 나의 대학교 생활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아름답고 찬란했다. 그 답답했던 고등학교를 벗어나서 극락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잘 생활하다가 대학교 2학년쯤에 우울감이 증폭되기 시작했고,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대학교를 자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2019년 6월 대학교를 2학년까지만 다니고 자퇴하고 한국을 와서 병원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나는 2-3년 동안 자살 충동까지 올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 모든 원흉은 중국 유학 때문이었다. ( 대학교를 제외하고 ) 중국이란 나라도 거들떠보기 싫었었다. 중국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문제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보낸 부모님을 몇 년간 매번 원망했고, 그 형들만 생각하면 정말 복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다 같이 죽자라는 마인드로 말이다. 병원을 같이 갔던 당시 아버지는 분노에 가득 차서 원장에게 ( 그냥 반말 좀 하련다. ) 전화를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약으로 어느 정도 컨트롤하게 되면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괜찮아졌지만 불안장애는 5년째 지속되고 있다.
나의 끊임없는 불안의 증폭은 이 시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여전히 나는 이 불안을 컨트롤하며 속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옛 과거의 미련과 원망 후회는 우선 던져버렸다. 2024년을 기점으로 그 불안을 오히려 잘 이용해 먹자는 생각으로 살아가 보려 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울증이 극심할 당시 도와준 많은 인연들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