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우리 할아버지의 이야기

은인을 찾기까지

by 낭말로

92세이신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얼마 전에 뒤늦게 발견한 위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으신 상태이십니다. 치매가 오신 할머니를 몇 주 전에 요양원에 모시고 얼마 안 가 발견한 위암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할머니만 바라보고 사셔서 그런지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데려와달라고 하시더군요. 아마도 언제 올지 모르는 마지막 날을 직감하시고 할머니랑 그동안 더 같이 붙어 있고 싶으셨나 봅니다. 손자로서 내심 제가 결혼하는 모습이라도 보셨으면 좋겠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6.25 전쟁 당시 할아버지의 짙은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적어보려 합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남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위 | 모디에 중령님, 가운데 아래 | 할아버지

저희 친할아버지께서는 6.25 전쟁 당시 여주 쪽에서 피난을 가던 도중 (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자세히 잘 모릅니다. ) 들은 바로는 포탄 파편에 맞아 팔도 너덜 해지신 상태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 아직도 팔에 강한 흉터가 있으십니다. ) 그러고 나서 미군분들께서 쓰러지신 저희 할아버지를 발견하시고 간단한 치료 후에 부산 적십자 병원으로 이송을 시키십니다. 수술과 치료를 거듭하다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은인 한 분을 만나게 되십니다. 그 장교분의 성함은 “ 칼 무스타브 모디에 ”, 당시 계급은 중령이셨습니다. 후에 모디에 중령님께서는 괜찮아지신 할아버지를 당시 해당 병원에 취직까지 시켜주시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희 친할아버지께서는 병원에서 안전하게 일을 하며 삶을 이어나가시게 됩니다. 당시 할아버지의 나이는 19살이셨습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서울에서 조그마한 약국에서 약사로 일을 하셨던 저희 할아버지는 병원에서의 일도 어려움 없이 해내셨다고 합니다. 중령님은 그런 할아버지를 애틋하게 생각하시고 영어 공부까지 시켜주셨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두 분은 결혼식을 열게 됩니다. 야전병원 근처에서 결혼식을 하게 된 두 분 앞에 모디에 중령님께서 오픈되어있는 차 한 대를 끌고 나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태우시고 퍼레이드 하듯이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결혼을 축하해 주셨다고 합니다. 결혼 비용까지 마련해 주셨다고 합니다.


시간 지나 모디에 중령님은 고국으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충북에 정착을 하시게 됩니다. 중령님의 소식은 당연히 그 후로 알 길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2019년, 저는 할아버지와 식사 도중 중령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모디에 중령님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메일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할아버지의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중령님을 만나 뵙는 거라고 하셨기에 손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앞에 적은 내용들은 2019년에 전혀 자세히 알지 못한 내용들이었고 단순히 어떤 장교분께서 도움을 주셨다고만 들었습니다. 모디에라는 성함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가진 건 단순히 할아버지가 그동안 간직하신 사진 두 장뿐이었죠. 사진에 적힌 Modee, 처음에는 성함을 모디로 인식하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신지 모디라고 부르셨죠. 저는 용기 내어 아는 지인을 통해 영어 번역이 가능한 분을 찾아내었고, " 주 한국 스웨덴 " 대사관에 메일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어와 영어가 적힌 내용을 같이 보냈습니다. 당시 번역해 주시며 비용 일절 받지 않으신 지인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할아버지가 당시 병원에서 받은 서류의 사진과 중령님과 찍은 사진까지 보냈지만 사진상에 적혀있던 이름이 확실치 않아 " 주 한국 "스웨덴 대사관에서 " 주 스웨덴 " 한국 대사관에 문의해 보라는 답장을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어렸던 마음에 띄어쓰기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글을 급하게 다시 쓰고 “ 주 스웨덴 ”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하게 됩니다.


메일 답장을 기다리던 어느 날, 주 스웨덴 한국대사관 어느 행정원님께서 답장이 오셨습니다. ( 해당 특정 이름이 나오셔서 이름은 가리겠습니다. 공무원이시기에 실명이 나오면 좀 그럴 거 같아서. )

사진을 보았고 혹시 제대로 이름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여쭤보셨습니다. 모디라고 알고 있었던 저는 도저히 방법을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다시 답장을 전해드렸고, 그 후 행정원님께서는 모디에 중령님을 찾아주시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십니다.

시간이 좀 지나 중간 연락이 왔습니다. 국가보훈처에 문의해 본 결과 이름이 정확하지 않아서 확인이 불가하지만 스웨덴 국방기관에 물어보겠다는 행정원님의 연락이었습니다.

그러고 며칠이 더 지나 최종적인 연락이 오셨습니다.

아쉽지만 알아본 결과 중령님께서는 이미 오래전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습니다. 모디가 아닌 모디에 중령님이셨고 저는 이 사실을 할아버지께 곧장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쉬워하셨지만 도와주신 분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해주셨습니다. 저는 긴 답장으로 행정원님께 감사 인사를 전해드렸습니다.


비록 할아버지께서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내시지는 못하셨지만 마음속으로 항상 중령님을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으시고 위암 치료를 받고 계시는 지금도 당시의 기억을 또렷하게 말씀하시며

추억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 손자로서 마음이 더 아려옵니다.


오늘의 글을 마치며 감사 인사를 다시 전하고자 합니다. 주 스웨덴 대한민국 대사관 행정원님! 감사드립니다. 6년 전의 메일을 기억하실진 모르겠네요. 이 글을 보신다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저희 할아버지를 구해주시고 도와주신 “ 칼 무스타브 모디에” 중령님! 저희 할아버지를 도와주신 덕분에 대를 이어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번역을 도와주신 제 친구의 지인분께도 정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제대로 쓰지 않았던 메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읽어주시고 도와주신 두 분이 계셨기에 은인의 소식을 찾아낼 수 있었고 과거에 저희 할아버지를 도와주신 중령님이 계셨기에 제가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언제나 자긍심을 가지고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언제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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