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감히 추측해 보건대 입대 첫 날 훈련소에 누우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군필자들께는 미리 양해 말씀 드린다)
내가 어쩌다 소변줄까지 달게 된 건지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었다.
입원 2일차, CT 촬영 결과 이상 無.
오전 9시에 비뇨기과 외래진료하고 CT 촬영을 했다. CT 촬영하고 와서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또 자고, 새벽에 깨서 양치질만 하고 다시 잤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걸까. 갑자기 몸에 들어오는 수액과 조영제에 대한 피로감이었을까. 하루 중 깨어있던 시간이 4시간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CT결과도, 혈액검사도, 소변검사도 뚜렷한 이상 증상이 없다. 방광이 정상으로 되면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는 의사선생님의 소견-:
입원 3일차, 병실 첫 룸메이트와의 이별.
나보다 먼저 입원해 계시던 환자분은 60대 어머니였다. 욕실에서 미끄러져 손목 골절로 수술하신 상태였다. 우아하게 서울 표준말을 구사하시고, 정말 필요한 말 이외에는 별다른 왕래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퇴원을 준비하면서 내게 종이가방을 건넸다.
“젊은 아가씨가 소변줄 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잠을 깊이 자야 할 것 같은데 숙면에 좋은 캐모마일 티랑 커피 조금 넣었어요. 그리고 이건 이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떡. 맛있게 먹고 아프지 마요. 응?”
<퇴원하시던 어머니가 건네주신 떡과 차 선물>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
실은 서로를 짓밟고, 혐오하고, 내 것이 없으면 한 순간에 낙오되는 냉정한 세상이지만 이런 찰나의 순간들이 그 세상을 견뎌낼 힘을 준다.
< 병원 1층에 있는 미용실에서 샴푸 중에 한 컷! >
아참, 원래 누군가와 이별하거나 실연당하면 머리를 자르지 않나?
그래서 나는 이날 내 병실 룸메이트와 헤어진 기념으로 나는 머리를 감았다. 4일만에!
병원 1층에 미용실이 있다니.링거 꽂은 팔에 소변줄까지 매달고 미용실을 찾았지만 당황한 기색 1도 없이 친절히 반겨준 헤어 디자이너에게 감사하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감겨주는 느낌은 정말 천상의 기분이다! 커피 안 먹고 아낀 만 원으로 잠시나마 행복했다. 머리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킁킁. 킁킁킁.
입원 4일차, 간호사분들은 위대하다.
매일 새벽 6시가 되면 간호사선생님이 찾아온다. 감염 방지를 위해 환부(?)를 소독하고, 밤새 가득 찬 소변통을 비워주신다. 소변량 기록을 위한 과정이지만 내 부모나 형제가 아니라면 하기 힘든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쓱쓱 해내는 걸 볼 때마다 내 마음은 겸허해진다.
환자의 가장 아픈 부위를 가장 가까이서 봐야 하는 게 간호사라는 직업의 숙명이겠지만, 그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입원 5일차, 회사 동기들의 방문.
주말이다. 2인실을 혼자 쓰니까 천국이 따로 없다. 창문 열어서 환기하고, 전화통화도 마음껏 하고,
음악도 틀어놓고, 진짜 쉬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심심함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에는 회사 일이라면 지긋지긋할 동기들이 기꺼이 병문안을 와줬다. 지금 생각해보니 생필품 전달이 주목적이었던 것 같다. (나를 배려해 회사 이야기는 거의 안 하고 감). 두루마리 휴지와 수면안대, 홈런볼과 에그타르트 선물에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특히 두루마리 휴지!
혼자 있어서 좋다고 하더니 막상 사람들을 만나니까 너무 반갑고 신이 났던 나는 그냥 ENFP…
입원 6일차, 호캉스 아니고 병캉스!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신기한 건 병원에 갇혀서야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내가 정말 쉬는 것 같다는 마음. 내가 ‘지옥’이라고 부르는 PT 수업도, 골프 레슨도, 필라테스도 강제로 쉬게 됐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지난 3개월 병가 동안 나는 미친 듯 운동에 매달렸다. 그런데 입원하고 보니 무리해서 운동을 하는 것도 내가 나에게 주는 강박의 선물이었다. 여기서는 정확한 시간에 맞춰 맛있는 밥을 주고, 설거지 없고, 청소랑 빨래도 필요가 없다. 이런 게 병원에서 하는 호캉스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