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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생 Mar 30. 2017

당신이 아무리 사과해도
아내의 화가 풀리지 않는 이유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 말랬지!"

신혼부부의 출발은 사랑 반 싸움 반. 아니면 싸움 좀 더 많이.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싸우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싸움이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 정도 경지에 이른다면 싸움을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참을 수 없는 이유를 만들며 또 싸우는 게 부부다.


사실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남편이나 아내나 손해가 막심하다.


보통 부부싸움의 흔한 패턴은

남편은 퇴근 후 집에 일찍 들어와서 아내를 돕기 싫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육아는 온전히 아내의 몫이 되고, 

밤늦게까지 친구와 술 마시느라 연락 두절된 남편 대신 독박 육아로 지칠 대로 지칠 아내는 

독이 바짝 올라서 다음날 아침 냉수 한 컵, 며칠 안 빤 듯 한 꾸린내 나는 옷 등으로 소심한 복수를 시작한다.


이런 속 터지는 경험이 쌓일수록 '저 인간의 토라짐은 곧, 나의 피로'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고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어떻게든 상황을 좋게 무마시켜서 평상시의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마음 없는 사과를 비굴하게 남발하게 된다.


입 밖으로는 '미안하다'라고 하면서도

상대방이 왜 화가 난 건지, 어떤 게 속상했던 건지 공감하거나 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나의 안락함을 위해 사과를 남발하는 비굴한 사과가 맞다.


P는 어느 날, 이런 비굴한 사과가 자신의 결혼 생활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이 오랜만에 하루 휴가를 냈고, 아이는 유치원에 갔고 

그렇게 집에 둘만 오붓하게 있을 수 있는 찬스가 왔는데 P는 불안하기만 했다.


'이렇게 같이 있다가 혹시 괜히 원치 않는 스킨십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정말 웃긴 생각이지만 P는 그의 아내이면서도 집안을 배회하는 남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P는 한 달 전부터 남편에게 서운한 것이 쌓여있던 터였다.


병원에 보호자로 동행했던 남편이 환자인 자신을 너무 방치했다는 사실에 살짝 서운했지만

너무 큰 싸움이 되지는 않도록 감정을 절제하며 이야기를 꺼냈고 

남편은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듯한 말투로 응수했다.


"나도 처음이라 그래. 내 딴엔 최선을 다 했는데 나보고 얼마나 더 잘하라는 거야. 

당신이 원하는 남자를 만나려면 와이프가 아파서 대학병원 다니면서 보호자 노릇 좀 해본 경험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할 거야. 

어쨌든 당신이 서운하다니까 미안해. 내가 다음엔 좀 더 신경 쓸게"


P는 남편의 사과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픈 몸으로 남편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면 그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의 사과를 받는 척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P는 남편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좀처럼 잊을 수 없었고 그렇게 그녀의 마음은 남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P의 건강이 회복될 무렵, 이 문제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하고 싶어 졌다.


"여보 난 당신이랑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당신이 나한테 사과를 잘 안 한다는 거야. 그동안 옆구리 찔러 절 받기 식의 사과만 받아왔던 거 당신도 알잖아. 오죽하면 내가 당신한테 싸우다 말고 '나한테 제대로 사과해'라고 말하겠어. 난 정말 당신이 진심으로 하는 사과를 받고 싶어. 그동안 속상한 적 정말 많았는데 단 한 번도 속 시원하게 풀린 적이 없어. 내가 애원하고 구걸해서 받다시피 한 사과들이라 당신은 사과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 앙금이 아직도 다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이젠 당신한테서 내 마음까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그래 나도 인정해. 그런데 내가 아무리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당신이 안 받아줘. 맨날 미안하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만 하고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 당신은 너무 어려워"


"당신이 분명 '미안하다'고는 해. 그런데 미안하다는 사람 치고 나한테 정말 차갑고 쌀쌀맞아. 난 당신이 나한테 사과할 때 내가 속상했던 것에 대해서 걱정해주고 다정한 마음으로 사과해주면 좋겠는데 항상 나한테 차가운 어투로 조건을 달면서 미안하다고 하잖아. 

내가 당신한테 서운하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이미 당신 노력에 대해서 인정받기보다 지적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한 상황이라는 거 알아.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한 상황은 맞으니까 머리로는 사과할 수 있지만 마음만은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주기는 싫은 거지.. 내가 잘못 본 거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긴 하다. 나 사실 당신이 나한테 서운하다고 말하면 들으면서 확 짜증이 나. 자존심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노력한 건 안 봐주고 서운하다고 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아. 그러다 보니까 미안하다고 말은 하는데 마음속으로는 당신한테 별로 다정하게 대해주기가 싫었어. 그래서 말도 좀 그렇게 나갔나 보다. 다음부터는 당신이 그런 내 마음까지도 다 느낀다고 하니까 나도 고칠게."


"고마워. 그리고 한 가지 알아줬으면 싶은 게 있어. 난 당신한테 단점 지적하기 위해서 말 거는 게 아니야. 그냥 나 혼자 풀기 어려운 문제를 당신이랑 같이 상의하고 싶다거나, 다음엔 이렇게 해주면 더 좋겠다는 의견을 나누고 싶었던 건데 항상 당신은 내가 고민거리 이야기하거나 서운한 거 이야기하면 싸움 건다고 생각하던데 그러지 마. 우리는 부부잖아. 난 천 원짜리 애 장난감 하나 사는 것도 다 당신이랑 상의하고 사는 사람인데... 큰일 작은 일 좋은 일 나쁜 일 가리지 않고 나는 당신이랑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사실, 

부부끼리는 눈빛만 봐도 생각이 줄줄 읽히는게 문제다.

말 하기 전에 이미 마음과 생각이 읽히는 바람에 

미안하다는 말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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