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들

구도 노리코의 <으라차차 라면 가게>를 읽고..

by 라미루이





금천구 어느 도서관에 들렀다가 신간 코너에서 익숙한 그림책 표지를 발견했다.

익살스럽고 장난기 가득한 몇몇 야옹이들이 식당 안을 엿보는, 낯익은 그림체가 반갑다.

구도 노리코 작가의 우당탕탕 야옹이 시리즈의 신간, <으라차차 라면 가게> 다.

책을 집어 들자 아이들이 다가와 아빠, 이거 재미있어. 즉시, 바로 대출해! 하고 성화다.

- 원래 말썽쟁이 병아리들이 주인공 아니었니?

- 그건 삐악삐악 시리즈고, 이건 야옹이 시리즈야. 둘이 다른 거라고..

- 오케이, 알았다.


책을 빌리기 전에 아빠가 먼저 읽어보기로 한다. 사전 검열까지는 아니고, 이번엔 야옹이 무리들이 어떤 사고를 칠지 나 또한 궁금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읽었던 전작은 야옹이들이 빵공장에 무단 침입하여 어마 무시한 특대 사이즈 빵을 굽다가 포복절도할 대형 사고를 친다는 내용이었다. 박살이 난 식빵 모양의 공장 앞에서 노란 야옹이들이 일렬로 서서 벌을 받는 모습이 얼마나 개구지던지.. 제목이 <빵 공장이 들썩들썩> 이던가 그랬다.

이번 신간은 귀여운 아기 원숭이 마을을 괴롭히는 사나운 괴수를 두 동물이 합심하여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화산과 온천, 라면 가게를 배경으로 이야기에 잔재미를 더하고, 마지막은 사고 친 현장을 야옹이들이 뒷수습한다는 기존 틀을 지켜 아이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책을 덮자 구도 노리코의 초기작이 떠오른다. <삐악 삐악 슈퍼마켓>. 책등과 페이지 곳곳이 닳고 닳아 너덜 해질 정도로 아이들이 좋아했다. 집이든 어느 도서관이든, 아빠가 책 읽어줄게. 끌리는 책 가져오라 하면 이 책을 선뜻 가져오는 경우가 열에 서넛이었다. 도서관에서 어린 솔과 연을 무릎에 앉히고 이 책을 읽어주노라면, 곁의 언니 동생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내 한마음 한뜻으로 둘러앉아 내 목소리에 집중하곤 했다. 내 목청이 중후한 저음에 매력이 넘쳐서가 아니라, 흠흠.. 샛노란 병아리들이 꼬꼬댁 엄마 따라 마트에 간다는, 어떻게 보면 평범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의인화한 동물 캐릭터로 아기자기하게,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더불어 아이들이 빠져들 만한, 맛깔난 미끼와 떡밥을 곳곳에 배치하고 숨겨놓았다. 덕분에 여러 번 읽어도 지겹거나 질리지 않는다.

난 이 책을 거듭 읽어주며 깨달았다. 등장하는 캐릭터는 하나 같이 둥글한 몸매에 단순한 터치로 그려졌지만, 그 표정과 몸짓이 각양각색이다. 아기 삐약이와 꿀꿀이, 오리너구리 등 등장 동물들의 동그란 눈동자와 부리, 입 모양 만으로 이렇게 다양한 상황과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마트에서 일어날 법한 아이들의 떼쓰고 징징대기,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기, 카트에 무작정 담아 보기 같은 필살기를 리얼하게 그려 호응과 폭소를 유발했다. 또한 마트에서 마주친 두 동물들이 숨바꼭질 배틀을 벌이는 통에 매대 곳곳에 꼭꼭 숨은 그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아이들은 너도나도 손가락을 뻗으며 여기여기, 내가 먼저 찾았거든! 하며 어설피 숨은 병아리와 돼지들을 짚어내기 바쁘다. 이미 골십번이 넘게 읽고 읽었기에, 책 내용과 페이지의 세부를 통으로 외웠기에, 눈 감고도 숨은 그림을 척척 찾아낼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도서관이든 어린이 열람실 문을 열고 덥수룩한 내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들어서면 모두의 관심이 쏠린다.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는 아이들도 흘깃 거리며 관심을 보이지만 멀찍한 거리를 좁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고에서 고른 이 책을 천천히 읽어주면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낯을 가리던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엄마가 아닌, '아빠'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이 이런 힘을 지녔다. 다시 말하자면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아이들과 최단 시간에 친밀해지는 최고의 방법은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그동안 마주친 몇몇 아빠들은 책 내용에 걸맞은 어이쿠야! 냐옹냐옹~ 같은 추임새와 양손을 들고 벌을 서는 제스처까지 애써 곁들였다.

평소에 무뚝뚝하던 아빠가 창피를 무릅쓰고, 체면을 벗어던지고 손 몸짓을 곁들여 그림책을 읽어준다. 도서관에서 그가 목이 메도록 읽어주었던, 그 책들을 아이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후에 중고 서점에서 또는 미래의 도서관에서 그 책의 낡은 표지와 조우하는 순간, 자신을 무릎에 앉히고 페이지를 넘기던 젊은 아빠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어린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그 시간들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다. 서고에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글밥이 적고 그림체가 아기자기하고 단순하며, 교훈적인 내용보다는 책의 온전한 재미를 담아낸 책들을 고른다. 어릴 적 내가 좋아할 만한, 손에 바로 잡히는 그런 책들을 택하면 된다. 아이들을 곁에 앉히고 책을 낭독하면 주위의 시선이 집중될 것이다. 하지만 난 타고난, 누구도 못 말리는 관종인가 보다 하고 체념하고 받아들이자. 멀찌감치 거리를 둔, 생면부지의 아이들이 책 내용에 대해 아는 체를 하고 바짝 다가오면 당신의 안목과 목소리는 합격점을 받은 것이다. 주위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동시를 소리 내어 읊듯이, 리듬감을 살려 천천히 읽어주자. 한 권, 두 권.. 그렇게 읽다 보면 어느새 옆 자리에 수북이 쌓아 올린, 아슬하게 쓰러질 듯한 책의 거탑을 발견하고 놀랄지도 모른다. 어느새 자신을 중심으로 빙 둘러싼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곤 흐뭇한 슈퍼맨 미소를 날릴지도 모른다. 도서관 폐관 시간이 코 앞에 다가오도록, 자신의 목이 쉬는 줄도 모르고 그림책 읽는 재미에 빠졌다면 당신은 올바른 길을 택한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 바쁜 시간을 아낌없이 내어준 인기 만점 아빠를 결코 잊지 못할 테니까..



도서관이 아이들을 키우고, 아빠를 일깨운다.



여기까지 글을 쓰자 문득 <삐악 삐악 슈퍼마켓>, 그 책이 집안 책장에 고이 꽂혀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솔과 연은 한참 전에 엄마가 정리를 하면서 내버렸다고 울분을 토하고 성을 냈다. 아내에게 아이들이 아끼는 책을 어찌 버렸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평온한 집안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안간힘을 써도 책장의 공간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옛 정든 책은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하나둘 사라진다. 허나 그에 얽힌 추억은 영원한 법이다. 아이들과 책과 관련된 내용들을 대화 주제로 올려, 이러니 저러니 주고받으며 저녁 식사를 한다.

삐약이들이 감자와 바나나 더미에 몸을 숨기고 있었어. 하지만 머리와 엉덩이가 커서, 펑퍼짐해서 다 보였지. 카트에 무작정 담은 먹거리 중에 촙촙 사탕 하나만 겨우 살아남았지. 줄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탕을 물고 엄마를 따라가던 그들이 어찌나 웃기던지. 퇴근한 꼬꼬닭 아빠가 사 온 꽃다발이 식탁 화병에 꽂혀 있었다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까지.. 아이들은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로소 난 아이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흐르지 않았음을, 의미가 없지 않았음을 깨닫고 눈가가 시큰해졌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척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아이들을 양 옆에 앉히고 구도 노리코의 새 책, <으라차차 라면 가게>를 소리 내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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