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엄청나게 특출난 성과를 낸 한국계 외국인에게 '한국인'이라는 낙인(?)을 새기는 것을 무척 구리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입양된 한국계 사람들에게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린 것을 넘어 후안무치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백인이 아닌 인종 혹은 혼혈로서 서양 사회에서 사는 일은, 그 당사자에게는 인격 형성에 여러모로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 생활을 해본 경험은 뉴질랜드에서 3~4개월 정도 살아본 게 다이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외부인'으로서의 자각을 했으니 그곳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의 경우는 얼마나 더 많은 생각이 들지.
뉴질랜드 퀸즈타운의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한 무리의 여행객을 본 기억이 있다. 뉴질랜드는 미국 서부와 가까워 미국인 여행자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곳에도 한 무리의 젊은 청춘 남녀 백인 미국인들이 섞여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미국인 특유의 발랄한 무례함으로) 그 사이에 한 명의 중국인 여자 아이가 있었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언어적으로도 완벽한 영어 네이티브였다. 하지만 그 여자 아이는 결코 그들 사이에 완벽히 섞이지 못했다.
요즘 많이 듣는 음악 중 하나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Japanese Breakfast 이다. 이는 한국계 혼혈 미국인인 미셜 조너 Michelle Zauner 의 솔로 프로젝트명인데, 그 이름부터 자신의 '피'에 대한 고민이 있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난 아시아계 혼혈 미국인인 미셜 조너는, 암으로 인한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어머니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어머니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어쩌면 서양 사회보다 더욱 지독하리만큼 다른 인종을 배척하는 폐쇄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회 속에서 '절대 다수'인 한국계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며 뿌리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계기는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고민을 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자연스레 흥미와 관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한다.
30.
잔뜩 쓴 글을 지웠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선 하루였으나, 그것을 온전히 기록하기엔 너무도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지웠다. 나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이 카테고리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지만, 모순적이게도 개방된 공간이기에 모든 것을 기록할 수는 없다.
앞으로의 삶과 생활에 대한 큰 고민을, 짧지만 깊게 해야 했던 하루였다.
1.
근로자의 날로 꿀같은 휴일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아침부터 어쩐지 눈이 일찍 떠져서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났는데도 아직 12시~1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저녁에 약속도 있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니, 나가기 전에 낮잠이라도 잘까 했는데 어쩐지 시간이 아까워 세탁기를 돌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카페에 가서 밀린 책을 읽으려고 집 근처 스타벅스로 갔는데 앉을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길 건너편에 또 다른 스타벅스도 있어서 그리로 갔는데 이미 입구부터 만원이다. 이벤트로 받은 이디야 기프티콘이 하나 있어 근처 이디야로 갔더니 거기는 그래도 자리가 있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근로자의 날로 휴식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였다.
밀린 책을 한 권 다 읽고, 두 번째 책을 조금 읽다 집에 돌아왔다. 다 돌아간 빨래를 널고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며 쉬다가 여섯시가 좀 넘어 시간 맞춰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2.
군대에서 맞후임으로 처음 만났던 친구(나보단 1살 어리지만) 하나가 있다. 나는 중-고등학교-대학교를 그야말로 범생이로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었다. (재수를 했다는 것 말고는 인생에서 별다른 굴곡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나와 달리 좀 특이한 삶을 산 것으로 보였다. 학교에 가기 싫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다 군대에 왔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껏 격어보지 못한 타입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성격이 워낙 좋고, 둘이 통하는 면도 있어서 금세 친해졌고 군생활 내내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의지하며 잘 지냈고, 그 덕분에 서로 군생활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맞선임-맞후임 관계였으니 함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도 꾸준히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최근에도 우연찮게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종종 보고 연락을 하며 지내는데, 그 친구는 새삼 정말 열심히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친구는 본업 말고도 부업을 새롭게 시작하며 하루를 48시간처럼 쓰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늘 대단하고 생각한다.
좀 과하게 열심히 사는 면이 있어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같은 느낌은 아니다. 다만 그 자신의 신념에 따라 충실한 모습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더불어 '나도 나 나름대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는 점이 좋다. 특히 내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때가 많아서 고마운 마음도 많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좋은 인간 관계는 긍정적인 자극과 영향을 주는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내가 받고 있는 만큼 나도 그 친구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3.
주중에 쉬는 날(근로자의 날)이 하루 있는 여유로운 한 주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리 여유롭지 않은 한 주를 보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바쁜 일들과 개인적인 고민들 때문에 쉴 틈 없는 한 주를 보내고 나니 퇴근길부터 정말 피곤했다. 그래서 집에 가자마자 씻고 누워서 시간을 좀 낭비했다. 바쁘게 시간을 보낼수록 여유 시간이 생길 때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상대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기 보다는 유튜브를 멍하니 몇 시간 본다거나 게임을 하는 등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피곤함이 연휴 내내 따라다닐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그냥 11시부터 잠을 잤다.
4.
오랜만의 연휴(라곤해도 3일 쉬는 거지만)가 시작되는 첫 날이어서 그런지 무척 기분이 좋았다. 미세먼지는 좀 있는 편이었지만, 날씨가 초여름처럼 더울 정도로 따뜻하고 맑았다. 에어컨 커버를 벗기고 처음으로 에어컨을 튼 날이기도 했다. 작년에 잘 닦아둔 뒤 커버까지 씌워 두니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 기분좋게 작동할 수 있었다.
시내에 나가 점심을 먹곤 소소시장에 들러 오랜만에 소소한 창작품도 하나 구매하고, 차를 마시러 서촌으로 가는데 광화문과 서촌 일대에 친박 집회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기세가 무서울 정도였는데, 아마 최근에 일어난 여러 일들 (패스트트랙, 북한 미사일 등등) 때문에 그런 듯 보였다. 그것을 보며 신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데 어쩐지 우울해졌다.
밤에는 오랜만에 명동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다. 그런데 미사를 드리는 내내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자리도 너무 좁았고 근처에 앉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크게 노래를 불러기 때문인 것 같았는데, 그래서인지 회사에서 일어난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 생각나서 미사를 드리는 내내 마음이 괴로웠다. 일주일의 하루, 그 하루 중 한시간이 종교를 위해 온전히 쓰는 시간인데 그 시간만큼도 집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다만 그 시간 동안 내내 괴로워한 덕분에 그 이후로는 회사에서 일어난 짜증나는 일이 생각나지 않은 것을 보면 액땜을 한 것 같기도 하다.)
5.
종각역에 가보니, 종각역에서 조계사까지 도로를 통제하고 불교 관련 행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다음 주 일요일에 있을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오늘 미리 땡겨서 하는 것 같았다. 세계 각국의 불교의 모습을 소개하는 부스가 무척 재미있었는데, 그 중엔 스리링카도 있었다. 부활절에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테러를 생각하며 잠시 기도를 하였다.
모든 종교의 본질은 평화임을 모든 종교인이 마음에 새기길 바란다.
조계사에 가니 온통 연등을 달아놓은 모습이 무척 예뻤다. 오늘따라 유독 종로에 외국인 관광객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내가 외국인으로 이 시즌에 한국에 온다면 정말 재미있게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 카페에 가서는 여름 휴가를 계획하고, 미리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올해 여름 휴가는 중국의 상해에 갈 생각이다. 작년에 갔던 중국 청두의 인상이 너무 좋았어서 2년 연속으로 중국에 휴가를 가게 된다. 예전에는 중국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생각 이상으로 매력적인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를 마시고 나와 서촌 구석을 돌며 구경을 하는데, 새삼 구경하지 못했던 가게나 골목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거의 매주 서촌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데도 그렇다. 이렇게 연휴의 첫날과 이튿날을 너무도 즐겁고 행복하게 보냈다.
그리고 이런 하루들이 쌓여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월요일인 내일도 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