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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적 Nov 07. 2024

기억이 무릎까지 흘러

입력된 기억은 소진하시기바랍니다.

봄의 플레이리스트엔 한 곡만이 들어있습니다. 지난해에도 지 지난해에도 아마도 그전 해에도 꽃샘 추위가 시작되고 벚꽃이 피고 목련이 피고 이팝나무가 필 때까지 이 곡 만을 들었건 것 같습니다. 지겨울 겨를이 없는 리듬이었고 가사였으며 음색이었죠.


오늘 오래된 나무 선반 위에 과자를 다 먹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동그란 양철통을 엽니다.종이 먼지가 쌓인 편지들 속에 오래전 녹음 되었던 봄의 유품 하나를 꺼내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Scc3Jv1Ik&list=PLf4UbqXonI-Rn6n-Zdlpl_JQiklxqFTGu


비닐에 싸여있던 원형의 검은 디스크를 조심히 꺼내 듭니다. 지난해 마지막으로 듣고 닦아낸 결 위로 쌓인 먼지를 천으로 닦아냅니다. 작은 원반 위에 디스크를 내려놓습니다. 꽃씨처럼 원반 위를 디스크가 돌기 시작합니다. 지정된 속도로 돌며 햇살 같은 윤기를 반사합니다.


뾰족한 바늘을 조심히 디스크 위로 내려놓습니다. 착륙하는 비행기 바퀴처럼 부드럽게 땅 위로 바퀴가 내려앉으며 빗소리가 들립니다. 처음 새겨졌던 봄을 잊지 못하는 기억의 먼지들이 바늘 위로 긁힙니다.

섭섭하다고 말해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억해내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분명 섭섭했을 법한 일들이 기억나지만 섭섭하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가만히 입술에 손을 얹고 그 말을 해봅니다. 손끝으로 꽃샘 바람처럼 차가운 그 말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그 말을 뱉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섭섭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한 가지 기억으로 사로잡힙니다. 봄이었습니다. 소중하고 아깝기만 했던 누나가 있었습니다. 말도 전하지 못하고 헤어졌으며 한동안 누나가 사라진 공간을 메우느라 더 바쁘게 보내려 노력했습니다.      

다시 누나가 돌아오던 날 행사로 바빴던 저는 문을 열고 들어오게 될 누나를 온몸의 솜털 들을 모두 세워두고 기다렸습니다.

그 일을 멈춰야 한다는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종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자를 힘껏 누르고 커터날을 여러 번 그어 마지막 한 번에 끝내려는 순간 누나가 들어섰습니다. 그 순간 대고 있던 자가 힘없이 비틀어지고 중지가 뜨거워졌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반갑게 누나를 맞고 한 명씩 손을 잡고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누나에게서 눈을 뗄 수 없던 나는 손을 움켜쥐고 기다리고 서 있었습니다.


“OO은 악수도 안 해줄 거야?”


차오르는 감정이 청바지 주머니 속을 그 속에 있던 손아귀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뛰쳐나온 뒤 그날은 그곳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릎까지 흐른 핏자국이 남아있던 청바지를 한동안 버리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섭섭했던 건 그날의 나였습니다.

끝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나.


다시 돌아갈 용기가 없었던 나.


그런 나….


나의 섭섭함은 상대가 없고.     


차가운 바람 속으로 손을 내밀 수 없던 봄에게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손등을 들어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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