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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카드섹션

나무였는데, 숲이었는지 물으면.

by 적적

아침에 눈을 떠 아카시아 이파리 같은 눈꺼풀은 너무 얇은 탓에 햇살을 거르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눈꺼풀은 턱없이 연약하기만 하지. 거실로 내려오는 길이 춥지 않은 건 봄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지. 맨발로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어.

양말을 신고 산책 나갈 채비를 해. 무릎에 닿는 검은색 패딩을 갑옷처럼 걸치고 차가운 바람과 싸우러 나가고 있어. 어제보다 한결 부드럽게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어.

보름달을 보았어. 이 새벽에 말이지. 출근할 때면 창백한 달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마도 중학교 때였을 것 같아 왜 카드섹션을 택했는지는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지. 우리는 몇 장의 도화지를 나눠 받았었고 그 도화지에 빨간색 색종이 네 장, 파란색 노란색 네 장, 그리고 검은색 색종이를 각각 도화지가 다 덮이도록 붙여 가지고 오라는 숙제를 받게 돼.


새로 신축된 운동장 옆 시멘트 계단에 쪼그리고 따닥따닥 붙어 앉아서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해당하는 카드를 들거나 반쪽을 접어 흔들기도 했던 것 같아.


우리는 무엇이 되려는 건지 혹은 무엇이 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 바빴어. 들어야 하는 색종이는 점점 더 세분되고 조금씩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지.


빨/빨/파/파/검/검반/파/파반/빨/노/노/노반/빨/검/파/검/파/파/검/검반….


구령하는 선생님은 건너편 나무 그늘에서 우릴 쳐다보았어. 바라본다는 말이 얼마나 따스한 건지 처음 알게 되기도 했지. 선생님은 멀리서 쳐다보아야 숲을 볼 수 있다고 말했었지. 목에 걸린 쌍안경으로 그림 속에 섞이지 못하는 나무, 글자에 포함되지 못하는 나무는 그 먼 길을 전력 질주로 달려와 이름을 크게 부른 뒤 아이들 틈을 느리게 내려오는 겁에 질린 아이의 뺨을 휘 갈 겼 어.


우린 모두 정신 못 차리는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루어야 했지.


우린 끝까지 우리가 어떤 모양이었으며 어떤 글씨였는지 알 수 없었어. 아니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았지.

그해 겨울 교장실 벽면에 얼굴 없는 가지도, 열매도 맺지 못한 숲의 사진이 걸려 있었어.

희망차게 부풀어 오른 얼굴을 감싸 쥐던 아이들은 학교의 이름과 눈이 부신 태양이 밝게 떠오르는 아침 풍경이 되어 있었지.

아침 산책을 다녀오기 전 창가를 바라보며 꺼지지 않는 가로등을 바라보았지.


밤의 카드섹션은 가로등이 꺼지면서 막을 내렸어.

달의 자리로 가 아무것도 들지 않아도 되는 투명한 아침이었음 했어.



숲이 되고 싶지 않은 날이기도 하니까.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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