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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 오는 통로

비상계단에 불이 꺼지지 않으면.

by 적적

나는 상상을 하게 돼.


아직 어둠은 마르지 않은 젖은 빨래처럼 허공에 걸려 어둠에 휘날리고 있습니다. 젖은 빨래는 사실 마른빨래보다 바람에 더 예민하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젖은 것들은 유연한 피부를 가진 이유일지도 모르겠어요.


모란이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걷습니다. 실눈을 뜨고 가만히 보니 얼굴에 가까이 와서 나를 내려다보더니 가만히 앉아 지켜봅니다. 죽은 자의 연기를 담고 있는 카메라 같은 눈으로 작은 앞발로 얼굴을 툭툭 칩니다. 축축한 코를 뺨에 가져다 댑니다. 더 이상 죽은 척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이면 불이 꺼진 실내로 들어올 수 있는 건 멀리 보이는 붉은 신호등이나 아직 꺼질 채비를 못 한 가로등과 이제 일터로 나가기 위해 잠시 조명처럼 틀어 놓은 TV가 화면의 방안을 일렁이고 있을 뿐이죠. 그런 거실을 바라다보면 잠시 뒤 일렁거림이 사라지고 나면 몇몇 사람이 계단을 통해 내려오느라 비상등이 계단을 지켜주다가 체온이 사라지고 나면 일정한 시간을 두고 사라져 가죠.


눈이라고 하기엔 속도가 너무 빨랐고 비라고 하기엔 내려앉을 자리를 찾듯이 허공을 헤매고 있던 떨어지는 모든 물기를 바라다봅니다.

길을 나서며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습니다. 손끝이 차가워지도록 걷다가 발끝이 아직 따스하다는 걸 느낄 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불이 꺼진 거실에선 내리는 눈이 불이 켜지길 기다리며 집안을 들여다보며 내리고 있었습니다.

안전 문자들이 오고 길가로 나서자 녹지 않은 그리고 얼지도 못한 눈이 쏟아져 있었습니다. 작은 종이컵에 담아 빨간색 플라스틱 빨대로 마시면 사과 맛이 날 것 같은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간혹 너무 멀리서 달리는 구급차 소리가 들립니다. 어둠이 가시는 속도는 시커멓게 타버린 냄비 바닥을 힘주어 닦아내다 보면 벗겨진 자리가 말갛게 드러나는 것처럼 벗겨져 갑니다.


냄비 바닥이 드러납니다. 쇠의 본성. 깨지지 않고, 금방 뜨겁게 달아오르고 안의 내용물에 따라 식어가는 일상처럼 종일 구름이 많은 하늘을 볼 수 있는 하루입니다.


수요일 아침이 오후 4시처럼 어둡고 나른합니다.


그럼요 2월이니 눈이 올 만도 하죠….


눈이 오고 있는데 9시 이후 눈이 온다는 예보를 듣습니다. 가로등이 켜진 도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결을 따라 날아드는 눈송이가 가지 위로 바늘처럼 꽂혔을 것입니다. 다음 자리는 다음 자리는 무뎌진 자리로 눈송이도 무뎌져서 쌓여갑니다.

가로등 아래 가로수들은 여백도 없이 차 있습니다. 자연은 어쩌면 여백 따위가 존재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길가에 쏟아놓은 사과 맛 슬러시를 밟고 지나갑니다. 끈적이지 않는 향신료가 신발 밑창에 쌓여갑니다. 오늘의 적설량이 현관 바닥에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너무 차가운 음료를 마시면 머리가 찡하게 아픈 거 알죠?


두통이 밀려오는 수요일 아침입니다.

온종일 흐린 하늘 아래 놓여있던 젖은 빨래 같은 나는 바람에 말라가며 좋지 않은 냄새를 풍깁니다. 그런 나를 가만히 하나하나 개어 한 곳에 모아두었다가 돌아갈 자리를 찾아 다시 젖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저녁입니다.


아~ 오늘의 우울은 몸살기가 있는 몸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열로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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