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보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 댁은 커다란 기와로 만들어진 지붕에 앞마당이 꽤 넓은 집이었어요. 시멘트로 만든 수돗가가 있었고 마루 밑으로 꽤 큰 지하실이 있었는데 한낮에도 서늘하고 습기가 가득했었죠. 그곳에 불을 켜면 흔들거리는 노란 전구가 켜져 있었어요. 그곳에서 허리를 구부린 열 명 남짓한 사내들이 화투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 집에 새로운 식모가 온다는 소문은 사내들을 기분 좋게 했어요. 새로운 식모가 들어서자 할머니는 마당까지 내가 새로운 식구를 반겨주었어요. 새로 온 식모는 나이가 어리고 얼굴이 하얗고 다리를 조금 절었어요. 그녀의 손을 잡은 작은 아이는 그녀를 복사기에서 60% 축소해 놓은 모습이었죠.
그녀는 온종일 부엌에 있었어요. 아침을 하고 다시 새참을 만들고 점심을 하고 국수를 삶고 다시 저녁을 하고 그렇게 부엌에 있는 그녀 곁을 작은 아이가 따라다니며 마당 앞 평상에 음식을 나르고 빈 그릇들을 부엌으로 다시 옮겨 놓았죠.
아이도 이름이 있었는데,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오른쪽 뺨에 빨간 반점을 보고 꽃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뺨에 있는 반점은 정말 꽃처럼 피어나 있었어요.
꽃님이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쯤 더 많았어요
그녀와 그녀의 딸은 부엌에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해 겨울 꽃님이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나자 일하던 남자 하나가 며칠 뒤 사라졌죠. 꽃님이는 식모의 딸도 아니고 식모도 아닌 보통 작은 계집아이로 남게 되었죠.
아무도 꽃님이가 있는지 알지도 못했어요. 늘 무얼 하는지 이마에 땀이 맺혀있거나 작은 손등이 빨갛게 터 있었죠.
남자들에겐 모두 삼촌이라고 부르던 꽃님이는 내가 왜 네 삼촌이냐고 물으면 이내 울상이 되어 눈물을 터뜨리고 울었죠. 그 모습이 재미있어 매일 아침 꽃님이를 놀렸어요.
꽃님이는 매일 아침 울었죠. 손이 늘 터 있는 건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낸 증거였어요.
봄은 무던히 오지 않았어요.
새로운 식모가 오기 전까지 할아버지의 며느리가 대신 사내들의 밥을 해주었죠. 꽃님이는 딱히 할 일이 없었죠. 사내들은 부엌까지 다가가 반찬이며 밥을 쟁반에 담아 밥상에 올렸으며 마지막까지 밥을 먹던 사내가 커다란 쟁반에 빈 그릇들을 담아 부엌에 날라다 주었죠.
꽃님이는 그저 상을 펼 때와 상을 접을 때 행주를 가져다 상을 닦는 일 말곤 하는 일이 없게 되었죠.
더 이상 사내들은 꽃님이를 부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 번씩 꽃님이를 부를 때마다 꽃님이는 입가를 씰룩거렸어요. 물을 떠다 주고 모자란 반찬을 날라다 주며 웃었어요. 이름이 불릴 때마다 목소리는 아주 커졌어요.
아침 일찍 깨어난 아이가 저 어둠 끝의 벽을 더듬어 불을 켜고 지하실을 나옵니다. 어깨까지 자란 머리는 산발하고 주체할 수 없는 걸음걸이로 나와 부은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며 가만히 한참을 서 있습니다.
너무 일찍 피어나 꽃송이 하나가 차가운 바람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립니다. 그 꽃잎을 바라다보는 저에게 바람개비처럼 달려와 삼촌이라고 부릅니다.
왜 일찍 일어났냐고 오늘은 춥다고 웃습니다.
엄마가 신던 슬리퍼 뒷굽은 낡아 높낮이가 다릅니다.
꽃님이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아직도 밤의 길이가 낮의 길이보다 길 거야. 추운데 양말도 안 신었구나. 발톱이 많이 자랐네. 이따 저녁에 삼촌이 발톱 깎아 줄게
대문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