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을 부른적이 없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끝내 말하지 않은 것들

by 적적

빛은 창백했다. 늦여름의 오후가 그랬다. 건물 외벽을 타고 흘러내린 그림자가 바닥에 엎드린 사람처럼 보였고, 선풍기의 날개는 돌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전원은 꺼져 있었고, 더운 공기가 회색 커튼을 끌고 다녔다. 그늘에 엎드린 머리카락이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거기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어떤 이름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을 필요는 없었다. 단지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이후에 무언가가 생겼다. 그것은 심야의 주파수처럼 불청객처럼 찾아왔으며, 누구도 호출하지 않았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단 한 번의 약속도 없이, 사랑이 발생했다. 초록색 비닐 장판에 식은 국수가 엎질러진 날처럼, 투명한 무언가가 엉켜 있는 순간이었다.



우연이 기적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단지 세상의 무질서가 만들어낸 얼룩일 뿐이다. 그러한 얼룩 위에 신발 자국이 찍히고, 그 자국 위로 또 다른 그림자가 포개진다. 그렇게 시작된 감정은 뚜렷한 문장으로 번역되지 않았다. 인칭이 사라진 언어로, 무책임한 시제로만 명멸했다. 사랑은 도래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고개를 돌리는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정확히 17도의 각도로 시선을 떨굴 때, 입술 가장자리가 휘는 속도, 셔츠의 단추를 풀지 않고도 느껴지는 체온 같은 것으로. 말보다 먼저 느껴지는 감정의 분화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관찰되었지만, 기록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어도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같은 바지, 같은 표정, 같은 발소리로 반복되는 출입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름은 사람을 구속하는 장치였다. 한번 불린 이름은 소유와 기대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 누구를 소유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사랑이 불려나가지 않기 위해 이름을 감췄다.



지독한 감정일수록 공공연하게 내보이지 않았다. 말하지 않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감정은 자주 말을 훼손한다. 말해버리는 순간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의견이 된다. 감정은 흐려져야 진실해질 수 있고, 의견은 단단해질수록 폭력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서로를 탓하지 않았고, 미래를 설정하지도 않았다.


사랑은 모서리 없는 구조물 같았다. 잡을 수 없지만 존재는 명확한, 무게는 없지만 밀도는 짙은. 손가락이 닿으면 흩어졌고, 눈을 감으면 떠올랐다. 불안을 견디는 일은 언제나 그 구조물 위에서 이루어졌다. 불안은 사랑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사랑 그 자체였다.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는 마음,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욕망이 결합한 형태.



시간은 종종 겹쳐졌고, 사건은 종종 중첩되었다. 누군가는 전화를 걸었고, 누군가는 창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 물을 마실 때, 다른 한 사람은 무언가를 버렸다. 이 모든 동작들이 서로를 모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어떤 것도 공모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약속도 없었기에, 그 모든 움직임은 오히려 더욱 조율된 연주처럼 들렸다.

어떤 날은 말을 건넬 이유를 찾지 못했고, 어떤 날은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날들은 대개 흰 종이에 땀자국처럼 스며들었다. 아무도 그것을 닦아내지 않았고, 닦아낼 필요도 없었다. 감정은 흘러야 비로소 감정이 된다. 고여 있는 감정은 의심과 오염을 부른다. 그래서 침묵조차 흐르게 두었다.



도시의 구조는 인간의 감정을 모방한다. 불필요하게 넓은 광장, 너무 좁은 계단, 곧장 떨어지는 절벽처럼 가파른 골목. 그 구조물 안에서 감정은 은밀하게 미끄러졌고, 사람들은 그 미끄러짐 위에서 관계를 미루었다. 사랑도 그랬다. 정면을 피하면서도, 절벽 아래로 향하는 발끝을 감추지 못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문득 투명한 유리컵이 깨진 자리에 손이 스쳤다. 피가 나지 않았는데 따뜻한 감촉이 남았다. 감정도 그와 같았다. 상처는 없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흘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떤 기척이 머물렀다. 그것은 만남이 아니었고, 결코 이별도 아니었다. 단지 통과된 순간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고백과 결단이 아니라, 체류의 방식이다. 얼마나 오래 머물렀느냐보다, 어떤 자세로 잠시 그곳에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그 사람은 이따금 숨을 죽인 채 바라보았다. 숨죽인 바라봄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말이었다. 말은 곧 사라지지만, 바라봄은 시선이 끊긴 이후에도 남는다. 그것은 흔적이 아니라 증거였다.

약속하지 않은 관계는 흔들리기 쉽지만, 동시에 부서지지 않는다. 기대가 없으므로 실망도 없고, 일정이 없으므로 지연도 없다. 그런 관계는 마치 한 줄기의 수증기처럼, 투명한 형체를 가진 채 공기 속에 머문다. 사람은 그것을 잡지 못하지만, 그 안을 통과할 수는 있다. 통과하면서 체온을 가져오고, 향기를 묻힌다. 그게 사랑이었다.



어느 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던 사람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공중전화는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받침대엔 이끼가 자라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래 서 있던 누군가는 그 공간을 계속 지켜보았다. 존재는 없었지만, 어떤 장면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은 누군가의 머무름을 바라보며, 말없이 감정을 공유했다.



정확히 헤어진 적도 없고, 다시 만나기로 한 적도 없었다. 감정은 유통기한이 없었고, 관계는 폐기되지 않았다. 단지 흐려졌고, 그 흐림 속에 가라앉았다. 바닥에 가라앉은 감정은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존재감만큼은 흐르던 모든 시간에 스며 있었다.



사랑은 결국 발생하지 않은 만남들로 이루어진다. 건너뛴 인사, 전송되지 않은 메시지, 부르지 않은 이름들. 그 부재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관계의 윤곽을 형성한다. 말하지 않았기에 계속 이어졌고, 약속하지 않았기에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주 사랑을 정류장으로 생각한다. 기다리고, 태우고, 다시 떠나보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정류장이 아니라 통로에 가깝다. 그저 통과하는 공간. 하지만 그 통과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꿀 만큼 큰 진폭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그 모든 것을 고요하게 뒤흔드는 비가 내리듯, 그러한 사랑은 적막 속에 흔들린다.



이름을 부르지 않은 관계가 가장 오래 남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잃을 이름이 없으므로, 사라졌다는 감각조차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감각조차 남지 않은 사랑은, 때때로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발화한다.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잊히지 않으면서도 고통스럽지 않은.


그래서 사람은 때때로 돌아본다. 우연히 창에 비친 얼굴을 보고, 저녁이 묻은 골목을 걷다 멈춘다. 그 순간, 아무런 인칭도 동원되지 않은 채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간다. 그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다만 더 이상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단 한 번의 만남도 약속하지 않고, 그 어떤 장면도 증명하지 않은 채. 그러나 모든 순간을 통과했고, 모든 마음을 통과했다. 감정이 가닿은 모든 곳에 존재했고,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완전해졌다.



사랑은 흔히 기억 속에 남는 장면이라 생각되지만, 실은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끝끝내 장면조차 되지 못한 감정들이다. 어떤 대화도 되지 못한 침묵, 어떤 서사도 되지 못한 시선, 어떤 이름도 획득하지 못한 존재. 그 미완의 순간들만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손상되지 않았고, 소유되지 않았고, 따라서 퇴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끝난 이야기보다, 끝나지 못한 관계를 더 오랫동안 품는다. 닫히지 않은 문은 계속 열려 있는 법이고, 열려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환영이 된다. 누구도 떠나지 않았고, 누구도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어떤 가능성이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사랑은 기억될 수 있다.


사랑의 무게는 그 완성도가 아니라 그것이 감춘 결핍에 달려 있다. 완전함은 끝내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설명된 감정은 모든 신비를 소진시킨다. 그래서 설명할 수 없는 사랑만이 끝없이 반추된다. 얼마나 사랑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끝내 말하지 못했는가가 그 감정의 진실을 드러낸다. 그렇게 해서 사람은 사랑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떠올리려 할수록 더 모호해지는 어떤 감각을 지닌다. 그 감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진다.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에 소멸하지 않고, 만남을 약속하지 않았기에 배신당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시간을 갖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초월한다.



모든 영원은 다만 연기된 우연이다. 가장 진실한 사랑은 단지 불발된 예감으로 남아, 평생에 걸쳐 마음 한 곳을 점유한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결국 부재의 기술이며, 부재를 견디는 감정의 우아한 변형이다. 이토록 조용히 침전된 감정은, 어떤 추억보다도 단단한 형태로 남아 삶의 밀도에 관여한다. 존재하지 않았기에 존재했던 사랑. 바로 그 역설만이, 시간을 지나는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위안이 된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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