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여백,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문장의 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밤이 좋았다. 그런날도 있었다. 손끝이 조금은 젖어 있고, 공기 속에 자고 있는 먼지가 가볍게 떠올라 희미한 형광등 불빛을 통과하면 마치 마감 없는 오후 같았다. 마감이 없다는 건,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설득이 없다는 건 몸의 긴장을 풀어도 좋다는 신호였다. 어딘가에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 그건 상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상상은 늘 현실보다 명료했다.
누군가는 퇴폐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예를 들어 커튼 틈으로 흘러든 새벽의 먼지, 다 쓴 향초의 부드러운 초심지, 유리컵에 남은 립스틱 자국 따위가 자극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착각은 그 자체로는 아름답지만,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보다는, 방금 벗어놓은 셔츠에 남은 체온, 헤어드라이어를 끈 직후 목덜미에 남는 바람의 잔상, 엘리베이터의 거울에 비친 누군가의 눈빛에서 미묘한 문장 하나를 읽어내는 것이 훨씬 오래 남는다.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아무도 완전히 알아차릴 수 없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한, 그러나 설명하지 않고는 전달할 수 없는 무엇. 감각은 설명되는 순간 휘발된다. 그러니까, 가능한 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몸 어딘가를 건드리는 문장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종아리 뒤쪽으로 흐르는 땀을 무심히 닦아내는 손길에는 어쩐지 시선이 따라붙었다.” 읽고 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마음 한쪽에 마치 어떤 풍경을 본 것처럼 생생한 정적이 남는 문장.
문제는 바로 그 정적이었다. 너무 선명하면 외설이 되고, 너무 모호하면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미묘함’이라는 균형을 찾아야 했다. 미묘함은 태도에 가깝고, 태도는 경험에 닿아 있었다. 경험이란, 겪은 적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지한 적이 있다는 기억의 깊이였다. 예컨대 고요한 오후,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사라진 체취를 기억하는 순간. 그 순간을 붙잡아 문장으로 바꿔야 했다.
하루는 붉은 레이스 브래지어를 보는 꿈을 꿨다. 꿈속의 브래지어는 노출된 것이 아니라, 얇은 블라우스 안에 비쳐 있었다. 중요한 건 레이스의 색깔이 아니라, 비쳐 보인다는 사실 자체였다. 레이스가 의미하는 것은 감추려다 실패한 것이고, 실패 속에서 드러나는 욕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욕망은 사람을 쓰게 만들고, 쓴 문장은 다시 누군가의 뺨을 붉히게 했다. 그 체인이 좋았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단어들이, 결국에는 누군가의 살갗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그렇게 ‘상상케 하는’ 글은 태어났다.
어떤 글은 읽는 동안 피부에 닿는다. 어떤 문장은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 살 속에서 피가 도는 감각을 일깨운다. 그런 문장을 쓰기 위해선, 사물의 촉감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잔잔한 와인의 점도, 셔츠 단추가 채워질 때의 마찰음, 반지 낀 손가락이 유리컵을 감쌀 때의 긴장. 그러한 디테일들은 독자가 자신의 기억 어딘가에서 비슷한 감각을 꺼내게 했다. 감각의 재현이 아니라 환기였다.
글이 감각을 환기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보고, 아, 이건 섹스에 관한 문장이구나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건 상실의 문장이구나 생각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게 하느냐였다. 감각적인 글은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머물게 할 뿐이다. 의미는 늘 체온보다 낮았고, 체온보다 낮은 의미는 오래 남지 못했다.
그래서 굳이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의 목덜미에서 번진 향을 쓰는 대신, 방 안을 채운 공기의 무게를 썼다. 뜨거운 입맞춤을 묘사하는 대신, 키스를 앞두고 살짝 벌어진 입술의 적막을 썼다.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부르는 장면만 남겨두었다. 장면은 단서였고, 단서들은 독자의 뇌 속에서 하나씩 연결되어 저마다의 내밀한 서사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감각적인 글이어야 했을까?
세상은 점점 더 뻣뻣해졌고, 언어는 점점 더 투명해졌다. 모두가 서로의 의미를 너무 빠르게 해석했고, 그 해석은 늘 설명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설명은 어떤 감각도 살려내지 못했다. 감각은 해석되기 전의 세계에서만 살아 있었다. 냄새는 아직 의미가 붙지 않았을 때 가장 강렬했고, 소리는 들린 직후보다 남겨진 침묵 속에서 더 오래 울렸다. 그러니까, 미묘함이란 결국 해석 불가능성의 아름다움이었고, 그 아름다움은 인간을 말보다 감각에 더 가까이 데려갔다.
누군가 그랬다. “정말 좋은 글은 읽는 사람을 다시 자신의 몸으로 데려다 놓는다”라고. 그 말은 옳았다. 감각적인 글은 이성에서 감각으로, 두뇌에서 피부로, 다시 몸에서 의식으로 거꾸로 흘러가는 통로였다. 몸은 종종 말보다 먼저 반응했다. 손끝이 먼저 떨리고, 혀가 먼저 말라붙고, 눈동자가 먼저 움직였다. 감각은 진실이었다. 진실은 말로 쓰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었다.
결국 쓰고 싶었던 글은 하나의 체험에 가까웠다. 손가락으로 따라 읽다가, 잠시 책을 덮고 혼자 조용히 웃거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게 만드는 글. 너무도 사소해서 언급할 수 없지만, 너무도 명백해서 모른 척할 수 없는 무언가. 상상은 언제나 그런 것에서 시작되었다. 실제보다 더 섬세하고, 현실보다 더 관능적이며,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미묘하게, 상상케 하는 글을.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