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선택이 만든 질서, 두 번째 선택이 흔드는 세계
첫 번째 선택과 두 번째 선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강이 흐른다.
전자는 물 위에 손끝을 스치는 일처럼 단순하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그에 따르는 결과를 깊이 상상할 필요도 없다. 반면 후자는 강 건너의 빛처럼 손에 닿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시야 한쪽을 차지한다.
결국 몸을 움직이는 건 종종 그 후자 쪽이다. 그것은 늦게 오는 생각, 나중에 떠오른 대답, 이미 끝난 대화의 뒷면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한 장의 사진 같다.
후자가 마음을 건드릴 때,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첫 선택에서 흘려보낸 장면들이 도로 걸어 들어온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후회의 형상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예감이나 직감, 혹은 아무 근거도 없는 확신의 모양을 띤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처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후자는 이미 시간의 맛을 본 존재다. 거기에는 낡음과 신선함이 이상하게 뒤섞여 있다. 낡음은 머뭇거림에서, 신선함은 그 머뭇거림이 끝난 순간에서 나온다.
지하철 역의 플랫폼 끝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다가오는 첫 열차에 몸을 싣는 것이 당연한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열차가 도착하자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손목시계의 시침이 잠깐 흔들리고, 발끝이 바닥의 노란 점자블록 위에 잠깐 멈췄다. 그리고는 아무 이유 없이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그 순간을 누가 옆에서 보았다면, 단지 지각한 승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달랐다. 두 번째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방금 지나간 첫 열차에 오르지 않은 이유들이 물속 기포처럼 하나씩 떠올랐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어떤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후자가 건드리는 것은 바로 이런 ‘미묘한 공백’이다. 처음과 두 번째 사이의 간격, 전자와 후자의 틈. 그 틈은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가늘지만, 그 안에 들어서면 전체 풍경의 배치가 달라진다. 전자는 항상 선명하다. 그것은 계획된 것, 예정된 것, 이미 승인된 세계다. 하지만 후자는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 그 불확실성은 곧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거리의 빛이 창문 유리에 스며드는 어느 저녁, 한 사람은 식탁 위의 두 잔 중 하나를 집었다. 앞에 놓인 잔은 이미 주인이 정해진 듯 보였지만, 손은 다른 잔으로 향했다.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선택 이후로, 그 잔에 담긴 물맛은 조금 더 차갑고 깊게 느껴졌다. 그것은 미리 준비된 맛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뒤바뀐 운명의 맛이었다. 후자가 건드릴 때 세상은 미묘하게 뒤집힌다. 뒤집힘은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문득 오래전에 본 한 장면이 떠오른다. 골목 입구에서 두 마리의 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는 먼저 짖었다. 그 소리는 예측 가능했고, 너무 익숙해서 놀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아무 반응 없던 다른 개가 짧게 울었다. 그 울음은 예상 밖의 것이었고, 그 울음 이후 골목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전자의 울음이 질서를 만들었다면, 후자의 울음은 그 질서를 깨뜨렸다. 깨진 조각들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세계는 다시 살아났다.
후자가 주는 감각은 종종 연애와 닮아 있다. 첫 번째 만남에서 이미 관계의 방향이 정해진 듯 보이다가, 두 번째 혹은 그 이후의 순간에 뜻밖의 변화가 스며든다. 그것은 오래된 문틈으로 들어온 빛처럼, 눈부시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후자는 대체로 늦게 도착하지만, 도착한 뒤에는 처음을 무력하게 만든다. 후자가 주는 것은 대체물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문법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흐른다. 첫 선택에서 이미 먼 길을 온 줄 알았는데, 후자가 나타나면서 그 길이 전혀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깨달음은 종종 당황스럽지만, 동시에 해방감을 준다. 후자는 전자의 그림자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빛을 가진 또 하나의 태양이다. 두 개의 태양 아래서는 그림자의 길이도, 방향도, 색조도 변한다.
누군가는 후자를 회피한다. 그것은 이해할 만하다. 후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안정된 질서를 깨뜨리고, 이미 만들어진 구조를 부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파괴는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장을 쓰기 위해 오래된 문장을 지우는 행위와 비슷하다. 지우는 순간의 허전함을 견디면, 그 자리에 전혀 다른 문장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 문장은, 종종 처음보다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다.
후자가 건드릴 때, 손끝이 잠깐 떨린다. 그 떨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미묘한 기대다. 아직 다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넘길 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설렘. 전자가 다루는 것은 현재와 과거지만, 후자는 미래를 건드린다. 미래는 항상 불확실하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후자는 단순히 ‘나중’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첫 시작보다 더 조용하고, 더 은밀하며, 더 오래 지속되는 시작. 후자가 마음을 건드릴 때, 세계는 다른 각도로 기울어진다. 그리고 그 기울기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다시 묻는다.
그 질문은 오래도록 남는다. 마치 이미 지나간 계절의 냄새가 갑자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불시에, 설명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후자가 건드린 순간은 언제나 소리를 지우고 찾아온다. 눈앞의 사물들이 제 그림자를 놓치고 허공에 매달린 듯, 모든 것이 미묘하게 무중력 상태에 빠진다. 유리창에 부딪힌 빛이 흩어지며 방 안의 공기를 바꿔놓고, 테이블 위의 컵 속 물이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일렁인다. 그 물결은 손끝으로 느낀 적 없는 진동이다. 그것이 닿는 방식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대신 그 온도는, 오래전 한 여름 저녁에 잠시 스친 바람의 결이나, 아무도 없던 계단참에서 맡았던 먼지 섞인 햇빛의 냄새처럼,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에 가깝다.
그 기척이 스며드는 순간, 피부는 사소한 것들에 과도하게 반응한다. 창문 밖의 나무 이파리가 아주 미세하게 뒤집히는 방향, 신발 끈이 발목을 스치는 압력, 옷섶 안쪽에서 갇혀 있던 공기의 느릿한 이동. 이런 사소한 감각들이 동시에 살아나면서, 현실이 평소보다 더 선명해진다. 그러나 그 선명함은 마치 꿈에서 갓 깨어났을 때의 그것처럼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사진처럼, 시간이 지나면 더 흐릿해질 것이라는 예감을 스스로 안고 있다.
후자가 건드린 세계에서 사람은 말보다 호흡을 먼저 기억한다.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순간이 깨질까 두려워 침묵한다. 침묵 속에서, 공기의 무게와 피부의 결이 더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이 마치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정렬된다. 그러나 그 준비는 완성되지 않는다. 후자의 세계는 결코 완결로 가지 않는다. 대신 한 걸음 전에서 멈춰,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문턱에 사람을 세워둔다.
그 문턱에 서 있는 동안, 뇌 속 어딘가에서 오래된 기억의 서랍이 천천히 열린다. 그 안에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표정, 반쯤만 들었던 문장, 손끝에 잠시 묻었다 사라진 체온이 들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전자의 영역에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후자가 건드린 것은 결국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세계’다. 손에 쥐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는 세계. 그 세계의 공기는 서늘하고, 빛은 오래 머문다. 그 빛 속에서 사람은 다시 한번, 이미 지나간 장면을 완전히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 끝났을 때, 남는 것은 침묵과 약간의 떨림뿐이다. 그러나 그 침묵과 떨림이 오래도록 몸속에 잔향처럼 남아, 앞으로의 선택들에 작은 균열을 낸다. 그 균열이 자라는 속도는 느리고,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그 균열이 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다른 세계를 불러올 때가 온다. 후자가 건드린 순간은, 바로 그날을 조용히 예고하는 신호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러나 분명히 울려 퍼지는 신호.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