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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 문장을 쓰는 방식

나는 매일 오늘의 우울을 기다려.

by 적적

세상에는 갑자기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 고요가 마치 거대한 유리관 속에 갇힌 듯한 정적을 낳는다. 창밖의 나무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사람들은 걷고, 시계는 계속 움직이지만, 그 모든 움직임이 어딘가 조금씩 멈춘 듯한 착각이 든다. 우울은 바로 그 순간 틈입한다. 아무 예고 없이, 그러나 매번 너무 정확하게. 마치 오랜 시간 벽 뒤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때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드는 감정처럼.



그 감정은 종종 비극처럼 오해된다. 하지만 우울은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문을 여는 열쇠에 가깝다. 표면의 반짝임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내면의 깊은 그림자. 그 그림자 속에서만 말의 형태가 선명해진다. 글이란 결국 빛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 사물의 형태를 더듬는 일에 가깝다. 우울은 그 어둠을 만들어주는 가장 정교한 배경이다.



사람들은 우울을 회피하려 한다. 그것은 불편하고, 무겁고, 생활의 리듬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혹은 언어의 결을 느끼는 사람에게 우울은 때때로 가장 생생한 자극이 된다. 삶의 의미를 되묻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 아니라 결핍이다. 어떤 결핍은 침묵 속에서 새로운 문장을 낳는다. 그 문장은 종종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러나 누구보다 정확하게 세상의 진심을 가리킨다.



우울은 세상의 잡음을 걸러내는 필터 같은 것이다. 그 속에서는 사람들의 웃음도, 도시의 불빛도, 사랑의 고백도 모두 다른 질감으로 바뀐다. 그리움과 피로, 두려움과 회한이 뒤섞인 묘한 온도의 세계. 그 세계 안에서 사소한 사물들이 돌연 상징으로 변한다.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의 균열, 낡은 코트의 단추, 창가에 매달린 먼지 한 조각까지도 말이 된다. 그 말들은 슬픔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다. 존재가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내뿜는 미세한 신음들.


글을 쓰는 일은 본질적으로 침묵을 번역하는 행위다. 그런데 그 침묵의 가장 짙은 형태가 바로 우울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 내면의 저수지에 오래 머물다 응축될 때, 문장은 비로소 자신만의 색을 얻는다. 기쁨이 쓰게 하는 글은 종종 현란하지만, 우울이 쓰게 하는 글은 언제나 정직하다. 그것은 화려한 표현을 거부하고, 다만 한 문장의 호흡으로 진실을 견디게 만든다.



언젠가 자신만의 우울을 만난다. 그것은 운명처럼, 혹은 예술의 통과의례처럼 찾아온다. 그 우울 앞에서 어떤 이는 붕괴하고, 어떤 이는 침묵하며, 또 어떤 이는 그것을 벼린다. 벼려진 우울은 부싯돌이 된다. 그 부딪힘에서 불꽃이 튀고, 그 불꽃이 문장을 밝힌다. 불꽃은 잠깐이지만, 그 찰나의 빛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어두운 것을 좋아하느냐고. 그 질문은, 왜 밤이 필요한지 묻는 것과 같다. 모든 낮은 밤으로부터 태어난다. 어둠이 없었다면 빛의 윤곽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울이 없었다면 사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는 상처의 잔열 속에서만 생겨난다. 그것은 치유가 아닌 지속의 감정이다. 멈출 수 없기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계절의 변화처럼 온다. 여름의 끝자락, 바람이 묘하게 싸늘해질 때, 사람들의 얼굴에 스치는 미세한 그늘. 누군가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가을이라고 부르고, 또 누군가는 외로움이라 부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저 ‘깊어짐’에 불과하다. 감정이 스스로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 우울은 그렇게 인간을 깊게 만든다. 깊이 없는 존재에게는 문장이 없다.



우울의 가장 큰 힘은 침묵이다. 침묵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듣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대화 속에서 의미를 찾지만, 진짜 의미는 대화가 끝난 뒤에 남는 공백에 있다. 그 공백의 온도, 그 무음의 리듬이 글의 숨결이 된다. 언어가 탄생하기 이전, 존재가 자신을 느끼는 순간. 그곳이 바로 우울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울이 늘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의 우울은 단단한 금속처럼 차갑고, 또 어떤 날의 우울은 물처럼 미끄럽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을 때, 문장은 점점 더 투명해진다. 불안과 고독, 허무와 그리움이 뒤섞인 채 하나의 빛으로 응결된다. 그 빛은 미세하지만, 오래 남는다.



가끔은 그렇게 느껴진다. 마치 우울이 먼저 글을 쓰고, 인간은 다만 그 문장을 베껴 적는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 우울이 문장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인간은 그 흔적을 뒤따라가는 존재. 그렇기에 어떤 글은 쓴 사람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가 쓴 것처럼 느껴진다. 우울은 인간이 아닌 감정의 필체로 쓰인 문학이다.



세상은 점점 밝아지지만, 그 밝음 속에서 오히려 어둠은 더 또렷해진다. 지나치게 환한 조명 아래에서는 사람의 표정조차 낯설다. 우울은 그런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그늘의 미학’이다. 그 그늘 속에서 인간은 다시 사유하고, 회복하고, 쓰게 된다. 글은 결국 어둠을 견디는 방식의 예술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감정을 빠르게 소비하기 시작했다. 우울을 느낄 시간도, 그 감정의 결을 살필 여유도 사라졌다. 하지만 문장은 다르다. 문장은 느림을 필요로 한다. 우울은 그 느림의 언어다. 그것이 스스로를 가라앉히고, 사물의 내부를 관찰하게 만들며, 세상의 모든 것에 잠시 쉼표를 찍게 한다. 그 쉼표가 없다면 문장은 숨을 쉴 수 없다.


우울은 글을 쓰는 가장 아름다운 부싯돌이다. 그것은 마음을 찢는 고통이 아니라, 마음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다는 것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고, 느낀다는 것은 언어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이다. 우울이 불러오는 정적 속에서 언어는 다시 태어난다.



때로는 그 정적이 너무 깊어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멈춘 듯하다. 그러나 그 침묵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맑은 불꽃이이 찾아온다. 그것은 슬픔의 목소리가 아니라, 생의 잔향이다. 우울은 그렇게.



문장과 인간 사이의 가장 오래된 대화가 된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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