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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셰프.

누구도 주문하지 않은 비공식 만찬

by 적적


첫눈보다 늦게 식탁을 차렸다. 모서리가 차갑게 식은 골목과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 검게 가라앉은 해 질 녘의 냄새가 한꺼번에 덮쳐오자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겨울을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말없이 ‘겨울 고독 정식’을 주문해 들고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계절 한정 메뉴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감정의 구성물이며, 개인에게만 나오는 비공식 만찬이다. 이 정식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순서로 서빙되지 않으며, 매번 형체와 맛이 변하는 불안정한 코스 요리다.


첫 번째 접시엔 ‘저녁의 공기’였다. 도시의 빌딩 사이로 흐르는 바람은 마치 오랜 시간 냉장고 속에 묵혀둔 유리잔을 만질 때처럼 차갑게 손끝을 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체온까지도 희미하게 얼려버리는 듯한 이 공기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메인 디쉬를 미리 떠올리게 했다. 따뜻함보다 차가움이 먼저 혀를 자극하는 희귀한 사전 코스. 아무 대화도 필요 없는, 다만 숨을 내쉬는 순간에만 맛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풍경의 맛. 식당의 테이블이 아니라 거리의 그림자가 접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로 제공되는 것은 ‘지나친 실루엣들의 국물’이었다. 건물 유리문에 반사된 사람들의 얼굴과 목덜미, 모자를 눌러쓴 머리 뒤의 미세한 흔들림까지, 그 모든 것이 뜨거움 없이 끓는 국물처럼 기묘한 울림을 남겼다. 누군가는 퇴근 후의 무력함을 담고 걸어갔고,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전화 통화 속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단 한 번 스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얇은 필름을 건드렸고, 그 흔들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계면활성제처럼 하루의 감정을 분해하며 퍼져나갔다. 고독은 늘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국물 삼아 자신의 속을 데워왔다.


세 번째 접시는 ‘익지 않은 기억의 나물’이었다. 오래전에 끝난 대화의 잔상, 더 이상 오지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 겨우 유지되던 관계의 마지막 질감 같은 것들이 허리에 걸린 듯 불쑥 떠올랐다. 그것들은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아 씹을 때마다 섬유질이 뻣뻣했고, 혀에서 오래 잔향을 남겼다. 기억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며 부드러워질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겨울이 되면 오히려 선명하게 잔인해졌다. 추위는 사라진 줄 알았던 풍경을 다시 되살려 접시에 얹어두는 광기에 취미를 갖고 있었다.



메인 요리는 늘 ‘침묵의 스테이크’였다. 날 선 커트러리 없이도 잘려 나가는 이 고기는 특이하게도 온도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식어 있는 건지, 원래 이런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미묘한 온도.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스쳐 가는 것만으로도 미약한 열기가 다시 표면에 피어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서로를 지나치지도 마주 보지도 못하는 상태가 만드는 가장 복잡한 미식이었다. 하지만 이 스테이크는 씹을수록 감정의 결이 잘게 부서져 어떤 정서적 포만감을 주는 대신, 이상한 허기를 만들어냈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은, 고독 고유의 식욕.

잠깐의 숨을 돌리게 해주는 사이드 메뉴로 ‘창밖의 조명 샐러드’가 따라왔다. 건물 외벽에 매달린 LED 조명과 상점 간판이 뒤섞여 겨울밤공기에 차갑게 빛났다. 샐러드에 드리워진 드레싱처럼 조명은 삶의 다양한 감정을 은근히 덧칠해 주었다. 어떤 조명은 지나치게 화려해 오히려 피곤했고, 어떤 조명은 필요 이상으로 희미해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빛들은 어떤 설명도 없이 인간의 외곽을 부드럽게 덮어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잠시나마 고독은 식어갔다.


디저트는 언제나 ‘잠들지 못한 불면의 설탕 가루’였다.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방, 창문 밖에서 울리는 먼 자동차 소리, 반쯤 잠든 도시의 호흡이 설탕 가루처럼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고, 잠들지 않은 시간은 오히려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불면은 늘 달콤해 보이지만, 정작 입 안에 넣으면 곧바로 쓴맛으로 변했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코스였다. 고독의 요리를 마무리하는 것은 항상 어떤 형태의 쓴 단맛이었다.

‘겨울 고독 정식’이 완전히 끝나고 난 뒤에는 묘한 포만감이 남았다. 배가 차는 종류의 포만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경한 감정들이 몸 어딘가에 붙어 있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종류의 묵직함에 가까웠다. 고독은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겨울이 그 정체를 가장 선명히 드러낼 뿐이다. 이 메뉴는 누구에게나 제공되지만, 각자만의 고유한 재료로 조리된다. 어떤 사람은 지나친 후회를 더 넣고, 어떤 사람은 냉랭한 해방감을 더한다. 이 정식만큼 개인적이고 변덕스러운 식사는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공통된 점이 있다면, 이 정식은 결코 혼자 먹는 식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독은 늘 사람들을 태연하게 무리 짓게 했다.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도,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각자가 품은 고독은 묘하게 서로를 비추는 조명처럼 작동했다. 다른 사람의 고독이 어떤 형태인지 상상하게 만들고, 또 그 상상이 서로를 묶어두는 또 다른 연결점이 되었다. 그래서 겨울의 고독은 차갑지만, 완전히 냉혹하지는 않았다. 그 식감은 누군가의 마음을 스쳐 가는 순간마다 미세하게 온도가 바뀌었다.



그래서 매년 새롭게 조리된다. 올해의 고독은 작년 것보다 조금 단단하고, 조금 더 은은하며, 어쩌면 이전보다 덜 두려울 수도 있다. 계절은 늘 같은 듯 보이지만, 감정의 맛은 해마다 다르게 변했다. 이 정식은 스스로를 잊지 않게 하고, 동시에 지나간 감정의 잔해를 조용히 치워주는 기능을 한다. 아무도 주문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식탁에 놓이는 계절의 비밀 식단. 그리고 이 메뉴를 마지막까지 먹어낸 사람은, 언제나 다음 계절로 무사히 넘어갈 힘을 얻게 된다.



겨울은 그렇게 고독을 조리해서 사람들에게 내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접시를 비우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또 다른 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독은 오래 머물지만 절대 정착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순간에만 등장해 마음의 식욕을 일깨우고, 다음 계절이 오는 길목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 자리를 따스한 봄의 바람이 채우기 전까지, 겨울의 식탁은 계속해서 차갑고 뜨거운 감정의 코스를 이어간다.

이 정식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언제나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고독은 제철 음식이지만, 인간을 위한 요리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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