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래 Oct 17. 2022

세상에 지친 당신에게,

♪ Let me out

무슨 일로 생에 지쳤던 거야.

어떤 일이 널 눈물 나게 했던 거야.

어째서 그렇게 힘들었던 거야.


괜찮아, 이제 말하지 않아도 좋아.

이리 와, 너의 지옥까지 안아줄게.




아빠는 자신이 바라는 딸의 모습을 스케치하곤 했는데, 그의 유려한 선에서 내게 맞는 선을 찾은 적은 없었다. 그가 그린 딸의 형상은 아름답고 완벽했지만, 내 실력은 몇 년이 지나도 연필을 처음 쥐여 보는 아이처럼, 선에서 벗어나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여름 초입, 내 받아쓰기 점수를 본 아빠는 처음으로 본인의 스케치가 필요하다 여겼다. 그의 방법은 간단했다. 6개월 동안 <엄마 곰의 사랑>이라는 책의 문장을 하루에 10 개씩 받아쓰기.

아빠는 야속하게도, 계획한 일을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었다. 6/16(월)…6/20(금), 주말은 쉬고, 다시 6/23(월)… 날짜는 차곡차곡 쌓였다. 이때 공부한 덕분에 맞춤법이 틀리는 일은 별로 없다.


우리는 아빠가 만든 가족 웹사이트[1]에 매주 독후감을 올려야 했다. 굳이 만화책을 봐야 한다면 <먼 나라 이웃나라>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같이, 지식을 담은 책이어야 했다. 현재도 독후감만 올리는 SNS를 6년째 운영하는 것은 옛날부터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덕분에 아이 엄마인 지금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2살부터 1년에 걸쳐, 컴퓨터 자격증인 워드프로세서, 정보처리기능사를 따야 했다. 덕분에 문서 작업은 학창 시절 나의 유일한 특기였다.


18살에는, 아빠가 컴퓨터 프로그래밍 문제를 푸는 대회인, 정보올림피아드에 나가라 권유했다. 하지만 그 시절 내 뇌는 머리에 있기보다는 성기에 붙어있길 좋아하는 편이었다. 잔머리를 얼마나 빼야 얼굴선이 예뻐 보이는지, 남학생을 유혹하려면 어떤 멘트가 먹힐지 궁리하느라, 프로그래밍은 머리에 들어오는 족족 휴지통에 버렸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을 거부할 때마다, 험상궂은 아빠의 표정과 주변의 공기 분자가 아령처럼 무거워지는 듯한 분위기가 떠올랐다. 엄마에게 대회에 나가지 않게 아빠를 설득해 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엄마도 나처럼 아령을 느꼈다. 아빠의 호통은 엄마의 엄마가 휘둘렀던 폭언을 떠오르게 했다.


싫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지만, 아빠는 결국 알게 됐다.

이 아이를 자신의 작품으로 내세우기엔 글렀다는 걸.

아빠의 자식농사를 망쳤다는 좌절 덕분에 나의 자유는 꽃피웠다.




21살이 되었고,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서 엄마 친구 A는 말했다.

“너는 첫째니까 울면 안 돼. 동생도 있으니까 씩씩하게 버텨야지.”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 만에 엄마 친구 B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가 생전에 500만 원을 빌렸는데, 몸이 아파 병원비가 필요하다며, 딸인 내가 대신 갚아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천사였지만 채무자이기도 했다. 은행도 죽은 자에게 독촉장을 수차례 보냈다. 딸이 엄마의 벌려 놓은 손을 잡아주려면 울 시간이 없다는 걸, 장례식에서 위로하던 A는 알았었나 보다.


PC방 주말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5만 원에서 10만 원씩 B에게 드렸다. 어느 날은 한 번에 많이 보내주면 안 되냐며 짜증을 내셨다. 나도 B의 안부가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다. 연락이 오면 그가 살아있어 기쁘기보다는 구역질이 났다.

타인의 불행은 내가 살아내지 않기에 때때로 우리는 타인에게 가혹하다. B 덕분에 몸은 죽어도 빚은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언젠가, 생이 버거워서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 없이 울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적절한 위로를 찾지 못했다. 그 마음을 진심으로 알게 되려면, 6년이 지나고, 아이 키우기 버거워서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 없이 우는 날이 찾아와야 했다.

엄마는 한 번도 빚이 얼마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 날 48평에서 18평으로, 18평에서 반지하로 이사를 가야 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중학생 때 아토스라는 모델의 빨간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 걸 친구들이 보면 부끄럽지 않냐고 물었을 때처럼, 엄마는 작은 집으로 가는 것이 딸의 성장에 상처를 줄까 봐 조심스러웠다.

나는 왜 이사를 가야 하는지, 엄마는 작은 차를 타고 다녀도 괜찮은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사를 가라니까 갔고, 작은 차는 타라니까 탔다. 그만큼 무심했다. 엄마를 잃게 된 건 그 무심함 때문인 것 같았다.


속마음을 꽁꽁 숨겨온 엄마가 밉기도 했지만, 그래, 나 같아도 철없는 애한테 돈 얘기를 해봤자 대책이 있을 리 없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아픔을 안아주지 못했던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나를 용서해 줄 유일한 사람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그래서 내가 망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나를 벌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2년이 지났다. PC방 아르바이트로 생활비가 충족되지 않자, 시급을 2배로 준다는 공고를 보고 모던 바 아르바이트를 추가했다. 새벽까지 일해서 항상 늦잠을 잤고, 대학에서 오전 수업이 있을 때면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탔다. 출석하는 것조차 힘이 들면, 결석을 4번 넘게 해서 F를 받고 재수강을 했다.


하루는 기적적으로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탔다. 카드를 찍었는데 단말기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기사님은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은땀이 났다. 동전지갑을 열어보았다. 질소만 포장된 과자봉지 같았다.


결국 버스 계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택시비로 2만 원씩 날리느라 버스도 탈 수가 없는 멍청한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눈물이 가로막아 어디로 걷고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고개 들 힘도 없어서 땅만 보고 앞으로만 걸었다. 일을 추가했는데도 1,050원이 없어서 학교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게, 학자금 대출로 생활비까지 빌리는 현실이, 살아도 살아도 끝이 없는 불행에 좌절했다. 덕분에 편해지려고 쓰는 돈이 쌓이면, 눈덩이만 한 불편이 따라온다는 것을 배우긴 했지만.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취직하려고 이력서를 적고 보니, 아빠가 나의 10대를 장악할 때 만든 스펙이 커리어의 80%를 차지했다. 13살에 딴 자격증 말고 내세울 것이 없다니, 한심해서 눈물이 났다.

자유로웠을 때의 나보다 아빠의 꿈에 맞춰 살던 내가 더 성공적인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홀대했던 보복으로 시간은 어퍼컷을 날렸고,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자괴감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아빠가 어릴 때 이것저것 시킨 덕분에 백지였을 이력서에 몇 글자라도 적을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적을 내용이 없었을 것이다.




장황하게 이전의 아픔을 나열한 이유는, 이 이야기들에 흩뿌려져 있는 ‘덕분’이라는 글자를 찾아보길 바라서다. 나는 드넓은 자괴감의 모래사장에서 ‘덕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조개껍데기를 줍기 시작하고부터, 아픔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덕분’을 주워 담았더니 아픔 안에서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우울의 바다를 바라보는 당신도,

해변을 걷다 ‘덕분’이라는 예쁜 조개껍데기를 만나길 바란다.


당신은 앞으로도 곳곳에서 ‘덕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픔과 좌절보다 긍정과 사랑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꾸준히 좋아져만 갈 것이다.




[1] 아빠가 손수 만든 웹사이트. 가족사진을 업로드할 수 있는 갤러리 게시판과 독후감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 있는 웹사이트였다.




ⓒ mikoto.raw, Pexels

이전 09화 고화질로 간직하고 싶은 당신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