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은 매일이 고개를 넘는 곡예를 하는 일이구나
어둠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 안 어딘가에 나를 잠식하는 보이지 않는 구멍을 느꼈다.
남편의 죽음은 안전사고였다. 그 일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날, 단순히 내 남편의 운세가 나빴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무책임한 행동들이 쌓여 만들어진 사건에 하필 내 남편이 희생된 건 아닐까. 수시로 그런 질문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들숨과 날숨으로 고뇌를 흩어냈다.
그때의 나는 침묵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남편을 잃고 삼십 일 난 갓난애가 품에 있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당시의 내 모든 판단들은 최선이었으나, 옳은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내 모든 결정과 생각이 의심스러웠으므로 아무것도 해선 안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입이 있어 아주 오래도록 떠들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어 억울했다. 남편은 원체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타인을 배려하느라 곧잘 자신에게 소홀했다. 아마 그의 죽음 뒤엔 그런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묵묵한 성실함과 책임감, 누군가를 향한 배려 같은 것들. 그런 좋은 것들이 내 남편을 죽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내 남편이 모든 걸 뒤집어쓰는 일만은 필사적으로 막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그날 집을 나서는 그를 붙잡아 지켜내진 못했지만 명예만큼은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그 외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았다. 그것은 조금 비겁했을 것이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금세라도 죽고 싶던 시간들을 아득바득 견뎌 살았다. 어린 자식을 홀몸으로 건사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였으나 그 고된 시간 사이사이에 아이의 웃음이 번지는 순간들이 기쁨이 되어 나를 살게 했다.
그러는 중에도 남편의 죽음은 계속해서 내 마음을 헤집었다.
누군가가 죽었고 분명하게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음에도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억울한 사람들뿐이었다. 누구 한 사람만 명백히 잘못한 것이 아니라 모든 악이 모여들고 겹쳐 만들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사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결국 그 증오와 원망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고 되뇌며 하루, 또 다음 하루를 살아냈다.
무엇보다 더욱 필사적이었던 것은 내 어린아이의 세상을 음울한 것들로부터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의 세상이, 아빠가 없어도 햇빛처럼 빛나는 세상이기를 바랐다.
잠든 아이의 가냘픈 콧김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난다. 어둠을 가르는 고요하고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나를 어두운 상념 속에서 건져 올렸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남편을 위해 조금 더 나은 결정들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대도 그 모든 결정과 행동들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안다. 후회하며, 후회하지 않는다. 원망하나, 원망하지 않는다.
사는 것은 매일이 고개를 넘는 곡예를 하는 일이구나.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어느 날 엎어져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울겠지. 그러고는 신기하게도 다음날 아침 점심 저녁까지 세끼를 다 챙겨 먹고 깔깔 웃기도 하고 잠도 잘 자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