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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Feb 18. 2024

심심할 땐 사주풀이

나는 육아를 못하는 사주입니다

결혼 전엔 재미 삼아 사주를 두 번 정도 봤다. 아이를 갖기 위해 애쓰던 때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러 한번 가봤 아이를 임신한 뒤엔 무료함을 달래려고 사주풀이 책을 샀다.

십이지신은 만화영화 '꾸러기수비대'를 봤을 때부터 좋아하는 소재였고, 육십갑자는 혈액형별 성격 분류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거기에 자연의 이치를 담아낸 오행이라니, 학창 시절 판타지와 무협소설에 푹 빠져 지내던 나에게 사주는 현실과 통계학을 기반으로 한 실생활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주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 때, 나는 또 사주를 보러 갔다. 내뭐를 원했던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에 뚜렷하게 존재하던 한 사람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일 같은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이 그런 운명이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지, 인과를 설명하기 어려운 삶과 죽음에 어떤 공식을 적용해서라도 받아들여야만 했고, 누구를 원망하기에 애매하고, 원망하지 않기에 억울한 마음을 무엇으로라도 달래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목놓아 울었다. 상담가도 눈물을 찍어 닦아낼 만큼 울었다.  싼 값에 굿을 해주겠다고  굿을 하지 않으면 남편의 혼이 해코지를 할 것이라고 했다. 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그곳을 나왔다. 한편으론 남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내 마음을 달래기 위 굿이라도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잠깐 뇌리를 스쳤지만 나는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사주 공부를 했다. 겉핥기 중에서도 겉핥기로 했다. 갓난아이 육아를 하면서 각 잡고 공부할 만큼은 안 됐고 블로그나 유튜브를 잠깐씩 봤다. 한자나 좀 외우는 정도였는데 어디 사주팔자고 명리학이고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조금 아는 척할 만큼은 됐다.


지난 3년 동안 거의 10번 정도 사주를 보러 갔다. 태어난 일시가 바뀌는 게 아니니 사주는 당연히 똑같고, 그래서 듣는 말들도 다 비슷했다.  주로 가슴이 답답하고 삶이 막막할 때 사주를 보러 갔는데, 심리상담 같은 거였다. 그냥 가서 울고 오면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사주 한번 본다고 상황이 특별히 나아질 것도 없는데, 희한하게 아갈 힘이 생겼다.


의지할 만한 절대적인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게 나한텐 신이 아니라 사주명리학이었을 뿐이다. 당신의 팔자와 내 팔자가 정해져 있고, 그러나 그게 삶에 특별히 좋고 나쁜 게 아니라 주어진 여건이나 내 노력 여하에 따라 무언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됐다. 분명한 척 불분명했다. 그냥 세상이 그랬고, 그게 다 내 잘못아니라 다행이었다.

특히 나는 내가 뿌리가 단단한 사람이라는 말이 좋았다. 고집이 세단 소리긴 한데, 왠지 그게 내가 어떻게든 역경을 딛고 단단하게 잘 살아갈 수 있사람이라는 말처럼 들 몇 번이고 그 말을 되새김질했다.

나는 뿌리가 단단한 사람, 휘청거리며 넘어져도 내  단단한 뿌리는 언제고 푸릇한 잎을 당겨 올릴 것고.


최근에도 가슴이 답답한 일이 있어 사주를 보러 갔다.

꼭 애 때문에 답답한 건 아니었는데 불쑥 내 사주에 자식운이 없단다. 자식운이 없다는 건 자식이 없단 소리가 아니고 자식이 있으면 육아에 소질이 없단 뜻이란다. 어머 맞아요 맞아요.

육아에 소질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남이 육아에 대해 훈수를 둘 때마다 잘 끌려 다니는 것이지, 오 네 진짜 그래요.


개인적으로 육아에 있어서 제일 필요한 자질은 인내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없는 편이다. 조금만 내 기준에 벗어나면, 내 기준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불꽃처럼 타오른다. 타다 남은 재를 두 손에 쥐고 후회도 많이 하는 편이다.

상담가는 내게 애한테 너무 엄격한 엄마가 되려 하지 말고 친구 같은 엄마가 되어 주라고 하였다.  친구 같은 엄마가 되려다 만만한 엄마가 되면 어쩌 걱정이 되었다.


원체 걱정이 많은 편이기도 한데 육아에 대해선 특히나 줏대가 안 선다. 무서운 엄마가 되어 아이를 휘어잡아야 할 것 같으면서도, 이 세상에 아이가 믿고 의지할 데가 없어 외로워질 봐 두려웠다.

내 아이는 엄격하고 무서운 엄마보단, 세상에 치여 외롭고 지쳤을 때 댈 수 있는 장소가 더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내가 그 두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없다면 내 아이에게 더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게 맞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밥 먹을 때 수저를 입에 물고 장난을 치거나 이 닦으면서 물장난을 치는 아이에게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결국 참지 못해 바락 화를 내고 말았다.


아이를 적당히 방목해야 한다던데, 그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무서운 엄마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엄마가 되고 싶은 건데, 육아는 정말 어렵다. 육아책도 보고 유튜브도 보고 전문가가 육아방식을 코치하는 프로그램도 한동안 시청했다. 방송을 볼 땐 바로 저거다 싶은데 텔레비전을 끄고 내 육아에 적용하려 하면 차질이 많다.


매일 밤 반성과 사과의 연속이다.

-엄마가 아까 너무 크게 소리쳐서 미안해. 민이가 숟가락 물고 장난치다가 다칠까 봐 그런 거야.

그러자 만 세 살 아이가 마치 해심 넘치는 어른인 양 의젓하게 대답했다.

-괜차나요. 래도 .


아무래도, 나보다는 내 아이가 육아를 잘하는 사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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