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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Feb 25. 2024

어느 삶에나 반짝임이 깃든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보름달처럼 휘황해지는.

내 삶은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부족함 없이 살고 싶었다. 남들 다 가진 건 나도 갖고 싶었고, 남들이 다 하는 건 나도 하고 싶었다.

아마 그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했던 게 단순히 여유로운 삶이었다면 어쩌면 아이 낳지 않았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믿을 만한 배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자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풍경을 상상했고, 서로를 지극하게 섬기는 부부를 바라보며 아이의 정서가 단단해지는 것을 기대했다. 아주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조금씩 먹고살만해지는, 그러면서도 매일매일이 무언가로 충만해지는 삶을 원했다. 배려하고 배려받고, 존경하고 존중받는 삶. 그건 아주 평범하고 어려웠다. 어찌 보면 내가 원했던 것은 동화 같은 삶이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내가 꿈꾸던 삶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마치 보트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다가 보트 바닥이 통째로 내려앉은 것 같았다. 나는 빈 공간을 붙잡고 오랫동안 허우적 댔다. 내가 원했던 것은, 아이 때문에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아 함께 키우는 일이었는데 남편이 죽자 모두가 내게 아이 때문에라도 살라 했다. 그게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커뮤니티에 산모와 아이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둘 중 누구를 살릴 것이냐는 글이 올라왔다. 거기엔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다. 아이를 낳기 직전이라면 당연히 산모를 살리겠지만 이미 낳고 키우는 중인 아이와 아이 엄마 중 선택하는 것이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선택하겠다는 댓글이었다.


다면 어땠을지 부질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십여 년간 공유하면서 둘도 없는 단짝이 된 남편과 태어난 지 삼십일 남짓 된 어린 아기, 만일 그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면, 그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어떤 사건보다도 잔인했을 것이다.


그를 잃은 여름은 매일이 습하고 무거웠다. 죽음이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나는 해파리처럼 울었다.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누운 말랑하고 무력한 생명체가 내가 우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 없이는 내 삶도, 저 말캉한 어린것의 삶도 아득하기만 했다. 무엇이어도 당신과 바꿀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내 생의 많은 부분을 당신에게 내주었고, 그리하여 당신은 내 전부였으므로. 그 순간에 악마가 나타나 당신을 돌려준다고 했다면 나는 냉큼 뭐라도 건을 것이다.


다행인지 뭔지 악마는 나타나지 않았고 시간만 멍청하게 흘렀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다. 조그맣고 쌀알만 한 이가 돋더니 엄마, 아빠를 발음했고 뒤집어 네 발로 기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몸을 일으켜 직립보행을 시작했다. 아기가 분명하게 나를 알아보고 내게 온마음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한 때, 나는 무심결에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이 아이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언젠가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배우자를 최우선순위로 두겠다고 다짐한 것이 우스워질 정도로 이 아이가 소중해졌다. 그것이 미약하게 태동하기 시작한 내 모성의 발현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모성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거룩한 단어는 희생을 강요한다.  희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데 '아기가 주는 행복'이란 건 참 추상적이고 환상적이다.


어느 날 사무실 미혼 직원이 내 책상에 붙어있는 아기 사진을 보고 물었다.

"힘들 때 아기 사진을 보면 정말 힘이 나나요?"

아뇨. 나는 나도 놀랄 만큼 단호했다. 어떨 땐 회사일보다 육아가 힘들었다. 육아는 많은 인내를 요구하고 참는 건 늘 괴롭다. 체력도 부친다. 과는 달리 력 대비 결과가 나오지 않아 의기소침한 때도 많다. 내 몸같이 소중한 아이여도 그 애가 나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아기가 내 품에 있는 힘껏 안겨들면 아기가 풍기는 달콤한 체취가 코끝을 맴돌고, 부족한 것투성이인 내 삶 한구석이 반짝거리며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과연 내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의심이 부풀고 자존감이 쪼그라들 때, 내 존재가 세상 그 자체인 아기의 투명한 사랑이 나를 우쭐하게 한다.

손톱만 하던 세포가 제 눈빛을 가진 어엿한 하나의 우주로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 우주의 생성에 내가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두려우면서 벅차오른다.


훗날, 아이가 이 둥지를 떠나 내가 다시 오롯한 외로움 속에 남게 되더라도 가슴 깊이 스미던 반짝거림은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 눈부신 온기가 그리워 이 쓸쓸한 생을 다시 한번 선택하게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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