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그저 그런 미적지근함.

by 나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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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은 말 그대로 반전의 연속이었다. 처음 몇 장은 가볍게 읽히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는 촘촘히 엮여가며 끝내는 꽤 단단한 미스터리로 완성된다. 복잡한 트릭이나 피비린내 나는 살인이 중심이 되기보단 이야기의 조율이 이 소설의 묘미였다. 독자는 사건의 진실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지만, 작가는 그 걸음마다 미묘한 방향을 틀며 끊임없이 시선을 어지럽힌다.

마을이라는 폐쇄적 공간, 쇼맨이라는 직업을 가졌던 다소 이질적 캐릭터인 삼촌, 그리고 ‘이름 없음’이라는 상징적인 배경까지. 모든 요소가 긴장감 속에 서서히 조각을 맞춰 나간다. 그러나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나는 꽤 낯선 충돌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비를 예보하던 하늘이 갑작스레 맑게 개는 것처럼. 범인에 대한 단서는 있었지만 그 실루엣을 상상해 볼 기회조차 없었던 탓이다. 덕분에 마지막 장면은 예상 밖이었고, 어딘가 씁쓸한 여운이 남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야기 구조는 흥미로웠지만 그 안에 깃든 감정이나 메시지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죄책감이나 슬픔 혹은 구원의 순간이 좀 더 섬세하게 다가왔다면 어땠을까. 결국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엔 답했지만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한 답은 끝내 들려주지 않았다. 한 권의 소설이 단순한 퀴즈가 되는 건, 언제나 조금 아쉬운 일이다.

또한 번역의 문제인지 몇몇 대사는 읽는 내내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일본 특유의 말투나 분위기가 한국어로 온전히 옮겨지지 못한 듯한 문장들이 종종 이야기를 흐트러뜨렸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번역은 소설이 품고 있을지도 모를 미묘한 감정선을 놓치게 만든다. 마치 배우가 감정을 담아 연기한 장면을 자막으로만 보는 듯한 거리감. 물론 내용의 이해엔 지장이 없었지만, 감정의 깊이를 느끼는 데엔 꽤 큰 장벽이 되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은 분명했다. 이야기는 차분하지만 단단하게 전개되며, 중반 이후부터는 몰입도가 확연히 높아진다. 특히 삼촌이라는 인물은 범상치 않은 캐릭터성을 지녔지만, 그만큼 현실과의 괴리감도 존재했다. 현실성과 비현실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이 소설의 정서는, 어쩌면 가장 일본 스러운 방식의 미스터리인지도 모른다.

간단히 추려보자면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은 재미있었지만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끝까지 독자를 붙잡는 힘은 있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후의 공허함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잘 짜인 퍼즐을 다 맞췄는데 그림 자체가 별로였던 느낌. 그럼에도 한동안은 마지막 반전이 머릿속을 떠돌았고 그의 그 조용한 말투가 문득 떠오르곤 했다.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 보다 무엇을 말했어야 했는가를 곱씹게 만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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