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 싫어진 날이 있다. 그건 달력에 숫자가 빨갛게 표시된 '빨간 날' 즉 공휴일이다. 매주 오는 일요일은 그렇다 치고, 간혹 생기는 어린이날, 개천절, 한글날, 부처님도 오시고 예수님도 오신 날 등등, 그리고 민족 대명절, 설과 추석....
결혼 전엔 분명히 가장 신나는 시기이고, 이때 밀린 일들이나 보고팠던 친구들을 만나거나 쉴 수 있는 여유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있고 보니 이날은 집에서 풀타임 연장근무를 해야 하는 날이 되었다. 삼시 세 끼는 물론 중간에 엔터테이닝 시간까지 가지려면 내 시간은커녕 며칠 전부터 계획도 세워야 했다. 그래도 싫기만 한 건 아니다. 못 가본 여행을 갈 수도 있고 맛있는 음식 같이 해 먹으며 보내는 즐거운 시간이 좋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 문제이기도 하듯,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는 명절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십여 년 동안 겪은 명절에 대해 요약하긴 쉽지 않다. 매번 몸과 마음이 힘들었고, 그 힘듦을 남편은 섭섭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단히 단어를 나열해보자면, 몇 소쿠리 가득한 전, 3번 들통으로 찐 송편, 대형 대야에서 무친 잡채, 맛없는 제사음식, 불편한 잠자리, 허리 펴기도 힘든 화장실, 말대꾸 없는 미소 등등이다. 좋은 것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내 머릿속 명절은 이렇다. 그래도 시댁에 갔다가 친정에 가면 여동생 내외와 짧아도 즐겁게 놀 수 있어서 좋긴 했다.
처음엔 젊은 패기로 이 모든 일을 개혁? 하고 싶었지만, 이내 그건 불가능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낳고 보니 그 모든 것이 현장체험학습이었다. 함께 송편 만들기, 한복 입고 세배하기, 제사상 앞에서 절해 보기(이것도 어른 되면 여자아이라 퇴출될 거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할아버지, 할머니, 사촌들 등 친척들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경험은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함께 해보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을 하면서 긍정적인 면만 보기로 했다.
Korea.net / 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그런데, 웬걸?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겪었듯이 명절에도 많이 모이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무엇보다 어른들께 너무나 죄송했고 부모님과 동생, 조카들을 못 보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자유다!
물론 집에서 아이와 남편과 풀타임 시간을 보내지만, 그건 이제 코로나 상황으로 너무나 '서로' 익숙해져서 크게 어렵지 않다. 게다가 이전의 명절에 비하면 세 사람 밥 차리는 건 너무나 쉬운 일 아닌가! 게다가 우리 집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먹고 싶은 음식만 만들거나 주문하면 된다. 명절이면 기계적으로 만들지만 아무도 안 먹는 그런 음식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명절 기분 내느라 전도 부치고 잡채도 무치겠지만 그걸로 다 일거다. 마지막으로 안 보이는 가족들 간의 신경전에서도 해방이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Jill Wellington님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2021년 추석, 많은 사람들이 백신을 맞고 있지만 아직은 충분치 않기에 이번에도 많은 가족이 만나는 것은 지양해달라는 정부의 안내가 연일 방송되었다. 그래서 그 말을 지켜보려 한다.
물론 친정엄마가 "네가 언제부터 법을 그렇게 잘 지켰다고!"라는 면박을 살짝 주었지만, 그래도 나 나름 법 되게 잘 지키고 살아와서 이번에도 지키려 한다. 그래서 이번은 마지막 자유로운 빨간 날이 되었다.
며칠 전 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직도 빨간 날이 싫어?"
예전에 빨간 날이 싫어진 이유에 대해서 열변을 토한 적이 있어서.. 아이에겐 각인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번엔 좋아!"
아마도 마지막이 될 자유로울 빨간 날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연휴 직전, 우연히 들른 병원에서 잔여백신으로 2차 접종을 했고 남은 3-4일 동안 최대한 여유 있게 가족들이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다. 어디 가지 못하니, 자기가 하고팠던 것들을 집에서 하면서 지낼 거다. 전 부치고 먹지 않을 음식을 만드느라 허리가 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 그래서 달콤하다.
그래도 앞으로 이러한 이유로 자유로운 것이싫기는 하다. 팬데믹으로 인한 자유로운 명절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큰 바람이 있다면 이번 경험을 계기로 음식수도 줄이고 의미 없는 허례허식도 줄였으면 한다. 너무 큰 바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