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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Nov 05. 2019

잘 하고 있습니다. 잘 하고 있어요.

2019. 8. 28(수)


닮고 싶은 언니이자, 내 인생 멘토인 '쓰는 아도르 이현진' 작가님의 첫 에세이 집 <싹싹하진 않아도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가 출간되었다. 언니의 첫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서 가까운 지인끼리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마침 언니가 방송에 출연하게 되어서 우리들의 모습까지 촬영하게 되었다. 나는 평소 고마웠던 언니에게 케이크에 축하 멘트를 적어서 전해주었다. 언니는 우리와 촬영 약속을 하고도, 이 스케줄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언니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촬영 도중에 허기가 져서 기운 빠진 티가 나면 언니가 미안해할 것 같아서, 약속시간보다 미리 도착해 명란 덮밥과 토마토 주스를 주문해 야무지게 먹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속이 든든해졌을 때 즈음, 현진 언니와 촬영팀이 도착했다. 피디님과 촬영감독님은 언니의 출간을 축하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현진 언니가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삼십 대 여성의 경력단절에 대해 각자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등의 주제로 대화하는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약속했던 촬영분을 어느 정도 마치고 잠시 쉬는 동안에도 우리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지인 중 누군가가 나에게 어떻게 프리랜서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오빠'소리 못 들어서 안달 난 조감독 놈, 회사 외에 룸살롱을 운영하며 회식 때마다 룸 언니들과 같이 앉혀놓고 시시덕거리던 사장 놈, 화장법부터 그날의 옷과 얼굴 표정까지 관리하고 싶어 하던 실장 놈, 남직원과 다리를 놓아주겠다며 성가시게 굴던 피디 놈... 성희롱을 서슴지 않고 일삼는 못된 놈놈놈들 때문에 지긋지긋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그런데 다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경험을 했더라. 여러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우리들의 기막힌 경험담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촬영 현장의 감독님과 피디님 외에는 모두 남자였는데, 나는 그들이 우리가 말하는 내용의 대부분을 엿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촬영감독님과 피디님이 저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여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겪었을까를 생각하니 무언의, 무한한 응원을 보내게 됐다. 이제는 개인의 부당한 경험을 말해도 쉬쉬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우리의 마음이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는 것이 느껴져서 마음이 든든해졌다. 



나는 아직 마꼬의 성별은 모르지만, 주변인 모두가 토토가 꾸었던 태몽과 임신 초반에 주로 당겨했던 음식으로 유추해보기로는 딸 같단다. 남자 형제가 없는 나로서는 딸이 더 대하기에 마음 편하고 좋겠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는 게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무겁다. 아이가 씩씩하고 자유롭게 자라길 바라면서도 노심초사 다치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여자애가 다리 벌리고 앉지 말아라, 옷 똑바로 입어라' 하는, 어린 시절에 어른들에게서 주입당했던 말을 내 입으로 내뱉을 날이 올까 봐 두렵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만약에 아들이라면, 아들이라는 이유로 '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시종일관 엄하게만 대할 것 같아서 걱정이 앞선다. 마꼬가 어떠한 성별로 태어날지 걱정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잘 안된다. 과연 내가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참 어렵다.



피디님은 내가 언니에게 주려고 마련해 간 케이크를 촬영에 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임신했다는 걸 현진 언니를 통해 들었다고, 축하해주고 싶다며 촬영용으로 직접 가져오셨던 케이크를 나에게 주셨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와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 안에서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케이크 상자의 무게감을 느끼며 나중에 해도 될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두자고... 지금은 축하받은 일, 기분 좋은 일만 생각하자고 생각했다. 현진 언니의 책 제목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잘하고 있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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