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의 럭셔리

50평짜리 집을 떠난다

by 나로살다

나는 무주택 주의자인 엄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자가는 커녕 전세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엄마는 집에 투자할 돈이 있으면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을 하는 것이 훨씬

가치있는 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잦은 해외여행, 고등학교 때의 영국 해외연수,

다양한 캠프와 문화 생활들.

그것들이 나의 일부를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지만 부인할 수도 없다.

다만 경험은 눈에 보이지않고 만질 수 없는 것이라

우리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집 한채도 없이 새로운 월세집을 찾아 전전해야 했을때

부모님은 서로에게 날을 세웠다.


- 당신이 알뜰하게 아껴서 집을 사놨으면...

- 애들 번듯하게 키워놨더니 무슨 소리를....


그 외 많은 흔한 부부싸움의 대사들이 뒤를 따랐다.



모든 화두에 대해 그렇듯

집을 마련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갈팡질팡, 우물쭈물, 확신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집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인지

그래도 교육이나 여행 등 다른 경험을 우선시 해야하는 것인지

머릿속을 꽉 채운 물음표 중 하나로

집은 남아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분당에 작은 집을 샀다.

아주 오래되고 낡고 작은 집이었지만

신혼부부가 살다가 첫 아이를 낳기에는 충분했다.

동남아에서 살다 온 남편에게는 숨막히게 좁은 면적이었지만, 늘 좋은 동네의 월세집을 전전하느라 23평보다 큰 집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이 집도 컸다.


생각보다 많은 대출한도로 우리 부부는 조금은 무리해서 첫 집를 샀다. 꼭 자가여야하나 싶었지만 그 때는 모두 그렇게 하는 분위기였다.


2년 후, 남편은 이제 새 아파트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회사 가까운 곳에 신축 아파트를 한 번만 보자고 졸랐다. 나는 분당을 너무 좋아했고 (어릴때 살던 목동과 비슷한 정취여서였다.) 회사 근처로 가면 회사밖에 없는 삭막함이 싫었지만, 한 번만 보자는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새 아파트는 정말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널찍하고 효율적이고 모든 게 빛이 났다.

더구나 곧 첫 아이의 사내 어린이집 입소를 앞두고 있었기에 '회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라는 조건이 매력적이었다.


분당의 집값이 예상대로 올라준 덕에

우리는 추가 대출을 받아 36평대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둘째 은우가 태어났다.


공간이 여유로우니

남자 아이 둘을 키워도 뭔가 할만 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아이들에게는 흥미로운 산책이고 탐험이었다.

심지어 한 방은 나의 아뜰리에로 꾸몄다!

(그림을 그린 건 2번 뿐이지만)


또 2년 후

아이들과 키즈카페를 다녀오던 길에

식빵을 사느라 빵집을 급하게 검색해서 들렀던 동네에 나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비가 내리는 가을 저녁

보도블럭을 뒤덮은 젖은 낙엽에서

고소하고 깊은 냄새가 났다.

어두컴컴해 보이지 않았지만 저 뒤쪽에 거대한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향기로 알 수 있었다.


- 여보, 내가 오는 길에 여기를 들렀는데 말야..

그 동네 정말 너무 좋더라~~~

- 어딘데? 아~ 여기~~~~ 우리 갈 수 있을걸?


추진력이 예사롭지 않은 남편 덕에

광교로 이사를 했다.


내가 그날 본 그 동네 아파트로

급매로 나온 집을 계약했다.

대형 평수라 과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평수와 위치에 비하면 너무 좋은 가격이었다.


또 아들 둘을 키우려면 좀 넓은 집에 살아야 할 것도 같았다.

그 때는 은행에서 대출을 펑펑 해주던 시절이었고

대출과 계약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50평대 집에서 사는 호사를 체감하기 위해 가족들을 불러모으고, 집 복도에서 아이들과 경주도 했다.

현실같지 않은, 정말 좋은 집이었다.


50평에서 사는 것은 23평에서 사는 것과 전혀 달랐다.

가족 구성원들이 독립된 공간을 가질 수 있고

넓은 공간감이 주는 여유가

우리 모두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주변 공원과 산 밑 산책길도 아름다웠다.

일단 공기가 투명하고 달았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고

은우가 아팠다.




코로나 시절이 벌써 가물가물하지만

외출을 해도 갈 데가 없던 때였다.

공원처럼 개방된 장소를 가도 꼭 마스크를 써야했으니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은우는,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저하된 면역체계 때문에

감염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어차피 외출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두 건의

전대미문의 일들이 일어났을 때

이 큰 집은

우리 가족이 버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힘든 시기를 잘 보내라고

우리가 이 집에 이사를 온 건가? 싶었다.



아이들은 집 안에서도 충분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끊임없이 놀고 떠들고 웃고 울었다.


나는 부부서재로 꾸민 방 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새로 산 노트에 새로 산 펜을 써보며

혼자만의 힐링 타임을 가졌다.


남편은 기역자 소파와 한 몸이 되어서 영상을 보며 쉬었다.


아, 그러다 어머니가 외국에서 들어오셔서 같이 사시게 되었다. 큰 집이라서 가능한 빠른 결정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다같이 10인용 대형 식탁에 모여앉아

각자 먹고싶은 배달음식을 시켜먹었다.


거의 매일 와인을 마시고 초밥을 먹고 스테이크를 구웠다.

수고하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이 정도의 사치는

사치가 아니라 응당 누려야할 보상으로 생각되었다.


아픈 아이와 그 아이의 형에게는

새로운 장난감이 보상으로 쏟아졌다.

아이들은 새 장난감으로 충분히 놀기도 전에

방금 도착한 택배 박스를 뜯느라 신이 났다.

매일이 크리스마스, 축제이자 생일이었다.


은우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면

마음이 묵직하고 덜컹거리다가 쿵 떨어지곤 했다.

피로감이 하시라도 찾아올까봐 커피와 에너지바를 먹으며 긴장 속에 병원의 치료 과정을 따르느라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집에 오면,

집은 정말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밥 냄새, 찌개 냄새,

달려오는 큰 아이,

고생했어, 라며 안아주는 남편.

한 상 차려주시는 어머니.



그땐 몰랐지만

정말 이 집 안에서 난 치유를 받고

거대하고 조용한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올해 5월에 은우의 산정특례가 끝난다는 우편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전 10월초에,

우리는 이 집을 떠나기로 했다.

5년간의 호화로운 생활을 마무리하고

옹골차고 야무진 라이프 스타일로 스위치를 바꾸기로 했다.




은우의 5년과

이 집에서의 5년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난 신을 믿지 않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이 집으로 이끈 것 같다는 기분이다.

이 집에서 나는 많은 평화와 위안을 받아

마음 속 한줄기 한줄기가 강해졌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그 커다란 나무,

생명의 나무에 기대 5년을 살아온 느낌이랄까.






고맙다.

고맙다.


힘들 때 나를 지탱해주어 고맙다.






이제

건강한 아이들과

예전처럼 환하게 웃는 남편과

묵묵한 사랑으로 가득찬 어머니와

새로운 집에서

행복한 한 발을 내딛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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