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지 않은 길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뒤로 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은 고요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열 시간 넘게 거실에 머물렀던 먼지 조각들은 나의 등장으로 인해
그제야 팔 다리를 쭉 펴며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비단 겨울이 아니어도 집은 늘 이 노래가 어울렸다.
이 집은 죽어있다.
그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도 이 집에 들어오면 생기를 잃는다.
물고기, 화분, 새, 강아지, 고양이. 또 뭐더라.
닥치는 대로 뭔가를 키워보려고 했던 건
시험관 시술을 5번째 실패했을 즈음이었다.
힘들다 힘들다 얘기를 많이 들어 마음을 단단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몸의 힘듬과 마음의 힘듬을 곱배기로 동반하는 일이었다.
날뛰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나의 기분은 늘 엉망진창이었으며
그런 나를 받아주던 남편도 지쳐갈 수 밖에 없었다.
몇 번을 반복하면서 처음의 희망섞인 말들과 강했던 의지는
자취를 감추었다.
멀리 있는 불확실한 희망은
늘 당장의 반복되는 고통앞에서 맥없이 힘을 잃게 마련이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가 그간의 고통의 증명이기라도 하듯
우리 부부는 서로를 피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더 평온했다.
아기, 라는 주제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맞이한 다른 반려 생물들도
이 어두운 집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 우리에겐 어떤 생명도 오지 않는 건가봐.
술취한 남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그 후 그는 일찍이 오리온에 접속해 몇시간이고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무슨 프로그램을 등록했는지 나는 알리 만무했다.
내가 오리온에 반감을 가진 것도 남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어두운 집에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간 것도 모자라,
나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도망가버리다니.
무책임해.
무책임해.
원망과 분노가 들끓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냥 동거인일 뿐이다.
집세를 같이 내고 생활비를 셰어하는.
필요한 메세지를 주고 받고, 가족의 대소사에 함께 참여하는.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각자 행복하기 위해 사는 인생인데,
이것이 그의 행복이라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나는...
엄마가 되고 싶다.
꼭 한 번,
죽기 전에,
엄마가 되어 보고 싶다.
내 아기의 손을 잡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보고 싶다.
눈을 맞추고 끝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오리온에서 망설인 끝에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직원은 놀랄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마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 받은 까페 서버처럼
- 아 네, 엄마되기 프로그램은 다음 장에 있습니다.
하며 화면을 스와이프 했을 뿐.
새 화면에는 세가지 메뉴가 나타나있었다.
ㅁ 부모되기, 결혼하기, 재혼하기, 이직하기
- 고객님, 이 세가지 메뉴는 최소 단위가 1년이에요.
1년 미만의 기간으로는 진정한 경험을 하시기 어려운 카테고리이거든요. 괜찮으시죠?
- 아....네. 그럼 몇년까지 할 수 있는건가요?
- 이 메뉴들은 기간 제한은 없습니다.
1년 마다 갱신하는 구조로 되어있어서, 등록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결정해주시면 되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엄마되기 프로그램은 평균 등록기간이 10년 이상이에요.
저희 베스트 프로그램이지요.
- 네, 그런데 어떻게 진행되는 지 감이 없어서요. 제가 등록한다고 하면 그 다음 절차가 어떻게 되요?
- 일단, 임신/출산부터 하실 건지, 아니며 육아부터 하실 건지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 임신이요?
- 아, 하하. 임신/출산 경험이라고 해야겠네요.
100% 동일하지는 않지만 저희 니보 수트 통해서 거의 유사한 경험을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입덧이나 몸의 통증이라든지, 붓기라든지 하는 것들이요. 물론 태동도 가능합니다.
만약 임신/출산의 불편한 경험없이 아기를 돌보는 단계부터 원하시면 그것도 가능하세요.
보통은 아기를 돌보는 단계부터 많이들 등록하세요. 아무래도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 저는 임신단계부터 할께요.
- 아, 그러시겠어요?
저희 니보 11이 새로운 기능들이 많아서요, 생각보다 많이 불편하실 수 있으신데
괜찮으실까요?
- 네, 괜찮아요. 그 단계 없이 갑자기 아기가 나타나면 실감이 안날 것 같아요.
- 고객님 말씀도 맞습니다. 사실 저희 프로그램 기획 의도도 임신단계부터 시작하시는거에요.
그럼 일단 1년 등록 도와드릴께요. 잠시만요.
화면이 빠르게 넘어가고 각종 동의 절차를 마친 후
체크박스가 즐비한 화면이 새로 나타났다.
- 엄마되기 프로그램은 옵션사항이 많으셔서요, 하나씩 설명 도와드릴께요.
한 페이지로 축약해놓은 베이비 페어였다.
신생아를 키우는데 필요한 물품부터 교육 프로그램, 산후 도우미 신청 등등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프로그램임을 이 때부터 실감했다고나 할까.
아기를 가질 준비를 몇 년동안이나 하면서 수없이 들어왔던 이름들이었다.
아기욕조, 가재수건, 모빌, 속싸개, 겉싸개, 유축기, 젖병 등등.
능숙하게 체크박스에 체크를 한 뒤 결제 페이지로 넘어갔다.
- 엄마되기 1년 프로그램, 등록비용 500만원과 옵션비용 250만원 총 750만원 결제해드리겠습니다.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그동안 시험관 시술과 그에 제반하는 비용들을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결제만 하면 엄마가 될 수 있다니.
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 고객님, 등록 감사합니다.
제가 몇가지 주의사항 마지막으로 알려드릴께요.
엄마되기 프로그램은 고객님의 최적의 몰입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반드시 접속하셔야 하는
디폴트 접속 시간이 있으세요. 만약 이 시간을 준수하지 않으신 결과로 나타나는 이슈들은
오리온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 아...어떤 이슈들이요?
- 약속된 시간에 아기앞에 나타나지 않으실 경우는 아무래도 아기가 애착형성이 부족해집니다.
그러면 과민해지고 정서가 불안해지겠죠. 사실 이런 문제보다도 실제 사례를 보면,
아이에게 우유먹일 시간에 접속을 안하셔서 경고 메세지를 보고 오리온에서 대처하는 경우도 있구요.
생각보다 책임감이 많이 필요한 일이세요.
- 실제 육아랑 비슷하네요.
- 네, 이 육아 프로그램은 저희가 가장 공들여서 기획하다보니, 필드 스터디도 많이 했고,
산모/어머니들 인터뷰도 수없이 많이 해서 머신러닝 데이터로 축적해놓았습니다.
오리온에 있는 고객님의 아기는 물론 심장이 뛰는 실제 아기는 아니지만,
만나보시면 그 차이를 못느끼실 겁니다. 고객님도 실제 아기 키우는 어머니들과 차이가 없으실거에요.
- 네...그렇군요.
- 혹시 선호하시는 성별이나, 엄마 아빠 중 누구를 닮았다든지 하는 내용 있으실까요?
첫 등록 고객님께는 특별하게 선호사항을 반영해드리고 있어서요.
- 아뇨 아뇨, 그런 것 있을리가요. 저는 제 아기면 됩니다.
-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 저희가 고객님께 최적화된 경험으로 셋팅해놓겠습니다.
분명히, 좋은 엄마가 되실 거에요. 느낌이 옵니다.
-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기로 했다.
남편의 동의나, 더 이상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필요없는 세상.
그것이 오리온에서의 엄마되기였다.
가격만 지불하면, 나의 아기를 만날 수 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콧노래가 나오고 덥지도 않은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마음이 붕 뜬 것같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먼지가 뽀얗에 쌓인 육아 서적들을 다시 꺼내보았다.
그래, 이런 책도 있었지. 참, 베스트 블로그 들도 리스트업 해놓았었는데...
분주한 나의 손길에 죽어있던 집안이 약간의 활기를 띠는 것 같았다.
내 서재 방문 밖으로 남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깐 멈춰 서 방안을 응시하는 시선이 있었던 것 같다. 이내 사라졌지만.
엄마가 되기 위해 일도 줄여야했다.
최소한 접속해야 하는 시간이 철저한 프로그램이라고 했지.
하루에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까지 6시간은 오리온에 접속해있어야 한다.
분석 결과, 그 시간이 엄마로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라고 했다.
접속 전 미리 식사를 두둑이 해야 한다고 '주의사항'란에 써있었다.
그 위에 별표를 3개 쳤다.
할 일이 많았다.
온 몸에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