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무사히 만나고 나서야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나는 단발머리에 흰 셔츠, 청바지를 입고 스니커를 신은
평범하지만 편안한 모습이었다.
희재는 핑크색 눈동자 (핑크색 눈동자 라니!) 를 깜빡거리며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 언니, 최초 접속자는 웰컴 키트가 있거든? 거기서 보구 언니 셋팅 다시 할래?
- 뭐를 하는건데?
- 지금 언니 모습 마음에 안들면 바꿀 수 있는 옵션이 몇개 있어.
이렇게 해봐봐.
희재는 주먹을 쥐었다 앞쪽 허공에 펴는 시늉을 했다.
나도 따라 하니, 눈 앞 허공에 메뉴 화면이 나타났다.
헤어스타일 5종, 얼굴 5종 (백인 2, 황인 2, 흑인 1), 의상 5종 (원피스 1, 수트1, 캐쥬얼 2, 스포츠1)
의 옵션들은 내가 무료로 선택할 수 있는 웰컴 키트였다.
더 화려하고 세련된 헤메코나
명품 백, 구두를 신으려면 당연히 추가 결제를 해야했다.
- 난 지금도 괜찮은거 같애.
- 응, 나쁘지 않은데, 다른 디폴트 들이랑 구분되는게 내가 편하니까 머리색만 좀 바꾸자.
파란색 괜찮지? 나랑 똑같이.
- 파란 머리?
- 응 ㅋㅋ 눈에 띄고 좋잖아. 한번 해봐봐.
그렇게 나는 동생과 같은 파란 머리가 되어 레이나 호텔 체크인 라운지에 도착했다.
-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자동문이 열리고 들어선 호텔 로비는
쾌적한 냉기와 함께 온몸의 긴장을 다 녹여버릴 것 같은 향기가 가득차있었다.
- 와, 향기 좋다.
- 진짜 좋다. 언니 체크인 할 때 얘기해, 언니 방에 이 향 넣어달라고.
- 향을 넣어줘? 갑자기 그게 가능해?
- ㅋㅋ 언니, 여기 오리온이야.
뭐든지 가능해. 언니가 좋아하는 거, 언니 취향대로 싹 다 할 수 있어.
멍한 기분이다.
30대에 받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기분.
근데 그 세트가 너무 과해서 마냥 좋아할 수 없고
뭔가 숨겨진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느낌이랄까.
- 고객님, 레이나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실례지만 신연재 고객님께서는 오리온 첫 방문 맞으신지요?
- 아...네, 맞아요.
- 확인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리온 첫 방문에 저희 레이나 호텔을 찾아주신 점 특히 감사드립니다.
고객님께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저희도 특별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 네...감사합니다.
극진한 멘트 후 개인정보 활용 동의서에 서명을 하는 절차가 있었다.
동의서는 장장 10장이나 되었다.
보통은 한장이면 되지않나.
- 야, 뭐가 이렇게 내용이 많아? 그냥 형식적으로 싸인하는 거 아냐?
- 언니. 오리온은 우리에 대해 거의 모든 내용을 파악하고 있어.
SNS 며, 쇼핑 패턴이며, 검색 내용까지 다 인터넷에 남으니까.
레이나에서는 이런 빅데이터를 활용해서 고객에게 딱 맞는 휴식 경험을 제공할 거고,
그 점에 동의하느냐 하는 내용이야. 뭐,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 많으니 10장이나 되는거고.
나를 다 알고 있는 호텔.
설문 조사도 취향 문의도 없이 그냥 싸인만 하면 알아서 맞춰주겠다는 거구나.
찝찝하지만 궁금했고 심지어 기대감마저 들었다.
나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빅 데이터는 오리온에게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했을까.
- 1535 호입니다. 15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캐리어도 없고 호텔 키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신기하게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아래로 몸이 눌리는 듯한 중력이 느껴졌다.
정말 현실같았다.
하지만 유리창에 비친 파란머리의 나는
비현실 적이었다.
- 희재야, 생각보다 재밌는 걸?
- 언니, 아직 시작도 안했어.
1535호 객실 앞에 도착하자 자동으로 문이 스르륵 열렸다.
- 와!
로비를 들어설 때 났던 그 향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통유리창 밖으로 빼곡히 야자수가 들어차 있는 정글이 보였다. 정글이라니. 오션뷰는 많이 봤어도 정글 속에서의 투숙은 한국에서는 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하긴, 여긴 한국이 아니라 오리온이지.
유리문을 스르르 열고 널찍한 테라스로 한 발 내딛으니,
짙은 풀 냄새가 온몸을 덮어오는 듯 했다.
정글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야자수 잎에 후두두둑 떨어지는 소리
멀리서 쏴아아- 하고 쏟아지는 빗소리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와, 너무 좋다.
비가 오는 정글 속이라 꿉꿉하고 벌레들도 테라스에 기어다닐 법 했지만
습도는 쾌적했고 벌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적절한 장소에 완벽히 편안할 것 같은 암체어가 스툴과 함께 놓여있어,
그 위에 털썩, 몸을 던졌다.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맨 발을 스툴 위에 올려놓았다.
발 뒤꿈치에 느껴지는 천의 촉감이 까끌까끌 기분 좋았다.
라탄인것 같기도 하고, 지푸라기를 엮은 것 같은,
동남아 휴양지 리조트의 가구의 촉감인것 같기도 했다.
그 상태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계속 앉아만 있어도
인생 최고의 휴가가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이제는 비 냄새가 섞여 더욱 청량한 숲의 향기를
폐부 깊숙히 들이마셨다.
완벽한 자연 속에서 휴식을 해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정글의 자태와
빗소리와
피부에 느껴지는 촉촉함,
그리고 짙푸른 숲이 주는 흙과 나무의 냄새까지.
꿈, 같았다.
통통통.
고개를 돌려보니 희재(의 아바타)가 유리문 안에서 활짝 웃고 있다.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 언니 어때, 좋지? 언니 취향이지?
- 하......진짜 너무 좋다. 나 저 테라스에서 2박 3일 있다 갈래.
- ㅋㅋㅋㅋ 언니가 좋아할 줄 알았어~~~~좋아할 수 밖에 없어 여긴. 언니한테 맞춰놨으니까.
- ...그게 무슨 소리야?
- 호텔 예약을 할 때, 어떤 고객의 취향에 맞출 건지 선택하게 되어있거든.
그 고객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따악 좋아할 만한 공간을 셋팅해줘 오리온은.
봐봐, 언니의 쇼핑 목록을 보잖아? 그럼 관심사가 나오지.
언니 향수 엄청 많이 사잖아. 향에 민감하다는 거야.
여행 사이트에서 검색했던 기록을 보면 언니는 바다 보다 산을 더 좋아한단 걸 알 수 있지.
오리온의 오감만족!
자, 지금 향 맡아봐, 아까랑 향이 바뀌었지?
그러고 보니 이제는 너무 고소하고 부드러운 커피 냄새가 난다.
- 와 커피 냄새 나네. 너무 좋다. 어딨지 커피??
- 안타깝지만 아직 오리온에서 먹을 수는 없어.
- 왜?
- 아직 기술이 상용화되질 않았어. 코와 혀와 입안의 피부를 통해서 맛을 느껴야 하는데
지금 니보 기술은 아직 미각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나봐. 어디선가 연구하고 있겠지 뭐.
그렇다.
눈을 가리는 후드가 달린 전신 수트를 입는 것도 굉장한 경험이었는데,
뭔가를 마시거나 먹는, 아니 정확히 말하는 맛을 보는 경험을 하려면
콧속과 입안까지 뭔가를 장착해야 하겠구나.
- 그래도 개발되면 엄청날 거 같은데. 뭐든지 맛볼 수 있는거잖아?
- 맞아. ㅋㅋㅋ 삼키거나 소화되는 건 아니니까 끝없이 맛볼 수 있지.
옛날 로마 시대 귀족들처럼.
그건 나중에 출시되면 체험해보기로 하고,
우리 뭐할까 이제? 이리 와봐.
희재의 손이 접혔다 펴지더니 허공에 화면이 나타났다.
- 음... 추천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이랑
발리 전신 아로마 마사지랑...그리구 쇼핑 어때?
- 오케스트라는 VOD 를 말하는거지?
- 하하, 설마 그럴리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오리온에서 공연을 하고 있더라고. 정확히는 연주자들의 아바타가 하는 공연이지.
그 실력이 어디가겠어? 이 공연도 리뷰 보니까 엄청 높아~
전기 비행기가 출시되었지만 아직까지 안전성에 대한 의구심들이 있어
해외여행은 못가본지 오래다.
석유 석탄은 이미 예전에 고갈되었고
에너지를 아껴써야 한다는 캠페인지, 글쎄,
적어도 내가 태어난 시점부터는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베를린 필하모넥 오케스트라 라니.
언감생심 꿈도 못꿔본 공연이다.
- 나 무조건 갈래, 그 공연.
- 오케이~ 그럼 공연 보고 오늘은 일단 자자.
언니 오리온 첫 경험이니까, 아마 근육이랑 신경이 긴장해서 많이 지쳐있을 거야.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발리 아로마 마사지사가 대기하고 있을거고!
이런 곳이었다니.
이렇게, 내가 바라던 것들로 가득 채워진 세계였다니.
나는 왜 이제야 와 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