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이트 조명. 흰색 형광등 아래, 사무실 한 켠.
모니터 앞 의자에 조용히 앉은 사람.
커서가 깜빡인다.)
행을 맞춘다.
열을 맞춘다.
줄 다 맞췄다 생각한 순간,
한 줄이 튀어나와 있다.
파일을 묶고,
항목을 정렬하고,
틀린 수식을 잡아내고,
정확히 F4부터 연번 오름차순!
페이지 설정 여섯번 수정.
PPT속 그래프는 삐딱하고,
엑셀 속 셀은 고집을 부리며
스캔한 서류는 이름이 이상한 걸?
"최종_최종_진짜최종"
무한히 생성되는 파일명 속에서
점점 나는 기억을 잃어간다.
'나는 누구..?'
한 줄의 시를 쓰고 싶었으나
또 하루가 ‘합계’로 끝나고,
꽃향기 대신 잉크 냄새 맡으며
봄바람 대신 컴퓨터 열을 쐬니
괜히 엄한 단축키에 탁-탁- 분풀이.
어렴풋이 상상 속 로봇을 떠올린다.
디테일에 목숨 거는
깔끔하고 과묵한 동료.
파일명을 통일하고,
수식을 정리하고,
줄 간격 불협화음을 잡아내는 동료.
Him, 그에게 묻는다.
"너는 틀리지 않을거지?"
간절한 부탁을 하려한다.
"나 대신 정렬을 부탁해."
그 사이 나는
코랄빛 노을을 두 눈에 입력하고,
새끼 강아지 컹컹 소리를 마음에 복사하고,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를 심장에 스캔할거야.
악마가 숨어 있다는 디테일은
더 똑똑한 him
너에게 맡긴다.
나는 조금 빈틈있게, 가끔 틀릴게.
그럼에도
느리고 아름다운
한 편의 시처럼,
흥미로운 한 편의 영화처럼,
오류 한 가득 품은 채 살아 숨쉬는
한 명의 사람으로 살게.
202N년 개봉예정 영화: Him
(조명 어두워진다.
종이 넘기는 소리.
어딘가에서 자동 저장이 완료된다.
눈 감으며 ctrl + c, 꿈 속에서 ctrl +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