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린 Oct 17. 2018

배낭의 무게

아르헨티나 : 바릴로체



저 멀리 넓은 호수 위로 붉은 석양이 진다. 이곳의 노을은 일상의 따분함조차 황홀함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오늘은 그런 노을을 배경 삼아 짐을 챙겼다. 기간이 정해져 있는 여행자이다 보니, 한 도시에 길게 머물러야 일주일. 어느새 정착보다는 떠남이 익숙해졌다. 여행 초반까지만 해도 내 몸의 두배나 되는 배낭을 혼자 메는 것조차 버거워했는데 이제는 제법 요령이 생겼는지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잘 맨다. 18KG나 되는 배낭의 무게도 익숙해지는가 보다.


숙소에서 바라본 바릴로체의 노을


떠날 때마다 짐을 싸는 건 꽤나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여행은 가볍게 와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건가 싶다. 짐이 많으니 챙겨야 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다. 적게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떠나와보니 사용하지도 않는 물건들이 넘쳐나고, 나보다 가벼운 몸으로 온 여행자들도 가득하다. 정신없이 짐을 챙길 때면 가끔은 잊어버리고 놓고 오는 일도 생긴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 선반 위에 벗어 놓고 온 선글라스… 출발한 후에 아차 싶지만,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그래서 매번 짐을 쌀 때마다 '다음에는 최소한의 것들만 챙겨 와야지'하고 다짐한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삶과 같다던 말을,
사소한 일상에서 자주 느끼게 된다.




떠남이 일상인 여행자이다 보니 언제든 쉽게 채비할 수 있게 배낭을 완전히 풀어놓지 않는 것도 습관이 되었다. 필요한 것만 꺼내어 쓸 수 있도록, 중간중간 짐 정리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하루를 돌아보는것으로 저녁을 맞이한다. 오늘도 역시나 새로운 날이었다. 사람 냄새나는 정겨운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시내를 구경했고,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깜바나리오 모래언덕을 올랐다. 그곳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났으며, 어제까지만 해도 혼자였던 저녁식사는 친구의 온기로 채워졌다. 우리들 모두 처음 만났지만 오래 알고 지낸던 사이처럼 정겹게 대화를 나눴다. 물론 내일이면 배낭을 메고 각자의 여행길에 오른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친구의 말에 괜히 뭉클했다.  


깜바나리오 언덕에서

이렇듯 여행 속의 일상들도 익숙해진다. 버스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하며, 못 알아듣는 스페인어에 눈치껏 행동하는 일, 상점에서 질문을 하며 장을 보는 것과 새로운 사람들과의 반복된 만남과 헤어짐을 마주하는 것. 마지막으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거리를 거니는 일까지. 처음엔 어색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모든 것들은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었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서 지난 여행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아무 이유 없이 여행 때 메고 다녔던 배낭의 무게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곤 했다. 배낭의 무게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고, 계속해서 떠나야 할 이유였다. 배낭에는 여권과 돈, 옷과 생필품 등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없으면 더 이상 여행을 할 수도, 씻을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내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것들이었다. 배낭은 삶의 무게처럼 무거웠지만, 마음만 먹으면 짊어질 수 있는 무게였다. 그것은 곧 나의 숨결이었고, 걸음이었으며, 내 삶이었다. 오히려 배낭의 묵직함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조정래 작가의 황홀한 글감옥이라는 책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세상에 고달프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한바탕 살아볼 만한 연극입니다. 그 연극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 아닙니까. 그 일이 무엇이든 자기가 성실한 노력을, 최선을 다해 바쳐 이룬 인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모든 인간은 각자의 연극을 올리는 중이고, 그 연극의 주인공인 셈이다. 주인공이 된 이상 무대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연극을 올리는 과정은 고달프고 지난하다. 하지만 고달픈 만큼 달콤하고 황홀하다. 배낭의 무게는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이 가방의 무게만큼이나 다양하게 마주하게 될 감정들은 전부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혼자서 해야할 것들과 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아주 진득하니, 나의 삶을 여행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한 편의 연극처럼 말이다.


막이 올랐다.

다시 한번 배낭을 고쳐 메고 걸어보기로 했다.




이전 01화 내 청춘과의 결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