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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May 16. 2019

그리운 그곳

칠레 :  산티아고

남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나는 ‘칠레’를 선택할 것이다.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고, 그만큼 행복했던 기억들이 많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칠레의 첫 도시 아타카마를 떠나 산티아고는 가는 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도시 이동을 하는 날이었다. 미리 예약해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선 아타카마에서 조금 떨어진 깔라마 공항으로 가야 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 갑자기 버스가 한복판에 멈춰 섰다. 고장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십분 후면 다른 버스가 도착할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시간 개념과 이들의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남아있는 승객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버스가 오길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십분 후면 온다던 버스는 올 생각을 하지 않고, 한 두 명씩 버스 밖으로 나가 도로를 서성였다. 그때 저 멀리서 작은 미니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서둘러 버스를 옮겨 탔다. 무거운 배낭들과 승객들이 한 대 섞여 옹기종기 작은 버스 안에 몸을 구겨 넣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 작은 공항이 보였다. 깔라마에서 산티아고까지는 2시간 남짓이었다. 보딩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카페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사실은 점심부터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든든하게 먹고 싶었지만, 메뉴판을 보는 순간 경악할 만큼 높은 가격에 작은 케이크 하나밖에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볼리비아를 지나 칠레로 넘어온 순간, 급격하게 오른 물가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칠레의 물가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릴 듯했다. 생각 없이 막 썼다가는 막판에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고 애써 위로했다. 배낭 여행자에게 이런 일은 빈번하니까.


저녁 8시, 드디어 비행기의 이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나 버스에서 잠을 잘 못 이루는 성격 탓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니 어느덧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산티아고는 확실히 달랐다. 칠레의 수도답게 높고 큰 건물들과 도시의 분주함을 알리는 가로등 불빛들이 가득했다.

어둠이 가득히 내려앉은 곳에는 도시 특유의 내음이 풍겼다.


지금까지의 남미 여행에서 처음 느껴보는 ‘대도시’의 느낌이었다.  


서둘러 짐을 찾고 산티아고 시내로 가는 미니 벤 티켓을 구입한 후, 고려 민박으로 이동했다. 여행 중 두 번째로 묵는 한인민박이었다.  고려 민박은 사람 냄새가 느껴지던, 정겨운 곳이었다. 민박에는 한국을 떠나 고된 여행의 외로움과 지침을 달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저기 익숙하게 들려오는 모국어를 듣고 있으니 여기가 한국인가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여행 중에 한인 민박을 찾는 이유는 대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조금 더 편하게 머물면서, 쉽게 여행의 정보를 얻기 위한 것과, 두 번째는 따뜻한 밥 한 끼가 그리워서이다.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 모두 근본적인 욕구는 같다. ‘편안함과 안정감’ 그것이다. 언어가 다른 나라에 와서 이방인의 신분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긴장감을 안고 지내는 일이라, 때로는 말이 통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익숙한 음식까지 있다면, 말 그대로 무장해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한인 민박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빨리 가까워지고, 빨리 친해진다. 다들 자신의 여행담과 인생 담을 풀어놓기에 바쁘다.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이라는 동질감이 서로를 더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장치로 작용하는 셈이다.


내가 한인 민박에 온 이유는 전자에 속했다. 남미 여행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갔고, 약간의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그리웠다. 혼자서 여행 정보를 찾고,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지금까지의 생활에 조금은 지쳐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여행이 불편하고 여유롭지 못했다는 건 아니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행 내내 가득 앉고 있던 이방인으로서의 긴장감을 떨쳐낼 만한 편암함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물어보면 언제든 친절하게 한국어로 설명해주는 직원들까지 있으니, 밤새 정보를 찾고,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 편한 여행자로서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 ‘삐그덕’ 낯선 철재 침대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웠다. 나도 모르게 긴장되어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배낭을 내려놓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새로운 곳에서의 만남,
이곳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생길지 설렘을 가득 안은채 잠들기로 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산티아고에서는 특별히 한 게 없다. 물론 유명하다던 전망대와 미술관, 밤이 깊은 줄 몰랐던 펍, 맛있는 음식이 가득했던 레스토랑 등 이곳저곳 많이 다녀왔지만, 이상하게 여행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가 되었다.


처음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 ‘여기선 이런 것들을 해야지’하고 전혀 계획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가고 싶은 곳, 발길이 닿는 곳으로 향했다. 그래서 여행이라고 느껴지기보다는 일상이라고 느껴졌던 부분이 많았다. 온전히 살아보는 여행. 그곳의 일상에 녹아드는 여행.


여행의 특별함보다는 일상의 소소함들. 딱 그 감정이었다.


클래식이 울려 퍼지는 거리와, 탱고 춤이 있는 광장, 각양각색의 예술품들이 늘어선 플리마켓, 누군가의 시간과 정성이 담겨있는 작품들이 가득했던 미술관, 커다란 나무 아래 그들을 지붕 삼아 여유를 즐기던 사람들, 시끌벅적함 마저 음악처럼 들렸던 새벽의 Bar, 야외에서 마시던 시원한 맥주, 그리고 애정이 넘치던 밤거리. 낯선 듯 익숙한 모든 것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 알고 지낸 듯했다.


나에게 산티아고는 ‘낭만’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떠남이 아쉬웠던 도시였다.

오죽했으면, 특별할 것 없던 이 도시에서 계획에도 없던 일정을 더 늘렸으니 말이다.


일상 속의 여유가 늘어남에 따라 그리움은 짙어져 갔다.
한 여름밤의 꿈. 나에겐 한여름 밤의 꿈같던 시간이었다.


내가 그곳을 쉽게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때의 향기가 너무나도 진하게 남아있기 때문이 아녔을까.


가장 그리운 그곳.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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