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꽃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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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울역 광장에 섰다. 무엇을 할까? 내가 겪은 일들은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시궁창에 빠질 수 없었다. 소설에서 보면 이런 일을 겪은 여주인공이 다방레지에서 술집으로 전전한다. 허구한 날, 남정네들 가슴에 안겨 술이나 따르다가 여관이며 호텔로 간다. 그리고 다음날 쏟아지는 햇볕을 받으며 정신없이 걷다가 약국에 들러 수면제를 사고 한강에서 투신자살하거나 시외버스를 타고 아무 데나 내려서 어디 깊숙하고 한적한 곳에 가서 자살을 끝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 유치하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했다. 일단 친구 집에 머물기로 했다.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그전에 살던 전셋집을 빼서 부모님께 집을 사 드리는 데 보탰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들을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앞뒤 생각 없이 저지르고 말았다. 대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경숙이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무조건 쉬고 싶었다. 경숙이는 삼 개월 후에 의류업체 기획실장하고 결혼한다고 하며 움직이는 걸음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또 다른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나는 부푼 꿈을 안았다. 엄청난 공을 세우며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 일인자가 되겠다고 책과 씨름하며, 도서관과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선배님들이나 친구들한테 동업해서 회사 하나 차려 보자는 제안도 받았다. 유정이가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않았다면 가능한 일이었고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너무 한순간이었다. 아니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몸이 반응한 것인지.
‘두려웠고 좋았고 너무 두려웠다.’
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구들의 모임에 유정이는 현준 씨와 나왔고 검게 탄 현준 씨와는 달리 유정이는 하얀 피부에 많이 말라 있었다. 현준 씨는 예전보다 많이 떠들고 움직이는 동작들도 커 보였다.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버스를 기다리는 등 뒤에 차가운 물체가 나를 덮쳤다. 현준 씨였다. 아까 와는 달리 무거운 분위기로 나를 이끌었고 나는 가볍게 차 한잔 마신다는 것이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됐다. 그런 일이 별거 아니게 느껴졌고 오히려 놀란 일은 현준 씨와의 잠자리를 유정이와 친구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유정이가 그렇게 말라 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들로부터 창녀가 된 것 같은 마음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경숙이를 볼 면목도 없었다. 그리고 삼류 소설대로 술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는 민수를 안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수는, 엄마가 좋아?”
아이는 파도치는 보리밭의 풍경들은 눈에 차지도 않은지 그저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의 향기가 좋아요.”
민수는 그렇게 말하고 보리밭으로 들어갔다. 지운다고 지우고 왔는데도 화장품이 아예 몸에 배었나 보다.
“민수야, 이젠 집에 가자.”
나는 민수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와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늙으셨다. 부모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엄마도 내 손을 잡아 주시지 않았다.
“성미야.”
나는 그 소리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엄마의 말씀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짐은 마루에 쌓아 놓았다. 몇 개 되지 않는 짐 보따리였다.
“밥은 먹고 가야지.”
하시며 등을 돌리시는 아버지를 뒤로한 채, 민수를 데리고 엄마와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엄마, 잘살게. 그리고 자주 놀러 와요. 제가 여기 올 시간이 없어요. 전화는 매일 드릴게요. 민수야, 할머니께 인사하고 가야지.”
나는 민수를 내 앞에 앉혔다. 부릉대는 버스 뒤로 뿌연 연기가 엄마를 가렸다. 엄마는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죽음이라는 것은 슬펐다. 민수는 학교에서 제법 상위를 차지하며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민수는 경제학을 공부해서 외국으로 나가 돈을 벌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간에 번 돈으로 작은 의상실을 차렸다. 내가 손수 패턴과 재단까지 하고 있다. 나는 옷가지마다 왼쪽 가슴에 작은 꽃을 하나씩 새겨 팔았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끝까지 서울에 한 번 안 올라오시더니 그렇게 말없이 가셨다. 나는 집에다 민수에게 편지를 써놓고 차를 몰았다. 엄마는 내게 일기장을 남기셨다. 나는 일기장을 펴 보았다. 엄마의 일기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각 장마다 들꽃이 끼어 있었다. 들꽃 같은 삶을 살라고 밟혀도 일어나고 밑둥이가 잘려 나가도 뿌리는 깊숙한 곳에서 또 자리를 잡고 있다고. 엄마의 웃음, 엄마의 눈물이 나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일기장을 덮었다. 더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나는 앨범을 찾았다. 구석구석에 있는 사진 한 장까지라도 내 앞으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예전에 나의 손때가 묻은 패턴 종이며 각자, 줄자, 곡선자 그리고 책자와 실습 때 만들었던 옷가지들과 디자인 대회에 나가서 받았던 상들, 모두 가방에 집어넣었다. 쿵! 소리가 나게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일기장을 품에 꽉 안은 채. 무거운 걸음걸이로 엄마 무덤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어떻게 살라고. 엄마, 엄마 미안해.”
나는 회한의 눈물과 함께 울분을 토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들판으로 향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자동차 핸들을 꽉 쥐었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으며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와이퍼를 내리고 전등을 끈 채 달렸다. 엑셀을 꽉 밟았다. 첫 주행을 시험받는 차처럼 거세게 속력을 내었다. 차창이 덜컹거렸다. 들판을 밟고 지나갔다. 들꽃들 위로 힘차게 밟고 또 밟았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바퀴 밑에 깔리는 것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세게 밟았다. 밟힌 것들은 밑둥이가 잘린 채 빗물에 흘러갔다.
- 2부, 끝 -
▶ 1부 * 오래전 과거, ** 과거입니다. 2부 ** 과거, *** 현재입니다.
▶ 野花(야화) 들꽃. 하층(下層) 사회나 화류계 미녀(美女)의 비유.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Image by Alicja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