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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결혼

▶ 네가 행복하면 됐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by 방현일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멀어져 가는 기차의 뒷모습을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저녁을 먹고 선영이와 커피를 마시면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 피곤하진 않았느냐, 한숨 푹 자고 나서 내일 또 얘기하자며, 선영이를 재우고 혼자 책상에 앉아 디자인을 구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재형 씨, 이거 색상이 너무 진하지 않아요? 그리고 앞가슴 쪽이 너무 파였어요.”


나는 선영이의 웨딩드레스를 비밀리에 계획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웨딩드레스, 하객들의 감탄하는 모습과 부러움을 선영이에게 주고 싶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딨어요. 그리고 이건 너무 파격적이네요. 그리고 그리고.”


팀장님은 한마디면 될 걸 항상 두 마디로 나누어서 얘기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난 그 소리가 못마땅했다. 나는 꿈을 꾸곤 했다. 파란 하늘에서 섬광이 비추고 하얀 날개를 펼치며 지상으로 내려오는 천사가 나의 분홍빛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와 함께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상상을 해본다. 분홍색은 재혼이라는데 요즘 세상에 정답은 없다.

스탠드에 불을 밝혔다. 어두웠다. 나는 지갑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문을 잠그려고 열쇠를 찾다가 계단 옆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선영이를 보았다.


“선영아, 언제 왔어? 왔으면 들어오지. 열쇠 잃어버렸니?”


선영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 피곤해. 들어가서 씻고 잘래.”


나는 문을 잠그려고 열쇠를 돌려대다 손에 힘이 빠져 열쇠를 떨어뜨렸다. 넋이 빠진 걸음으로 슈퍼에 들어가서 맥주와 오징어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어두운 거실 바닥에 앉아 병째로 쭉 들이켰다. 선영이와 나는 대학교 신입생 때 만났었다. 생기발랄하고 활달한 선영이와는 달리 나는 숫기가 없어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선영이가 내게 다가왔다. 또한 그녀가 내 앞에서 내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며 한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너, 나 좋아하지. 우리 같이 살래?”


그때 나는 아파트를 얻어 혼자 살고 있었다.


“지, 지금 한 말 사실이니, 나, 놀리는 거지.”

“아니, 나도 너 좋아.”


선영이는 그 주 토요일 이사를 왔다. 생각보다 짐은 없었다. 옷 몇 벌과 책 몇 권 등 단출했다. 그래서 나는 내 아파트를 여관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까워했다. 선영이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선영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빨래며 밥이며 설거지, 청소 등이 그렇게 신나고 즐거울 수 없었다. 심지어 선영이가 텔레비전을 보며 전화를 받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믿음직해 보였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대야에다 미지근한 물을 담아와 선영이의 발을 씻겨 주었다. 까르르 웃는 그녀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던 그녀가 외박을 했다. 물론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속이 상했다. 그동안 한 번도 외박을 한 적이 없던 터라, 당황하며 밖으로 나가서 선영이를 기다렸다. 버스정류장부터 공원까지 서성이다 핸드폰을 두고 왔기에 선영이에게 전화가 왔을까 봐 황급하게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날이 밝을 때까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 저녁때 들어와서 자고 다음날 나가고 그렇게 주기적으로 되풀이했다.




졸업을 하고 나는 전공을 살려 의류 회사에 취직을 했다. 선영이는 선배의 소개로 유명 디자이너의 의상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선형이는 두 달도 못 다니고 내 아파트에서 하루 종일 지내며 저녁때 들어온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일에 익숙해져 갔다. 그런 선영이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선영아, 너 하고 싶은 일을 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도와줄게.”


선영은 맥없이 나를 보았다.


“나, 정착할 때까지 네 집에서 살아도 돼?”

“무슨 소리야, 친구 간에 그런 말이 어딨어.”


나는 정말 선영에게 뭐든지 다 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 나 지금 너무 힘들어. 나, 결혼할 남자 있는 거 아니?”


선영이의 말은 청천벽력 같았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선영이가 내 곁에 있어준 것만이라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래, 나 그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미안하다.”

“미안하긴. 나도 네가 잘됐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나는 내가 진심이야,라는 말을 해놓고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선영이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닌지, 그날 나는 한순간도 잠을 자지 못했다.




선영이가 회사로 전화가 온건 일 년 만의 일이었다. 아주 밝은 목소리로 퇴근 후, 빨리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나는 수첩을 찾아보았다. 물론 내가 기념일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선영이와의 만남이 얼마나 됐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선영이가 좋아하는 장미와 안개꽃 그리고 케이크와 샴페인을 들고 현관에서 벨을 눌렀다. 그녀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 나는 선영이를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녀도 눈치챘는지, 나의 품 안에 스스로 안기었다. 선영이가 내 품에 안기자, 그녀 뒤에 서 있는 낯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소개할게. 나하고 결혼할 사람이야.”


그리고 그녀는 그리고를 연발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 너무 행복해. 이거 청첩장이야, 꼭 와줘. 와 줄거지?”


선영이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웨딩드레스를 빨리 완성시켜야겠다. 선영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분홍빛 웨딩드레스를 입은 천사 같았다. 나는 기뻤다. 그녀가 너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영아, 축하해!”

“고마워….”


하객들에게 둘러싸인 선영이를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했다. 선영이가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 선영이의 짐을 챙겨 신혼집으로 옮겨다 놓아야 한다. 선영이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하나둘씩 정성들에 포장했다. 그러다 맥이 빠지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눈이 아파오고 가슴이 떨렸다. 선영이에게 한마디는 꼭 해주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만 바라보았다.


- 끝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Image by Ylanite Koppen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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