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지금처럼.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워하는 게 연애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시를 쓸 때도, 소설을 쓸 때도, 에세이를 쓸 때도 그렇다. 어렵다고 해서 안 쓰는 건 아니다. 사랑 이야기를 써줘야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어느 정도는 쓴다. 시를 쓸 때는 연애를 생각하면서 쓴 게 아닌데도 친구들이 사랑 시처럼 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에 조금의 애틋함만 섞어도 그렇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시의 화자들은 얼떨결에 엄마와 연애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 사랑 이야기를 못 쓰는 이유를 쓰는 게 더 쉽다. 나는 성애적 사랑을 두려워하는 편이다. 조금이라도 성애적인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일까 봐 행동에 무척 신경을 쓴다. 착한 얼굴에 그렇지 않은 태도인 척하려고 발악하는 것 같아서 쓰기가 부끄럽지만 정말 그렇다. 연애 자체가 두려워서 아무 계기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루 종일 한 사람에게 몰입하는 일이 옛날부터 나에겐 너무 어려웠다.
사랑을 하면 사랑을 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아직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랑하는 나는 쪼다가 되는 게 보통인데 어떻게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있지? 연애를 하면 쪼다를 사랑하게 되는 일인가.
나에겐 사랑이 별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니다. 기적이라고 느낄만한 환상적인 순간이 없었는지, 아니면 내가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살아온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인간관계 같다. 사랑이 없어서, 실망만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 의미를 찾게 된다. 에너지를 현실에 다 써버려서 글에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취직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예전엔 육지에 올라올 때마다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는데 이젠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미치도록 서울이 그리웠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방에 돌아오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내 방을 좋아해 준 사람 덕에 나도 이 작은 방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사랑이 이렇게도 전이가 되는구나. 방 안에서 많은 일을 힘들어했고 울기만 해서 방을 사랑하지 못할 줄 알았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날 밤에 친언니에게 계란말이를 해줬다. 약불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까먹고 만들어서 군데군데 타고 울퉁불퉁했다. 영유아 촉감놀이용 점토를 만든 것 같았다. 이 얘기를 후배 J한테 전하니 자기도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후배 S도 데려와서 같이 술 마시자고, 계란말이를 해주겠다고 했다. J는 꼭 영유아용 점토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색다른 요청이라 웃기고 안심됐다.
서울의 작은 방에서 꽤 많은 요리를 했다. 밖에서 사 먹는 밥이 지겨워서 한 일이었다. 청경채를 썰어서 볶음밥도 하고 겉절이도 담고 미역국도 끓였다. 밥해주기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애정표현이 되었다. 맛있는 밥을 하고 싶어 재료를 사기 위해 자주 걷고 달렸다. 그게 내 고백이었다. 요리 과정은 기억이 나지 않고, 자꾸 바쁘게 움직였던 그날만 생생하게 생각난다. 어린애가 만지다 간 것처럼 알아볼 수 없는 형태가 돼버린 기억들이다.
어쩌면 쓰지 못했던 게 아니라, 쓰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지금처럼. 정말 그렇다면 거짓말을 계속하고 싶다. 베란다에 거지의 머리채처럼 무섭게 자라는 애플민트를 보니 그러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