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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Dec 27. 2021

난생처음 과학고 학생들 앞에 서다.

대구에 있는 한 과학고등학교 선생님의 요청을 받아 회사 연구원 생활에 대한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대상의 강의는 해봤지만 고등학생이라니 정말 감이 잡히지 않더군요. 연구원이 장래 희망이라는 학생들에게 도움 될 얘기를 해달라는 말씀에 이런저런 자료를 준비해 갔습니다. 시작 전에 나이를 물어보니 2004년 생이랍니다. 회사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진짜 Z세대가 짜잔 제 앞에 있더군요. 저는 9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X세대인데 말이죠.


작가 초청 강연이라니 아직도 어색.


강연은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강연이라는 건 화자의 역량이 무척 중요합니다.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와 전달력이 있느냐가 핵심인데 초반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대학생 진로 강의를 위한 내용이 그래도 유용하다 싶어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자기가 듣겠다고 한 강연이라 자는 아이들은 없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졸린 상황만 빼고요’

선생님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는 학생들이 눈에 콕콕 박혔습니다. 선생님 말마따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 수면제를 뿌리고 있는 저 스스로가 야속했습니다. 빨리 재미없는 파트를 지나가야겠다는 생각 반, 그러다가 너무 일찍 끝나면 어쩌나 걱정 반의 마음으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중반 이후 (아내의 조언에 따라) 막간 퀴즈를 낸 것이 유효했습니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조금 환기되어 그래도 막판에는 좀 활기차게 끝날 수 있었거든요. 저도 초반의 긴장과 걱정이 풀리면서 더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걱정은 저만이 아니라 초대를 하셨던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던 듯합니다. 강연 끝나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행사의 주최자로서 조마조마하셨을 거예요.


날카로운 질문의 향연

대학생 강연보다 훨씬 더 많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가장 인상적인 기억입니다. 학생들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저는 가능한 솔직하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너무 솔직했는지 선생님이 나중에 어떻게 저런 질문과 대답을? 이라며 깜짝 놀라셨다더군요.


-가치관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사람들을 리드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팁을 하나 알려 주세요.

-연구를 기획하는 업무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지, 아니면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을 바탕으로 시작하는지 궁금합니다.

-작가님 이름을 검색해 보니 링크드인이 나와서 들어가 봤습니다. 거기에 발표 논문을 적어놨던데 그중 하나에 대해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연구자로서 가져야 할 덕목 중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다른 회사의 오퍼를 받았지만 여전히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연구생활에서 가장 뜻깊었던 사례나 경험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타 부서와 협업이 많다고 하는데 어떤 태도가 일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두어 개 더 다른 질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습니다. 다시 복기해 봐도 고등학생의 질문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맨 앞에 앉아서 눈을 반짝이며 듣던 친구는 링크드인에 들어가서 프로필을 찾아보기까지 했다는 치밀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의 편견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를 생각하면 안 되겠더군요. 우리 학생들은 훨씬 더 대단합니다.


눈길에 낸 발자국 같은. 

순식간에 지나간 2시간 덕분에 밖은 이미 깜깜해 졌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깜짝 퀴즈 시 제일 처음 답해 준 친구와 정답자에게 각각 기프티콘을 쏴주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근처 편의점에서 맛있는 것 사먹으란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감사하다는 회신에 더해,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토로하고 오늘 강의를 통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강의에서도 전달했던 바와 같이 제가 대단한 성공을 이루거나 업적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대학원을 포함, 연구원으로서 20년 이상의 경험은 인생의 선배로서 '연구직이라는 눈길을 걸으며 낸 발자국’의 가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엔 저보다 더 찐 연구원의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훨씬 많은 만큼, 감히 책을 썼다는 이유로 대타를 뛰었을 뿐이지만요. 



학생들 질문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현장에서 겪은 경험에서 얻은 교훈과 인사이트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답도 그랬습니다. 열심히 하면 잘 될 거야라던가 노오오력은 언제든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던가 처럼 이상적이고 뻔한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질문에 맞게 답변도 충실하게 해야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인만큼 답의 의도를 이해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부디 연구원이라는 직업이 가진 매력과 즐거움만은 잘 알아 주었기를 바랍니다. 



덧. 강연장으로 들어오는 학생들 손에 하나씩 들려있는 녹색 표지의 책. 상당히 비현실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타인의 손에 제 책이 들려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질문 중에 책에서 봤는데..로 시작하는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요.

사실 제일 잊을 수 없던 경험은 사인회였습니다. 고작 한 두 명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의 모든 학생들이 사인을 받아갔습니다. 덕분에 잠시 유명인 행세도 했네요.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다음에 이런 강연을 가게 된다면 익숙한듯 시크하게 사인하는 방법도 알아보고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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