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동기는 40명쯤 되었다. 입사 초반에 후다닥 뛰쳐나간 여럿 이후엔 꽤 오랜 기간 다들 잘 지내왔다. 이번에 퇴사를 결정한 그는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언젠가부터 본사 조직으로 옮겨 일하던 친구다.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지도 높던 사람이다. 얼마 전 말을 걸더니, ‘나 퇴사해요’ 하였다. 크게 놀랍진 않았다. 이제 어느 누구 하나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와 경력이었기 때문이다. 궁금하여 이유를 묻자,
‘너무 웃기긴 한데… 회사 가기가 싫어서’
‘… 완전 이해한다’
아이 셋을 가진 아빠가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할 즈음엔, 구체적인 정황은 몰라도 분명 무언가 강력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어딘가에서 경력이 쌓이면 더 현명하고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순진했다. 개중에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겪은 꽤 많은 현실의 상황은 대게 반대였다. 경력이 곧 역량도 아니요, 나이 먹음이 지혜로움이나 여유 또는 현명함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을 더 지키고 싶어 하고 잠깐이라도 위기가 닥치면 이내 흔들리는 약하디 약한 모습을 보았다. 그런 평범한 속성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 회사이고, 그 안에서 하는 조직 생활이기에 회사원의 삶은 상당히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본사는 연구소 보다 더 냉혹한 정글이라고 들어왔기에 동기의 퇴사 선언이 더욱더 이해되었다. 나라면 버틸 수 있었을까. 만 20년을 채우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냐는 말에 그는 그게 무슨 소용이냐며 받아쳤다. 하긴, 그깟 20년을 꽉 채우던 20년 차에서 그만두던 그게 무슨 상관이랴.
"50살이 되기 전에, 뭔가 도전하고 싶었어"
언젠가부터 매년 위기감을 느끼지만 해가 갈수록 그 진하기와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 내가 느끼는 위기의식은 쓸모 없어짐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 포지션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이렇다. ‘그래, 너의 경력과 능력을 인정해 준다’. 20여 년을 한 조직에서 일하면서 쌓아 온 경력이 부정당할까 봐, 그게 두려운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나만의 특장점을 살려 업무 체계를 갖추고, 특별한 보고서를 써내는 등 노력을 한다. 또한 사내 네트워크를 가급적 잘 활용하려고 한다. 나 아직 살아 있다고, 그러니 나의 자리와 권한을 유지해 달라고(더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두려움은 희석되지 않는다. 남들에게 이런 말 하면, 에이 그럴 리 없다고 말하지만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위로와 공감보다는 자기 확신 아닐까.
변화를 원하지만 막상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자니 참 싫다. 열심히 쌓아 온 탑을 내버려 두고 다시 처음부터 기반을 다지는 수고로움이 싫어서? 아니다. 그걸 이미 경험해 봤기에 충분히 상상이 되는 다양한 상황들을 맞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나하나 다져가는 즐거움을 받아들이기엔, 내가 현재 손에 쥔 것에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해소하는 건 들이받고 부딪혀 보는 것이다. 피한다고 될 일이면 열심히 피해 다니겠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맞이하는 동기의 퇴사를 새로운 전환점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는 '쉰 살 이전에 새로운 것을 해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어쩐지 이대로 지내면 고인물 그 이상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시그널처럼 느껴진다. 고작 20년 차라는 경력만을 무기로 삼을 수 있겠는가?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찾아내는 용기를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