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 다리가 어떻다구요?
다친다리를 수납하 듯 택시 뒷자리에 일자로 실었다. 그리고 같이 운동하던 회원님의 부축을 받아 내리자 마자 나는 내 다친 다리가 나를 미친듯이 땅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자로 고정된 다리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땅에 짚을 수 조차 없었다. 마치 다리가 아니라 통나무가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 상태로 나는 부축 받은 채 한다리로 쫑쫑 뛰어서 병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병원엔 다행히 휠체어가 있었다. 나는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날아다니면서 운동하던 사람었는데 이젠 휠체어에 앉는 데도 도움이 필요해 졌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병원엔 다행히 그날따라 사람이 없었으므로 진료는 빠르게 이루어 졌다. 허리 디스크 문제로 3개월 가량을 치료 받았던 병원이었다. 나는 내가 일자허리에 디스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살았었다. 앉는 것도, 걷는 것도 쉽지 않은 3개월이었다. 겨우 나아 겨우 운동을 다니다가 이번엔 다리라니. 심지어 걷지 못하게 되는 것의 불편함은 허리보다 더 했다.
초음파 결과 인대가 끊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릎 안쪽의 인대가 끊어졌는데 이름이 내측측부인대라고 했다.
엑스레이 결과 그나마 뼈는 무사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이렇게 되면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땐 출혈이 심하다고 했다. 내 출혈은 애매한 정도였다. 무릎에 주사를 놓았다. 흡수되는 주사가 아니니 이게 흡수되면 그 땐 MRI로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주사 한방을 맞으면서도 두 주먹을 꾹 쥔 채 온 힘을 다해 버티던 나에겐 청천 벽력 같은 소리였다. 잘은 몰라도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군대도 안가도 되는 부상 아니던가. 내가 비록 군대와 인대 둘 다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군대가 에지간한 사유로 면제될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눈치는 있었다. 뭔가 크게 다친 느낌이었다.
"그냥 잘라주세요."
"앗, 그럴 필요 없이 갈아입을 수 있는 옷 같은 거 없나요?"
다리에 석고 보드를 대로 붕대로 고정시켜 준다고 했다. 내 마음에 쏙 들던 조거팬츠는 발목을 빈틈없이 감싸는 구조였기 때문에 그 상태로 붕대를 감을 수는 없었다.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던 나는 그냥 잘라달라고 했다. 오히려 회원님이 놀라서 다른 바지를 찾았다.
나는 자주 아팠지만 누군가가 병원에 함께 와 준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보호자가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아파서 정신 없는 와중에도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아파서 더욱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상황에 나 혼자 병원에 왔으면 그 누가 휠체어를 가져와 주며, 내 가방을 챙겨주고, 정신없는 나 대신 필요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심장 깊숙히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119에서 고정시켜 준 부목을 든 채로 조금 떨어져 서있는 모습만으로도 누군가가 나의 상태를 걱정하고 지켜보고 있다는 게 힘이 되었다.
괜찮다는 나의 말에 바지는 결국 허벅지 까지 잘렸고 물에 적신 석고 보드가 나의 다리 모양대로 열을 내며 굳어가고 있었다.
"조심히 딛고 걸어 보세요."
"걸으라고요?"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들어가는데요?
그건 정말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리 자체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른 환자들은 걸어서 퇴원을 하는 건가?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들어 가는데? 아까 검사 때문에 맞은 주사 때문에 다리에 힘이 안들어 가는 건가? 하는 나의 속사포 질문에 간호사 선생님은 다시 진료실로 사라졌고 나에게 목발을 살 것을 안내해 주었다.
한쌍으로만 판매되는 목발은 3만원이었다. 키에 맞게 목발을 조절하고 어떻게 걷는지 배웠다.
결국, 걸음마 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그 사이에 회원님은 제발 자신이 첫 진료비를 내게 해 달라면서 진료비 정산까지 마친 상태였다.
나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리다가 내가 친구 카메라에 흠집을 냈던 때를 떠올리며 보상을 조금이라도 받는 게 더 마음을 편하게 해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나의 친구는 나의 간식 테러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이게 니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
그 때를 떠올리며 나도 답했다.
"그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그럼 이번만 내 주세요. 대신 제가 다음에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킥복싱을 하다가 다쳤다는 사실은 진료차트에도 고스란히 적혀 있었고 나는 운동에 미친 환자로 낙인 찍힌 것 같았다.
"절대. 절대로 운동하시면 안돼요."
이 상태로 무슨 운동을 한단 말인가. 어이없어 웃음이 섞인 나의 대답이 몇번이나 반복되었다.
"네."
"정말, 정말 깁스 푸셔도 안돼요."
이쯤되면 환자들이 말을 안듣던가 아니면 내가 정말 많이 다친 것 같았다. 의료진이 돌아가면서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집까지 정성어린 도움으로 돌아온 나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목발을 짚고 한 다리로 그 계단을 오르면서 거의 한 달을 버텼다는 게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이제서야 내가 진짜 다쳤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동시에 일하는 학원에 전화해 사정을 얘기하고 다른 선생님과 근무하는 시간을 바꿔 1교시 시작 시간이 좀 늦춰진 상태였다.
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섞어 '이게 무슨 일이래요.'라고 남 얘기하듯 했지만, 듣는 원장님도 뜬금없이 인대가 끊어졌다는 나의 말에 정신이 없으셨을 것이다.
"언제든지 부르세요. 혹시 쓰레기 버릴 거 쌓여도 부르고, 병원갈 때 꼭 부르세요."
뜬금없이 같이 운동하던 사람이 다쳐버린 회원님도 정신이 없으셨을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몇번이나 얘기 한 후에 깁스 푸르면 같이 밥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그 때까지도 한 달정도 고생하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갓 태어난 기린처럼 비틀거리면서 어떻게든 씻고 겨우겨우 출근 준비를 마치고 택시에 올라탈 때까지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수술까지만도 석달이 걸리고, 회복까진 1년이 걸리는 대장정의 막을 올렸다.
드디어 출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