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34일 차 - 긴 평화보다 짧은 평화?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1>

by Homo ludens

[전쟁, 사랑의 방식]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얻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외부로부터의 조력을 얻으려는 것은 '주인의 도덕'이 아닌 '노예의 도덕'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직접적인 도움뿐 아니라 동정과 관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적들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선처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에 도달하기 위해서 전사가 전쟁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굳건히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외부의 강력한 저항이 아닌 내부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쟁 포로의 입을 열기 위해 취조실에서 벌어지는 간악한 계책은 괴롭히는 역할과 달래주는 역할의 구분을 통해 포로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붕괴가 '동정과 관용'이라는 일반적으로 '덕목'이라고 통용되는 것에 기인한다는 진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새로운 '덕목'을 내세우는 것일까요?


저들이 걸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유니-폼"이라고 부르지. 그러나 저들이 그 속에 감추고 있는 것만은 그래도 유니-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차라투스트라는 전사의 정신을 가진 자들이 겉으로 '동일한 형태(Uni-form)'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그들의 정신의 획일성을 만들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전사들은 동일한 목표, 즉 위버멘쉬를 향하지만 그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대상을 각기 다릅니다. 그들은 각자의 자신을 극복해야 하고, 그들이 가진 무기조차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사의 마음으로 싸워서 평화를 얻는다면, 이 승리는 영원할까요?


너희는 평화를 새로운 전쟁을 위한 방편으로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긴 평화보다 짧은 평화를 더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승리감에 도취되어 나태와 안일함에 빠지게 되면, 승리의 정신은 이내 부패하게 됩니다. 우리 내부의 안일함을 또 우리의 약점을 찾아내어 더욱 강력한 적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정한 계획을 지켜내는 매일의 삶의 승리에 도취되어 그 삶에 만족하게 되면, 새로운 삶에서 생겨나는 여러 문제를 도외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짧은 평화의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고 또 다른 전쟁을 통해 그다음 짧은 평화에 도달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정지된 상태'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전쟁과 전쟁 사이의 일시적 균형상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균형은 누군가의 강제적 힘을 통해 연장되는 순간 더욱더 큰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의사와 같이 질병의 초기 단계에 그것을 찾아내기를 바라며, 그렇게 초기 진단이 성공할 때 짧은 평화는 끝이 나고 짧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준비를 마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나약해질 만한 여러 선입견에 대항하여 진실을 입을 작동시킵니다.


이웃사랑이라는 것보다는 전쟁과 용기가 위대한 일을 더 많이 해왔다. 지금까지 불운에 처한 자들을 구해낸 것도 너희의 연민의 정이 아니라 너희의 용맹이었다.

예수가 말했던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에 차라투스트라는 반대 의견을 내세웁니다. 그에 따르면 불운에 처한 자들을 구해낸 것은 연민의 정이 아닌 용맹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예수의 의견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말에서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다면, "무조건적인 사랑"은 신의 방식이지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돕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 우월하거나 위축되는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은 누군가를 누군가에게 종속하게 만들고, 또 다른 위기에 도래했을 때 다시 그를 찾게 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몇 번의 도움 이후, 도움을 준 사람은 상대를 꺼리게 되고 상대는 도움을 준 사람의 불편한 감정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그들의 선의와 연민은 그들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랑은 전혀 예수가 말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폭력 없는 전쟁, 토론과 대화를 이어가야 합니다. 마음속에 쌓아두는 거짓 이해와 관용의 '긴 평화'는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예고할 뿐입니다.


16.jpg <꽈리 열매 앞에 있는 자화상>, 에곤 쉴레, 1912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Wien)은 과거의 영광을 엄격한 사회적 규범으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위태로운 도시였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엄격함은 변화하던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보수적인 색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예술활동과 사회규범의 변화를 강제로 억누르자 내면에 쌓인 응축된 에너지는 새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성적 억압과 신경증적 불안이 강조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빈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보수적인 사회와 대조되는 전위적 예술을 시도했는데 그 가운데 에곤 쉴레(Egon Schiele)는 자화상을 통해 분열적 자아의 모습을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그려냈습니다. 화려해 보이는 붉은빛의 꽈리 열매는 쉽게 부서지는 껍질을 가진 취약한 나약함을 보여주며, 강렬하고 날카로운 화가의 시선은 동시에 깊은 불안감을 드러냅니다. 텅 비어있는 자화상의 배경은 공동체에서 동화되지 못하고, 내외부에서 고립된 화가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고독함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쉴레라는 전사는 자신의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드러내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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