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 그리고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2>
차라투스트라는 각 민족이 가진 각자의 선악의 기준은 각자의 시련과 곤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자리 잡을까요?
"너는 언제나 으뜸이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한다. 질투에 불타는 너의 영혼은 벗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그리스인들의 영혼을 전율시킨 가르침이었단 바 이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위대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덕'을 '아레테(arete)'라고 불렀습니다. 아레테는 경쟁(agon)에서 이기며 끊임없이 자신을 뛰어넘어 탁월함에 도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과정에서 '적'이었던 상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자기 극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질투라는 감정을 자신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삼아 참된 지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도달한 자가 기준이 되고, 그것이 위대함의 증거입니다.
진정,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일체의 선과 악을 부여해 왔다. 진정, 그것들은 저들이 받아들인 것도, 찾아낸 것도 아니며, 천상의 음성으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선과 악의 기준은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닌, 승자가 만들어낸 기준입니다. 천 개의 민족이 각자의 기원을 설명할 때, 자신들의 권위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단군왕검은 하늘을 다스리던 환웅의 아들이어야 했고, 이집트의 파라오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필수적 중재자로서 하늘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권위는 하늘과 동일시되었고, 그들이 내세운 선과 악의 기준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인간의 의지를 강조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해 왔다. 먼저 사물들에 그 의미를, 일종의 인간적 의미를 창조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사람", 그러니까 "평가하는 존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평가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성경의 창세기 2장 19절에 따르면 하느님은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역할을 부여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 창세기 2:19
여기서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신이 만든 창조의 질서를 인식하고 공포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신이 정해놓은 각 동물들의 본질에 따라 명명할 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제한된 인간의 역할을 확장시킵니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은 모든 사물들의 기준을 세우는 존재입니다. 인간중심적으로 말하자면 착한 동물과 나쁜 동물은 인간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악이 되느냐로 정해집니다. 이러한 '가치평가'는 철저히 인간을 기준으로 정해지며, 평가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사물과 동물의 '가치'를 창조하게 됩니다. 가령 닭과 돼지가 가축으로 평가받기 전까지 그들은 단지 자연 속에서 인간과 함께 먹이를 두고 경쟁하는 생명체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한때 신에 의해 정했졌던 한 개체의 운명은 이제 인간의 평가에 따라 정해집니다.
지금 이 시기를 우리는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릅니다. 인류가 지구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켜 만든 지질시대라는 의미입니다. 개체수로 보더라도 2023년 기준 80억을 넘고, 2025년 82억을 넘을 만큼 인류의 수는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개체수로만 지구의 지배자는 닭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닭은 세계적으로 230억 마리가 사육되고 있으며 2014년 기준 한 해에 620억 마리가 소비되고 있습니다. 닭이 압도적 개체수를 기록하는 이유는 그들이 지구의 지배자여서가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쓸모에 따라 그들이 더 많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만든 문명세계의 힘이 이미 자연에 대항할 정도 이상이 되었음을 인식했고, 자연 혹은 신은 극복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을 지적합니다. 인간은 가치의 창조자이며, 도덕은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자의 도구입니다.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계몽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뉴턴과 같은 과학적 유물론자들의 관점을 '단일 시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뉴턴은 어둡고 고립된 바위 위에 앉아 고독 속에 있습니다. 뉴턴은 주변에 그 누구도 없음에 외롭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합니다. 블레이크의 비판과 같이 뉴턴은 영적이고 신비로운 차원을 파괴한 듯 보입니다. 그가 비록 신의 증거를 수학적 방식으로 찾아내었다고 주장하더라도, 블레이크와 같은 기존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행위는 파괴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턴은 기존의 사고방식과 결별하고 홀로 진리를 찾아 나서는 고독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구와 달, 태양 등의 천체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고, 그 가치 안에서 모든 사물들은 새로운 질서에 따릅니다. 태양과 달은 신성함 대신 질량을 가진 물질로 가치가 측정되었고, 지구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의 관계는 F=ma라는 도식을 통해 측정가능하고 기계적인 법칙으로 환원되었습니다. 뉴턴의 과학적 업적은 '으뜸'이었고, 그의 공식은 만물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가장 탁월한(arete) 도구임이 드러났습니다. 뉴턴은 자신의 의지와 지성이라는 도구로 인류사에 창조적 인간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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