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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시간, 그리고 실존:
『마(魔)의 산』 다시 읽기

1. 서론

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병”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대작 “마의 산”은 토마스 만의 대표 소설이다. 고전은 동시대 작가들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된다. “마의 산” 또한 예외는 아니다. 한국이 사랑한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마의 산』이 인물의 독서·성장 맥락에서 언급되는 대목이 있다. “마의 산”은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이 실존을 찾아가는 가이드로 무라카미 하루키에 의해 사용된다.


“마의 산”은 읽기 어려운 소설로 손꼽힌다. “마의 산” 전에 등장한 “율리시스”처럼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철학적 사조로 서로 대화하는 부분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또한 토마스 만이 지닌 통합적 역량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이 담아내는 주제, 즉 한스의 실존적 성장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계몽주의, 종교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윤리 등을 담아내는 그의 솜씨는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율리시스”처럼 언어 혹은 형식의 파괴를 시도하지 않아 “마의 산”을 읽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작업이다. “마의 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와 후설 그리고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물론 저자도 “마의 산”을 읽으면서 책을 내려놓은 것이 한두 번은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전이해”가 “마의 산”을 전적으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그때마다 설명이 필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고전을 손에서 내려놓는 것, 그것은 중단이나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 받은 것이다.


독자의 몫은 고전이 부여한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받아들여 나만의 사유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의 산”에 대한 해설은 완벽할 수 없다. 그리고 완벽해서도 안 된다. 진리는 자기 스스로 드러내는 것으로 시대와 그 시대의 인간이 가진 전이해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마의 산” 또한 그렇지 않을까? 물론 전이해의 지평은 스스로 쌓을 수도 있지만, 타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타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자만이 자기의 사유를 더욱 깊게 성찰할 수 있다. 나의 리뷰가 이를 읽는 사람들의 전이해에 조그마한 초석이 되어 같이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깊게 소망하는 바이다.


2. 줄거리

“마의 산”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한스라는 기술자 청년이 사촌 요아힘을 방문하기 위해 요양원에 방문한다. 한스는 요양원에 머문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요양원에 머물게 된다. 특히 한스는 쇼사라는 러시아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쇼사는 떠나고 요아힘 또한 군인이 되기 위해 요양원을 떠난다. 그러나 병이 악화된 요아힘은 요양원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군대로 돌아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쇼사는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오지만 페페르코른이라는 남자를 데려온다. 한스는 페페르코른에게서 큰 감명을 받고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요양원을 떠난다.


“마의 산”의 주인공은 한스다. 한스는 처음에는 자본주의와 기술주의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요양원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에 한스는 자신의 실존을 찾아가는 본질적 삶을 사는 인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처럼 “마의 산”은 한스의 성장소설이다. “마의 산”은 대표적 성장소설 “데미안”과 다르다. “데미안”이 방황하는 청년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성장소설이라면, “마의 산”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많은 철학적 사조에 한스를 대면시키고 죽음과 욕망이라는 실질적 삶으로 한스를 변화시킨다. 이를 위해 “마의 산”은 수많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각 인물들이 다른 철학적 생각을 가지게 한다.


세템브리니: 계몽주의, 합리, 진보

나프타: 종교적 절대주의, 전체주의

요아힘: 책임과 순종, 군국주의적 윤리

쇼샤: 욕망, 감각, 무의미 속의 인간성

페페르코른: 감정, 절망, 인간적인 한계


위의 다섯 인물들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부분은 “토마스 만”이 가지는 철학적 깊이를 보여준다. “마의 산”이 여러 가지 철학 사조를 담아내긴 했지만, 내 생각에 “마의 산”은 “존재와 시간”에 나온 실존주의의 실사판이라고 생각된다. 하이데거가 묘사하는 실존적 인간상 그리고 본질적 삶을 살기 위한 조건들이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지를 “마의 산”을 보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3.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본질적 삶을 사는 인간과 비본질적 삶을 사는 인간에 대해 말한다. 비본절적 삶을 사는 인간은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는 삶을 산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된다. 인간은 세상사람들이 만든 목적에 맞추어 주변사람들을 대한다. 그리고 주변 존재자를 도구적 존재자로 취급한다. 하지만, 인간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죽음에 직면하면 변화한다. 그 순간 인간은 자기의 유의미성을 찾고 진정한 목적달성을 위해 삶을 살아간다. 세상이 정해놓은 목적이 아니라, 나의 실존의 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존”을 가능케 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가능성”을 내가 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스는 어떻게 실존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주변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 즉 엔지니어라는 직업과 중산층이라는 타이틀에 따라 삶을 살던 한스는 요양원으로 떠난다. 요양원의 삶에 만족하던 한스는 사촌 요아힘과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눈 속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환상을 체험하며, 자기 존재 전체를 책임지는 실존의 길로 간다. 한스는 자신의 실존을 위해 전쟁터로 떠난다. 이처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기반으로 한스의 성장을 바라보면 “마의산”이 이야기하는 실존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된다.


4-1. 요양원의 의미

“마의 산”의 주 무대는 요양원이다. 그렇다면 요양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마의 산”이 실존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에 요양원 또한 실존에 빗대어 해석되어야 한다. 요양원은 단순한 병원이 아니다. 사람들이 병을 얻어 요양 혹은 자기를 사회와 격리하기 위해 찾는 공간이다. 실존주의 작가 카뮈는 “세상의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장애물이 인간의 삶을 가로막는 것을 말한다. “착한 사람이 대재앙이란 곤경에 처한다. 도덕적인 사람이 차사고로 죽는다. 부자들은 더 좋은 삶을 산다.” 이 처럼, 인간의 도덕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방식이 부조리인 것이다.


작품 속 ‘병’은 인간 통제를 벗어난 부조리의 얼굴로 기능한다. 병이란, 인간이 스스로 어찔할 수 없는 인생의 장애물. 세상 착한 요아힘이 자기의 꿈인 군인이 되는 것을 끝내 방해하는 부조리다. 병이란 부조리에 걸린 사람들이 찾는 안식처가 바로 요양원이다.


4-2. 부조리의 선택

부조리에 직면한 사람들은 2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첫째, 부조리에 한탄하면서, 세상이 정해 놓은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을 따른다. 이는 요양원에 끊임없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병에 한탄하지만, 병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요양원의 권력자의 말에 따라 남는다. 요양원의 고문관은 사람들에게 남아있으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의 권력자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내면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지 부조리는 사람들이 실존을 막는다.

둘째,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부조리 내에서 실존적 삶을 산다. 병에 걸린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다. 병에 걸렸기에 내가 생각하는 실존적 삶을 살 수 있다. 요아힘이 그러했고, 한스 또한 마찬가지다. 병이 한스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 오히려 한스는 부조리 안에서 진짜 삶을 살기를 택한다.


이 처럼, 요양원은 세상의 부조리에서 대피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하지만, 세상의 부조리를 이용한 새로운 무리들이 인간의 실존적 삶을 억압하는 모순적 공간이다. 세상사람들은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의 노예가 된다. 자본주의에 종속된 사람들은 돈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만들고 소비에 종속된다. 요양원 또한 마찬가지다. 병이 걸리면, 요양해야 한다는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고 서로서로 남아있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부조리에서 탈출하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수단을 배척한다. 죽음을 말하는 행위 자체를 금기로 만든다. 죽음을 공유하고 느끼려는 한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한스와 요아힘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찾아가고 위로하고 연대하는 이런 행동이 이들을 타인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들은 타자의 죽음이지만,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존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수다. 단순히 타자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진정한 가능성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 실존이라고 함은 목적이 없음을 말한다. 삶에 정해진 목적이 없기에,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가능성은 축복이자 저주다.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끝없는 선택이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이 가진 피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은 죽음이다. 이는 인간이 가능성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가능성은 유한하고 피할 수 없기에, 이제까지 실존이 주는 무한성은 사라진다. 본질이 없기에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던 인간은 무한성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난 인간만이 자기의 삶을 살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실존적 탈출을 시도하고도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오는가?

요양원을 떠난 사람들은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실존적 정신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세인들과의 삶을 동경하고 다시 그곳으로 간 것이다. 하지만, 실존적 결심이 없기에 또 다른 부조리의 등장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아니, 부조리를 찾고 부조리를 핑계 삼아 편안한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유의 능력을 잃고 복종에 익숙해진 이들은 다시 부조리 속으로 돌아간다. 쇼사부인이 남편이 지상에 있어도 요양원으로 지속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4-3. 요양원의 긍정성

하지만, 요양원이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요양원은 한스의 실존적 결단에 거름이 되었다. 인간은 세상이 정해놓은 적소성에 따라 행동한다. 나는 선생님이기에 기대되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는 대통령이기에 또는 군인이기에 특정행동을 한다. 세상은 촘촘히 짜여 있기 때문에, 인간은 우연성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나의 행동이 “나를 위해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요양원에서 인간은 세상이 정해 놓은 적소성에서 제외된다. 이는 2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세상의 정해놓은 역할과 의미에서 탈피해 스스로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인간의 이성이 무의식 혹은 세상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주장과 별개로 이성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물론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와 경험을 통한 이성의 성장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스는 나프타, 세템브리니, 페페르코른과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 사유했고 성장했다.

둘째,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지만 “손 안의 존재”에서 “눈앞의 존재”로 변화한다. 인간 또한 타 도구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눈에는 “손 안의 존재”다.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 또한 나를 그렇게 인식한다. 하지만, 적소성에서 제외되는 순간 “눈앞의 존재”가 된다.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은 “눈앞의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한스 또한 엔지니어라는 세상의 “손 안의 존재”에서 한스 그 자체라는 “눈앞의 존재”로 변화했다.


따라서, 병과 요양원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누구에게나 실존적 결단을 할 기회는 주어진다. 하지만, 기회를 이용하는 자만이 실존적 삶을 산다.”


5. 눈의 의미

소설에서 눈이라는 소재는 자주 이용된다. 눈은 어떤 이미지를 가지는가? 눈은 단절과 희망이라는 모순되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진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눈이 멈추기를 기다리던가, 아니면 하염없이 내리는 눈에 대항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눈은 하얗다. 그리고 눈 아래서는 어김없이 새 순이 돋아난다. 하얀 눈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모든 것을 덮는다는 것은 과거의 망령, 과거의 악습, 그리고 나를 억누르는 과거의 것들은 덮는다는 것을 말한다. 공교롭게도 모든 것을 덮어버린 눈은 하얗다. 하얗겠은 모든 빛을 흡수하고 반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것을 그릴 수 있게 한다. 또한 다시 돋아나는 새순은 희망을 상징한다.


“마의 산”에서도 눈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요양원에 갇힌 사람들이 사회와의 단절 그리고 실존적 결단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요양원에 갇힌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체념한다. 특히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눈은 인간이 가지는 시간에 대한 의미를 퇴색시킨다. 이는 요양원의 삶에 그들을 가둘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한스는 다르다. 한스는 눈에 대항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스키를 타고 나아갔을 때, 그는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은 한스가 실존적 결단을 하게 한다. 나프타와 세템프리니의 말 뿐인 주장을 거부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에서 나온 눈 또한 같은 역할을 한다. 경하는 인선의 집으로 가기 위해 제주로 향하지만, 눈이 그녀의 앞길을 막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그녀가 포기하고 싶게 만들기도 하고 죽음의 위기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눈을 헤치고 도착한 인선의 집에서 마침내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프로젝트를 완성할 기회를 가진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잘못된 과거의 편견과 시선을 끝내고 그녀들만의 해석을 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6. 한스의 스승들: 세템프리니, 나프타 그리고 페페르코른

한스는 요양소에서 3명의 스승을 만난다. 처음 요양소에서 계몽주의자 세템프리니를 만나고 그 후에 종교주의자 나프타를 만난다. 이들의 대화에서 여러 가지 삶에 대한 힌트를 얻어낸다. 하지만, 한스는 눈에서 환상을 경험하고 이 두 명의 사상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다. 그 후, 쇼사부인이 데려온 페페르코른을 만나는데 그의 삶에 대한 태도에 감명을 받아 진정한 실존적 결심을 한다.


“마의 산”이 어려운 이유에 세템프리니와 나프타의 대화는 큰 지분을 차지한다. 토마스 만은 말 뿐인 철학자들의 생각이 유럽의 진보를 막는 병이라고 생각한 거 같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삶 그 자체를 긍정하는 페페르코른을 내세운다.


6-1. 세템프리니와 나프타의 차이점

세템프리니는 진보주의자이자, 계몽주의자다. 세템프리니는 인간의 이성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배운다면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질병을 증오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듯 하지만, 그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형태의 이성만이 옳은 형태라는 그의 편견은 병 그 자체에 대해 증오하고 동양사람들을 진정으로 차별한다. 그는 또한, 계몽을 퍼뜨리기 위한 폭력을 옹호한다. 시민들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사회계약설에 동조하나, 사회계약의 주체에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모순에 빠져있다.


나프타는 종교 전체주의자다. 인간은 신의 노예일 뿐,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은 그에게 있어서 빠르게 의미를 잃어간다. 오직 신만이 인간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고, 신에 귀의하는 것이 실존적인 삶이라 말한다. 나프타 또한 인간을 사랑하는 듯 하지만,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폭력을 옹호한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 사냥은 사회의 발전에 진정한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실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믿는 세템프리니와 신을 믿는 나프타. 표면적으로는 상반된 생각처럼 보이지만 토마스만은 오히려 이 둘이 유사하다고 말한다. 먼저, 세템프리니는 진보를 믿는다. 그는 서양의 문명과 기술이 인류의 진보를 말한다.> 여기서 진보말하는, 인간의 이성을 사용한 기술적 경제적 발전을 일컫는다. 인간은 기술을 발달시켜 자연을 정복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자연을 정복하면 경제적 번영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러한 인류의 전진을 가로막는 사상, 행동은 모두 미개하다. 나프타는 어떠한가? 나프타는 번영보다 종교적 텍스트를 중요시 여긴다. 종교적 텍스테에 기록된 바를 달성하기 위해 인류는 전진해야 한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병이다. 투자와 금융이 경제와 기술을 발전시킨다고 하더라도 의미 없다. 왜?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런 노력 없이 돈을 받는 것은 반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나프타 또한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 인류의 진보는 인류의 종교 텍스트화다. 그 이외의 것은 의미 없다.


6-2 공통점 그리고 페페르코른

어떻게 위의 두 가지 상반되는 주장이 비슷할 수 있을까? 세템프리니는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사회의 진보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나프타는 종교적 텍스트가 정답일 뿐, 다른 기준은 용납되지 않는다. 두 명 모두 약속된 미래를 위한 희생에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조하고 찬양한다. 이점에서 한스는 두 가지 사상 모두에서 억압을 본다. 억압과 복종 그리고 바꿀 수 없는 진리에 한스는 반대하고 저항한다. 한스가 생각하는 실존은 정해진 결론이 없다. 인간은 세상에 피투(내던져진) 존재다. 내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정해진 미래도 없다. 모든 사람이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따라야 할 결과는 없는 것이다. 세템프리니의 이성과 나프타의 종교는 인간들이 실존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실존에 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약속된 미래를 믿기 때문이다. 카뮈는 그의 저서 “반항하는 인간”에서 공동체의 반항을 말한다. “시지프 신화”에서 그는 부조리에서 자살은 부조리에 대항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했고 그는 이를 “반항하는 인간”에서 타인의 죽음까지 연결시킨다. 내가 나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내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도 정당할 수 없다. 내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부조리화 되어 타인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비도덕적이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 연대하고 부조리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와 다른 인간과 유대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가 처해있는 상황은 그가 다른 실존을 찾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의 실존은 인정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과학적 유물론을 주장했다. 그의 과학적 유물론은 이 세상은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하지만, 카뮈와 한스는 불가피함의 불가피성을 주장한다. 불가피하게 손에 묻힌 피는 불가피하게 유토피아를 디스토피아로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실존에 대해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결단이 타인의 결단을 강요하지 않고, 다만 용기를 건네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페르코른은 한스에게 진정한 스승이 된다. 페페르코른은 그의 상황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 병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사랑과 즐거움을 통한 삶 그 자체를 긍정한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토론하지 않는다. 논쟁하지 않는다. 묵묵히 그 자신의 결단을 보여주고 한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를 사랑한다. 제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실존에 도달하도록 돕는 일이다. 나의 생각에 제자가 따르기를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종속이다. 따라서,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페페르코른. 그리고 한스가 자기 스스로를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그의 태도가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이끈다.


7. 고문관과 과학.

아이작 뉴턴은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을 발표하고 세상을 경악에 빠뜨렸다. 자연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아이작 뉴턴의 시도는 당시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인간은 수학과 과학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다고 자신에 차게 되었다. 지구에 앉아서 달의 공전주기를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다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이작 뉴턴을 기점으로 과학적 수학적 세계관은 모든 세계관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니다. 불확실성은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불확실성을 혐오한다. 사자의 존재가 불확실하다면? 인간은 죽는다. 기대하지 않은 홍수나 가뭄이 온다면? 인간은 죽는다. 이처럼 인간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확실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연을 정복하면서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세계는 이러한 과학적 수학적 세계관에 정복당한 상태였다. 무엇이든지 과학적으로 측정가능하고 설명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형태의 설명은 객관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다. 요양원에서 고문관들은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의사라는 직책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삶을 평가한다. 만약, 고문관이 반대한다면,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


토마스 만은 과학적 중심적 세계관에 비난을 가한다. 물론 그들의 견해가 정확할 가능성은 높지만 그들의 세계관이 모든 것을 포괄하지는 못한다. 그들의 방법이 틀렸을 수도 있고, 과학에서의 부정이 사람들에게는 긍정일 수도 있다. 고문관이 내린 판단이 틀린 경우가 요양원에서는 허다했다. 요아힘은 군대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새로운 박테리아 측정법에 따라 돌아갈 수 없었다. 측정법이 100% 올바르다는 확신을 할 수 있는가? 측정법이 100%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수용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그의 실존에 부합하는 선택일 수 있다. 과학적 세계관의 문제는 그 자체로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고문관이 요양원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고문관의 명령을 따른다. 나의 실존에 어긋나는 고문관의 판단이 사회에서 요아힘의 등장을 막는다. 사회는 고문관의 판단으로 인해 요아힘이 군대에 어울리지 않고 병을 퍼뜨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요아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칼 포퍼는 과학은 “반증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반증 가능성이 없는 주장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반증가능성을 이상으로 삼지만, 소설의 요양원은 ‘과학의 권위가 개인의 서사·결단을 압도할 때’의 위험을 드러낸다. 그에게 마르크스의 “과학적 유물론”은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왜 아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아서”이다.) 이는 고문관과 과학중심주의를 모순에 빠뜨린다. 반증 가능성이 과학의 전제조건이지만, 과학적 세계관은 과학에 대한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8. 시간의 전통적 의미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는 시간이 상대적일 뿐 절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매일매일 경험한다. 즐거운 일을 할 때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반면에, 괴롭거나 반복된 일을 하면 시간은 느리게 지나간다. 이는 전통적인 시간에 대한 해석에 반기를 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의 변화로 설명한다. 운동이 변화하면 시간이 변했다는 뜻이다. 한스가 사회에서 요양원으로 가는 운동의 변화는 시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운동의 변화에 대한 의견을 동일하나, 시간을 주관적 감성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주관적 감성은 인간이 초월적으로(경험 전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본성과 비슷하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틀이다)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경험한다고 주장했다.


8-1. 하이데거의 시간성

하지만 우리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시간은 주관적이다. 내가 경험하는 시간과 타인이 경험하는 시간은 동일하지 않다. 내가 가지는 기분에 따라 시간은 변화한다. 이에 하이데거는 인간의 시간성을 다르게 해석했다. 인간은 시간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이유는 세계가 시간을 도구적 존재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가 시간을 세계가 정한 목표를 인간이 달성하기 위한 도구화되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우리는 3시라고 하지 않고 “~을 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을 해야 할 시간”이란, 세계 안에서 인간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일을 할 시간”, “학교 갈 시간”, “쉬는 시간”등등 목적을 위한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기반으로 한 시간성을 가진다고 한다. 인간은 세상을 해석하는 존재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면 현재화된 시간성이 타당하다. 하지만, 해석은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가능성을 기반으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인다. 눈앞의 꽃은 나의 과거에 꽃에 대한 경험, 그리고 그 꽃을 통해 만들어 갈 새로운 미래를 향해 지금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주관적이고, 기분에 따라 다르게 가며, 과거 현재 미래를 기반으로 판단할 수 있다.


9. 결론

“마의 산”은 거의 9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소설이다. 길이뿐만 아니라 “마의 산”이 담고 있는 철학적 함의는 깊고 또 깊다. 책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마의 산”의 메시지는 확실하다.


“인간은 실존적 존재다. 그리고 실존적 결단은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가능하다. 단순한 언어적 유희가 아니라, 세상을 경험하고 나의 삶을 삶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실존할 수 있다.”


메시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실존적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실존적 삶을 비난하고 비웃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적 삶이 절대적 삶이다. 인간의 따뜻함 보다는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TV나 유튜브에서 돈 벌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비난은 도를 넘었다. 이러한 시대에 실존을 추구하는 한스의 여정은 과연 몇 사람에게 공감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우리 세상은 실존에 대해 태도를 달리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넷플리스 드라마 “폭삭 속아수다”가 그 예다.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가부장적인 모습에서 탈피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실존을 본다. 그리고 그 실존의 결과는 돈 없는 비참한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진정한 관계로 귀결된다. 실존하는 삶은 어렵다.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실존하는 삶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한다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세템프리니의 사회계약론은 엉터리다. 오히려 페페르코른과 한스가 생각하는 삶을 존중하는 사회가 진정 루소가 생각한 사회계약론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장 실존적 삶은 어렵겠지만, 실존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시작되는 고요한 사유일 수 있다. 토마스 만은 ‘말의 승부’로 끝내지 않는다. 『마의 산』의 토론은 요양원 밖 눈밭에서, 죽음과 마주한 결심으로 시험된다. 실존은 거창한 교설이 아니라, 부조리 속에서 내가 지금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이 소설이 긴 이유는, 그 결심이 언제나 늦게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늦게라도, 우리는 배운다. 타인의 언어로가 아니라, 나의 시간·나의 눈·나의 책임으로.

눈과 시간, 그리고 실존: 『마(魔)의 산』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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