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ley Market
그리스의 보석 같은 섬 산토리니에 몇 년 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유월의 화창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 섬의 자태는 파랗고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철강 원료나 반제품과 같은 물건을 주로 삼국간 무역으로 거래했던 나는 좀처럼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가 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출장으로 터키와 러시아를 갔던 게 거의 다고 북미나 중남미에는 전혀 가 볼 기회가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어릴 적 친구를 만나러 미시간으로 여행을 가면서 미국 땅을 처음 밟아 보았다.
지난번 14번 버스를 타고 스탠리를 향해 가다가 중간에 타이탐 저수지의 손짓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려 예상치 못한 기쁨을 맛보았다.
오늘 성탄절 아침에는 성탄 미사를 성가대석에서 봉헌하고 나자 긴 하루의 여유가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예전 경험에 따르면 보통 성가대는 이런 특별한 미사를 마치고 나면 회식을 하고 단원끼리 친목 시간을 가지곤 했다. 홍콩 한인 성가대에는 그러한 문화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따라서 미사 후의 일정이 비어 있던 나는 다시 한번 스탠리를 목적지로 이층 버스에 몸을 실었다.
14번 버스가 어떤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승객들 모두 내리기 시작했다.
'벌써 남쪽 끝에 다다른 것인가?'
버스에서 내리자 군부대 표시가 된 철문이 보였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마음의 긴장을 스르르 풀어 주는 풍경화가 펼쳐졌다.
가만있자. 이 장면 어디서 좀 본 듯한데. 흠..그래 똑같은 건 아닌데 풍경이 섞여 있어. 푸른 바다를 끼고 나에게 갑자기 달려들었던 그리스 산토리니와 인적 드문 고요한 어촌 마을 일본 기타큐슈 와카마츠 아시야.
산토리니를 알고 아시야를 아는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게 스탠리 풍광은 그런 느낌으로 눈 안에 들어왔다.
문득 홍콩과 나의 인연이 더 깊어질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난 넉 달의 시간으로는 도무지 그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 일과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큰 원인이었겠지마는 왠지 이곳과의 정이 늘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꾸 하곤 했다. 어쩌면 홍콩이 나와 맞지 않은 곳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아닌 이유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 일은 나한테 그렇게 맞지 않아.
아, 정말 사람이 왜 그래?
날씨는 왜 이 모양이지?
아파트는 왜 이리 좁고 높기만 한 건가.
물가는 비싸고 어딜 가나 복잡하고 사람 득실거리는 거리하며.'
버거웠다. 힘들다는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던 내 모습은 어느새 주눅이 들어 있었다. 잘할 수 있다는 밝은 느낌과 생동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않았다. 하루가 처지면 하루는 살아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달아나고 싶었다. 이곳에 있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찾고 또 찾고 말하고 또 말하니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
번민과 갈등의 날들이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감사했던 일은 혼자만 끙끙대지 않고 누군가와 나누고자 했고 그저 내가 처한 어렵고 답답한 상황을 잘 들어주고 토닥여 주던 친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말을 한다고 뭔가 해결이 되거나 누군가가 답을 알려 주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에너지가 자꾸 줄어가는 나를 그들은 가엾게 여겨 주었고, 자신도 일상의 문제와 씨름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기꺼이 나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못내 고마웠다. 그걸 잊지 않고 싶다. 나도 그 친구들에게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진실한 욕망을 품게 되는 이유이다.
스탠리의 굵고 이끼 가득한 푸른 나무들이, 양털구름 뭉게뭉게 낀 하늘이, 부서지고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이, 아파트촌을 잊게 해 주는 낮은 키의 집들이, 파아란 하늘을 위~위~ 맴도는 솔개가 나직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처음 이 거대하고 복잡한 대도시에 왔을 때 키타큐슈의 그 한적하고 쾌적했던 분위기가 간절하게 그리웠다. 다시 또 이 도시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일도 익지 않았고, 사람들도 모두 낯설고 서먹서먹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골치 아픈 일들이 채 적응하지 못한 나를 물고 할퀴어댔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나만의 휴일을 가지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홍콩의 교외로 떠나게 되었다. 시작은 드래곤 백이라는 홍콩섬 남쪽의 유명한 트래킹 명소였다. 그때 비로소 홍콩이 빌딩숲과 사람과 차로 북적이기만 하는 도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두 번째로 타이탐 저수지 근처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지와 바다를 만나게 되면서 홍콩에서 사는 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 두 번의 산책으로 홍콩이라는 낯선 도시가 내게 또 다른 안식처가 될 가능성이 확인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세 번째 산책을 나온 스탠리의 나지막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 그립고 아쉬운 키타큐슈에서의 삶을 보상해 줄 아름다운 자연이 여기에도 있지 않냐며 스탠리의 굵고 이끼 가득한 푸른 나무들이, 양털구름 뭉게뭉게 낀 하늘이, 부서지고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이, 아파트촌을 잊게 해 주는 낮은 키의 집들이, 파아란 하늘을 위~위~ 맴도는 솔개가 나직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세 번의 산책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단 하루도 해가 쨍 비치는 날은 없었다. 만일 이토록 멋진 자연의 풍경을 마주할 때 태양마저 찬란히 빛나고 있다면.. 오! 그건...
이다음 산책은 Pok Fu Lam이다. 홍콩은 날씨가 화창한 날이 생각보다 적다고 한다. 욕심을 내지 않겠다. 날씨가 흐려도 충분히 감사하며 나는 보상을 받을 것을 안다.
그러나 만일 햇살이 상큼하게 비치는 날을 혹시 그때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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