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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Dec 01. 2018

홍콩 트래킹 2탄

Tai Tam Country Park

14번 2층 버스를 타고


 지난번엔 Dragon's Back을 가기 위해 9번 버스를 탔지만, 이번엔 집 바로 아래서 출발하는 14번 버스를 탔다. 그러니까 Sai Wan Ho의 Grand Promenade 아파트에서 출발하는 버스이다. 원래 목표는 Stanley Market이었다. 8월에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 줄곧 14번 버스를 타고 Stanley Street나 시장을 방문해 보고 싶었다.


 자세하게 알아보고 가지 않는 편이다. 그냥 수많은 목표들 가운데 설겅설겅 몇 개를 떠 올리고 타이밍이 맞으면 가는 거다. 스탠리 마켓도 그런 마음으로 가려고 했다.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 버스 정류장 기점에서 14번 버스를 기다리면서 구글 지도만 한 번 찾아보았다. 홍콩 아일랜드 남쪽으로 내려가는 붉은 선이 구글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었다.


 기다리는 승객 줄의 맨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바깥 구경을 가장 잘할 수 있는 2층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홍콩에 와서 즐거운 일들 중 하나는 2층 버스 맨 앞에 앉아 통유리 너머로 펼쳐지는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다. 아마도 2층 버스를 타 본 사람들이라면 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버스는 금세 산으로 오르는 도로에 올라탔다. 길은 넉넉해 보이지 않았고 맞은편에서 심심치 않게 차들이 제법 빠른 스피드로 지나쳐 갔다. 버스의 덩치는 사뭇 커다래서 2차선 도로 한쪽을 가득 메우며 달렸다. 때문에 도로 편으로 뻗은 나뭇가지들을 버스가 계속 찰싹거리며 긁고 지나갔는데 조금 서늘한 마음과 조바심이 생겼다.


  직선도로에서는 쉬지 않고 씩씩하게 달리던 14번 버스가 커브길에서 속도를 늦추며 멈추어 섰다. 맞은편에서도 같은 몸집의 2층 버스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허리를 타고 돌아가는 굽은 길이었으니 두 대의 거대한 차들이 그대로 달려 서로 스쳐지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랬다가는 틀림없이 접촉사고가 날 만큼 길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아직 목적지 스탠리 마켓은 한참 남은 것 같은데 눈앞에 갑자기 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일본 큐슈섬에 살 때 보았던 저수지 풍경을 닮은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급히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 하차벨을 눌렀다. 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직접 거닐며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길이 저수지를 가로질러 간다


 Tai Tam Country Park


 많은 사람들이 홍콩 하면, 엄청나게 비싼 땅에 마천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곳곳마다 각종 상품들이 쇼핑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풍경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광동의 유명한 딤섬을 비롯해 온갖 문명에서 온 다양한 먹거리도 홍콩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홍콩의 땅값이 그렇게 천정부지로 오르게 된 것은 땅이 정말 모자라서가 아니다. 사람과 차와 빌딩으로 북적되는 홍콩의 중심지를 대중교통을 이용해 한 시간만 벗어나면 수풀이 우거지고 저수지와 바다가 숨 쉬고 있는 매력 넘치는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아마 이러한 그린벨트가 주택부지로 풀린다면 홍콩의 부동산 가격은 폭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개발이 금지된 육지와 섬이 퍽 넓게 자리잡고 있다.  


 '오늘 운이 좋다. 그래, 바로 이거지.
이런 데를 오고 싶었어! '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큐슈를 떠나 서울로 와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대도시 홍콩으로 오게 되면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몇 개월 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오랜 세월 의도적으로 개발을 막고 보호해 온 이 귀하고 귀한 자연을 조금 맛보고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홍콩에 머무는 동안 가능하면 더 자주 이런  평화를 찾으러 나서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일러두었다.


 가랑비가 살짝 내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아쉬운 마음에 평소 가 보고 싶었던 곳들을 다녀 보기로 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야자키현 '타카치호 협곡'이었다. 그때도 하늘은 흐렸고 비가 살짜기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생김새나 지형은 달라도 타카치호 협곡 근처를 홀로 거닐며 생각에 잠겼던 그때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https://brunch.co.kr/@ndrew/308


이 장면은 키타큐슈 톤다 저수지를 연상케 한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빌딩은 실내가 매우 서늘하다. 홍콩의 많은 빌딩들이 냉방을 좀 세게 가동하는데 특히 우리 빌딩은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흐린 날이면 그 냉기가 더욱 심하게 느껴져 9월부터 초겨울 잠바를 사무실에 가져다 껴입고 일을 한다. 안 그래도 업무와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작지 않은데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사무 공간에 썰렁함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기분은 사람을 무척 가라앉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홍콩은 바깥에만 나오면 나쁘지 않다. 근래 몇 년 들어 공기가 매우 나빠진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바다와 산이 지척이고, 공기 오염을 시키는 산업 시설이 가까이에 별로 없는 이곳은 제법 숨 쉴만하다. 게다가 추위보다 더위에 강한 체질 덕분에 홍콩의 덥고 습한 날씨가 그리 문제 되지 않는 편이다. 더구나 11월 아닌가. 사람들 말로 예년보다 서늘하다는 요즈음 홍콩 날씨는 연중 최고의 쾌적함을 뽐내고 있는 중이다. 휴일에 이렇게 빌딩숲과 인간시장을 벗어나 물 좋고 공기 좋고 그림 같은 풍경이 있는 곳에 나와 호젓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프로 테니스 라켓 Stringer(줄을 매고 관리해 주는 전문가) Stanley


 테니스 동호회에서 같이 운동을 하는 회원들 가운데 프로 테니스 선수들의 라켓 스트링(줄)을 관리하는 분이 있다.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평생 스포츠계에서 일하고 스스로 관리를 잘해서인지 매우 강건해 보이며 체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에게 Dragon's Back과 Tei Tam 저수지 트래킹이 너무 좋았다고 말하자 자기도 키우는 개를 데리고 Tei Tam 저수지로 자주 산책을 나온다고 했다. 이곳 말고도 홍콩에는 가볼 만한 곳들이 꽤 있다고 하면서 'Pok Fu Lam'이라는 또 다른 명소를 소개해 주었다. '폭풀람'은 홍콩 아일랜드 서쪽에 위치한 자연공원으로서 역시 저수지를 끼고 눈푸른 수풀이 함께 하는 곳이라고 했다.   


 스탠리 마켓과 이름이 같은 테니스 동호인 스탠리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매우 전문가적인 지식과 열정을 가진 멋진 홍콩 사람이다. 그의 영어 발음을 들어 보면, 마치 오랜 세월 훈련된 라디오 디제이나 방송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온다. 홍콩 사람들이 대개 영어를 잘하는 편이지만, 편차가 있다. 그런데 스탠리는 구사하는 어휘의 수준과 듣기 좋고 정확히 떨어지는 영어 발음으로 미루어 볼 때 교양과 교육 수준이 높다는 느낌을 받는다. 테니스 게임을 잠시 멈추고 쉬는 시간에 그로부터 프로 테니스 플레어들의 라켓 스트링 습관과 선호도 그리고 그가 탑 플레이들과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무척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보통 프로 선수들이 시합을 앞두고 똑같은 텐션(줄 매는 세기)의 똑같은 라켓을 여러 개 준비한다고 한다. 보통 5개에서 7개 정도는 준비하는데 선수에 따라서 그보다 적거나 훨씬 많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선수들은 스트링에 매우 민감하고 예민해서 날씨와 습도에 따라 미세한 대응을 하기도 하고 어제 맨 줄을 끊고 다시 모두 새로 줄을 매기도 한다고 했다.


 동호인으로 나는 약 48~51파운드의 세기로 테니스 스트링을 매는데, 파워를 추구하는 플레이어는 텐션이 더 낮아지고 미세한 컨트롤이 필요한 플레이어는 줄을 더 세게 맨다. 스탠리는 한때 60파운드까지 텐션을 올려 테니스를 했었는데, 그렇게 하면 공을 칠 때 진동이 엄청나서 손목과 관절에 엄청난 부담을 주게 된다. 결국 몸이 상하는 걸 느낀 그는 텐션을 낮추기로 했다. 지금은 스트링의 텐션 (줄 매는 세기)은 수치에 불과한 걸로 생각한다고 했다.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은 대개 라켓의 텐션인 얼마인지 알고 치면 그 수치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한 번은 스탠리의 친구가 묻지 말고 그냥 자기가 주는 라켓을 들고 복식경기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에게 건네진 라켓은 '프린스'였는데 공을 몇 번 쳐 보니 텐션이 비교적 낮은 걸로 느껴졌다고. 자신이 평소 꽤 높은 텐션의 스트링으로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느슨한 줄로는 실력 발휘가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번 공을 치고 영점 조정을 해 보니 그럭저럭 재미있게 복식경기를 소화했다고 한다.


 시합이 끝나고 친구에게 물었다. " 대체 이 프린스 라켓 텐션이 몇 파운드인 거야? "


 친구가 되물었다. " 얼마인 거 같아? "


 스탠리는 "글쎄, 40대 후반쯤 되지 않을까? "


 "그보다 더 낮네. " 친구가 대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은 세계적인 복식 탑 플레이들 가운데는 상상하지 못할 낮은 텐션으로 우승을 수차례 거머쥔 선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40대 이상이 되어서도 훌륭한 성적을 냈다고 한다. 테니스 선수 치고는 상당히 나이가 든 때에 복식경기를 하던 그의 테니스 라켓 텐션은 얼마였을까?


 나이가 들었으니, 파워가 더 필요했을 테고 그렇다면 50파운드 미만이겠지 하고 추측해 보았다. 스탠리는 내가 상상하는 이상이라고 했다.


 정답은 '18파운드'


 18파운드라고 하면 배드민턴 줄보다도 느슨한 헐렁한 텐션이다. 43파운드 이하로 쳐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30파운드 대도 어떨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말 상상불가의 낮은 수치였던 것이다.


 스탠리는 그 후로 수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프로 선수들 가운데서도 어떤 선수는 어제 썼던 라켓을 다음 시합에도 쓰기도 하고, 다른 선수들이 라켓을 다섯 자루, 일곱 자루 심지어 열 자루 이상 준비할 때 그 선수는 달랑 한두 개를 들고 시합에 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선수는 줄의 세기에 그렇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줄의 세기가 어떻든 그 선수 자신이 줄의 세기에 자신을 맞춘다고 했다.


 여간해서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전문가 친구에게서 매우 흥미로운 마음으로 경청했다. 인간은 활자와 숫자를 맹신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일단 프린트되어 나온 활자를 대하면 아무리 허접한 말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걸로 느껴지는 것이다. 소위 데이터라고 하는 정보들도 마찬가지다. 테니스 줄의 세기가 몇 파운드 하고 나오면, 테니스를 하는 사람은 거기에 벌써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텐션임에도 평소 자기가 쓰는 수치의 세기가 아니라면 정신적으로 부담을 느끼고 실력 발휘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탠리 이야기하다가 배가 산으로 갔다. 홍콩엔 흐린 날이 많은데 오늘 날씨가 무지하게 화창하다. 빨리 글 마무리하고 나가야겠다. 햇볕 따땃하게 쐬러. 그리고 조만간 친구가 소개해 준 Pok Fu Lam에 꼭 한 번 방문할 것이다. 오늘처럼 해가 눈부신 날에 말이다.

아저씨들이 바쁘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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